-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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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첫 아이 돌잔치는 코앞에 닥쳤는데 집사람이 맡긴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했으니 명치 끝에 두꺼운 국어사전이라도 올려놓은 듯 숨이 가쁘다. 그냥 못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오기가 화를 불렀다.
벌써 한달 전에 집사람이 물었다.
"돌잔치 때 상영할 동영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전문 업체에 맡길까?"
여기서 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얼만데? 15만원? 무슨, 까짓 거 내가 하고 말지."
큰소리는 쳐놨는데 앞이 깜깜하다.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죽었다 깨나도 못하겠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평소부터 컴퓨터라면 좀 다룬다고 큰 소리를 쳐온 탓도 있지만 그보다 집사람의 서툰 컴퓨터 실력에 몇 번 면박까지 준 터라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집사람은 사이사이 다른 돌잔치 성장 동영상을 구해다가 보여주며 본인의 기대치와 내 능력치 사이에는 근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수시로 확인시켜줬다. 몰래 인터넷으로 동영상 편집 관련 책을 '삼만 원'씩이나 주고 주문했다는 것까지 들통 나고 보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수요일 저녁 10시에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에 앉았다. 각오는 비장했지만 기초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에 배치된 학도병의 마음이 이랬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지난 일 년 동안 디카로 틈틈이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 사이에 찍어온 사진들, 동영상들을 뒤적이다 보니 그 사이 잊고 있었던 분만실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지난 일년 간의 시간들이 행복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사진을 고르고 늘어놓고 글을 적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 7시반이었다. 모니터 화면엔 아이의 모습이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월요일 회사에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구본형 변화 경영 연구소 연구원 1차 합격이란다. 기쁨도 잠시 머리가 바삐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감일 정오를 목표 시간으로 정하고 나니 당일을 포함해서 일주일이 남았다. 점심 시간에 서점에 들러서 책을 확인하니 두께도 엄청나지만 내용은 더 아찔하다.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리석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대략 오천 원을 아낄 수 있다는 값싼 욕심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하루 배송 보장'이라는 인터넷 서점의 광고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화요일, 수요일에 걸쳐 주문했던 사이트로, 택배 회사로 뻔질나게 전화를 하며 속을 태웠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돌잔치 동영상도 만들어야 하니 그걸 끝내고 책에 매달려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희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결국 책은 목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다. 수요일 밤을 1분도 못 자고 꼬박 깨어 있었던 탓에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발음 하기도 어려운 도시와 사람의 이름들은 자장가를 불러댔다. 내 절실함은 체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니 금요일 아침이었다. 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책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출퇴근 전철에서 읽는다고 읽었지만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금요일 밤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았다. 그러나 잔뜩 벼르고 도착한 집에는 토요일, 돌상을 차리기 위해 집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그득했다. 자정까지의 시간을 집사람에게 헌납했다. 다음 날도 난 의자에서 잠이 깼다.
토요일, 호화 돌잔치에 대한 신문 기사가 천 원도 아껴가며 준비한 집사람의 심기를 조금 건드린 것을 빼곤, 돌잔치는 무사히 끝났다. 아이도 집사람도, 덩달아 나도 행복했다. 어렵게 만든 동영상은 히트를 쳤다. 덕분에 돌잔치 동영상 2개 그리고 웨딩 동영상 1개를 의뢰 받는 엉뚱한 영광도 누렸다. 이제 그 의뢰들을 어떻게 잘 거절하는가가 숙제로 남았다.
사랑하는 아이의 첫 생일잔치 준비와 연구원 과제 사이에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흥분 가득했던 일주일이 흘렀다. 이렇게 바빴던, 이렇게 정신 없었던, 이렇게 마음 졸였던 한 주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 동안 내겐 얼마나 절실함이 부족했던가?
지금 시간은 월요일 아침 7시다. 토요일 밤부터 지금까지 미친 듯이 읽고 밑줄 친 '미완의 시대'를 보니 대략 100여 개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흠뻑 빠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가득 누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지만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 몸과는 달리 보라색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따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두 번째 과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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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동안 가슴을 태웠던 두 가지 중에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에 남기는 영상입니다. 정말 행복했던 한 주였습니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한 주를 기대해봅니다.
IP *.227.22.4
첫 아이 돌잔치는 코앞에 닥쳤는데 집사람이 맡긴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했으니 명치 끝에 두꺼운 국어사전이라도 올려놓은 듯 숨이 가쁘다. 그냥 못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오기가 화를 불렀다.
벌써 한달 전에 집사람이 물었다.
"돌잔치 때 상영할 동영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전문 업체에 맡길까?"
여기서 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얼만데? 15만원? 무슨, 까짓 거 내가 하고 말지."
큰소리는 쳐놨는데 앞이 깜깜하다.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죽었다 깨나도 못하겠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평소부터 컴퓨터라면 좀 다룬다고 큰 소리를 쳐온 탓도 있지만 그보다 집사람의 서툰 컴퓨터 실력에 몇 번 면박까지 준 터라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집사람은 사이사이 다른 돌잔치 성장 동영상을 구해다가 보여주며 본인의 기대치와 내 능력치 사이에는 근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수시로 확인시켜줬다. 몰래 인터넷으로 동영상 편집 관련 책을 '삼만 원'씩이나 주고 주문했다는 것까지 들통 나고 보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수요일 저녁 10시에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에 앉았다. 각오는 비장했지만 기초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에 배치된 학도병의 마음이 이랬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지난 일 년 동안 디카로 틈틈이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 사이에 찍어온 사진들, 동영상들을 뒤적이다 보니 그 사이 잊고 있었던 분만실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지난 일년 간의 시간들이 행복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사진을 고르고 늘어놓고 글을 적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 7시반이었다. 모니터 화면엔 아이의 모습이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월요일 회사에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구본형 변화 경영 연구소 연구원 1차 합격이란다. 기쁨도 잠시 머리가 바삐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감일 정오를 목표 시간으로 정하고 나니 당일을 포함해서 일주일이 남았다. 점심 시간에 서점에 들러서 책을 확인하니 두께도 엄청나지만 내용은 더 아찔하다.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리석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대략 오천 원을 아낄 수 있다는 값싼 욕심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하루 배송 보장'이라는 인터넷 서점의 광고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화요일, 수요일에 걸쳐 주문했던 사이트로, 택배 회사로 뻔질나게 전화를 하며 속을 태웠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돌잔치 동영상도 만들어야 하니 그걸 끝내고 책에 매달려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희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결국 책은 목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다. 수요일 밤을 1분도 못 자고 꼬박 깨어 있었던 탓에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발음 하기도 어려운 도시와 사람의 이름들은 자장가를 불러댔다. 내 절실함은 체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니 금요일 아침이었다. 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책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출퇴근 전철에서 읽는다고 읽었지만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금요일 밤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았다. 그러나 잔뜩 벼르고 도착한 집에는 토요일, 돌상을 차리기 위해 집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그득했다. 자정까지의 시간을 집사람에게 헌납했다. 다음 날도 난 의자에서 잠이 깼다.
토요일, 호화 돌잔치에 대한 신문 기사가 천 원도 아껴가며 준비한 집사람의 심기를 조금 건드린 것을 빼곤, 돌잔치는 무사히 끝났다. 아이도 집사람도, 덩달아 나도 행복했다. 어렵게 만든 동영상은 히트를 쳤다. 덕분에 돌잔치 동영상 2개 그리고 웨딩 동영상 1개를 의뢰 받는 엉뚱한 영광도 누렸다. 이제 그 의뢰들을 어떻게 잘 거절하는가가 숙제로 남았다.
사랑하는 아이의 첫 생일잔치 준비와 연구원 과제 사이에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흥분 가득했던 일주일이 흘렀다. 이렇게 바빴던, 이렇게 정신 없었던, 이렇게 마음 졸였던 한 주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 동안 내겐 얼마나 절실함이 부족했던가?
지금 시간은 월요일 아침 7시다. 토요일 밤부터 지금까지 미친 듯이 읽고 밑줄 친 '미완의 시대'를 보니 대략 100여 개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흠뻑 빠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가득 누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지만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 몸과는 달리 보라색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따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두 번째 과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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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동안 가슴을 태웠던 두 가지 중에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에 남기는 영상입니다. 정말 행복했던 한 주였습니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한 주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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