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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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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9일 17시 40분 등록
1. 세종대왕을 다시 만나다

지난 1월 대학원 동기들이 주관하는 연구모임에서 세종에 대한 강의와 토론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대마도 정벌, 4군6진을 개척한 조선의 3대 왕이었다는 단편적 지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론의 교재였던 세종의 국가경영(정재윤외 11명 공저, 지식산업사)에 대한 지도교수님의 강의와 토론후의 세종대왕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맨 처음에는 32년간 짧은 재위기간에 이루어놓은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업적에 놀라웠고, 그 다음으로는 수많은 업적을 이루기 위한 제왕으로서 추진력, 판단력, 창의성에 놀라웠고, 맨 마지막에는 홀로 외로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군주의 쓸쓸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건국초기 불안한 조선을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은 훌륭한 리더로서의 자질은 코리아니티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이를 실행한 선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00년전의 일로 현재와 연관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세종대왕의 행동을 면밀히 살펴보면 코리아니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 모순을 극복하다

코리아니티의 특성중에 가장 공감을 크게 가진 부분이 바로 모순을 껴안는 힘, 엇박자의 묘미였다. 세종대왕의 경우에도 이러한 모순을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힘이 강하였다. 먼저 세종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형인 양녕대군이 1404년(태종4년)에 세자가 되었고, 궁중생활의 부적으로 인하여 1418년(태종18년) 폐위가 된 후 바로 그해 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8월에 조선의 3대왕에 즉위하였다. 14년 동안 세자가 아닌 대군으로 지낸다는 것도 가혹한 일이였고, 당시 정세도 아버지 태종의 형제의 난으로부터 시작한 피바람으로 인하여 어느 누구도 안전을 보장되지 아니하였다. 세자 교육도 체계적으로 받질 못하였다. 그런 안팎으로 자기와는 전혀 다른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왕이 되었다. 다음으로 모순은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반대하고 그 죄로 귀양을 간 황희를 좌참찬으로 기용하여 뒤에 영의정으로 제수한 일이다. 세종이 세자가 되는 것을 극구반대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포용하는 세종은 무슨 마음으로 다시 기용하였을까? 결국 황희는 18년동안 영의정으로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세종의 정치이념을 가장 잘 파악하는 재상으로 세종에게 헌신한다. 모순을 안는 극치는 장인 심온의 죽음이다. 세종이 왕으로 즉위한 초기에는 아직 군사권은 태종에게 있었다. 심온의 동생이 태종의 군사권에 대한 불만을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처가는 숙청의 대상이 된다. 이 세가지 일은 모두 세종이 21세부터 23까지 2년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처럼 모순된 상황에서도 세종은 이를 모두 가슴에 품었고, 극복하였다. 이러한 힘이 바로 모순을 껴안고 이겨내는 힘이 아닌가 한다.

3. 수직적 귄위주의를 타파하다.

코리아니티 경영에서는 코리아니티의 가장 큰 적으로 타파해야할 대상으로 수직적 권위주의를 들었다. 1500년전 일이지만 세종은 바로 이 수직적 권위주의를 타파한 제왕이었다. 가장 큰 사건으로는 관노출신인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인 정5품(지금의 사무관급)에 특별채용을 한 사건이다.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그것도 평민도 아닌 노비출신의 장영실을 그의 재주를 아끼어 벼슬에 제수한다. 대신들의 반대와 상소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에는 화려한 과학기술을 꽃피우게 한다. 세종이 직접 대궐에서 똥지개를 진 사건도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식량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세종은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농서를 제작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가 내려간후 3개월이 지나도 감감무소식하자, 세종은 직접 밭은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작물의 성장과정을 기록하여 고을 수령들에게 보내서 활용토록 하였다. 또한 세종은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통역을 통하지 아니하고 직접 대화를 할 정도였다. 왕으로서 가진 권위를 타파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더 존경받는 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4. 선비정신을 꽃피우다.

코리아니티 경영에서 선비정신을 청빈과 기개라는 한국적 윤리성의 정신적 뿌리이다.라고 표현을 하였다. 세종의 재임시절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재상으로 황희, 맹사성, 유관 등이있었고, 변계량, 성삼문,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자, 그리고 김종서, 최윤덕 등의 무장, 장영실, 박연 등 다방면에 걸친 인재들이 많았다. 세종은 신하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지키고 기개있는 선비들이 마음놓고 일을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었다. 마음에 와닿는 사건으로 성삼문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세종과 대화한 내용이었다. 세종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였다. 세종은 차례로 그들의 집안 내력과 학문의 깊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세 번째 사람은 성삼문이었다. "자기 소개를 해 보거라." 성삼문은 질문이 떨어지자 거침없이 말했다. "전하께서 성덕이 높으시다는 소문을 멀리서나마 듣고 늘 흠모해 왔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앞으로 전하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하는데, 인물의 됨됨이를 보지 않으시고, 그가 어떤 명문가의 자제인지, 또 그의 아비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인지에 대해서만 물으시니 오늘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소생은 지리산 촌 동네의 이름 없는 쇠락한 선비 가문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죽도록 일할 준비가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 대답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바른 말이고 옳은 얘기다.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나를 많이 도와 달라." 그 임금에 그 신하라 할 만큼 멋진 아량과 군신간의 아름다운 모습이 이 사건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5. 우리의 소중한 역사속으로

코리아니티와 세종대왕과의 연결은 실제로 어렵다. 하지만 코리아니티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본다. 이번 대학원 동기들의 연구모임 때 세종에 대한 연구나 서적이 빈약한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해보았다. 가장 큰 이유로 한문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세계를 통 털어서 어떤 나라도 하지 못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커다란 유산을 후세에 남겼다. 참고로 세종실록의 규모는 163권 154책으로 번역본으로 환산하면 400페이지 책 40권 분량이라고 한다. 위대한 유산을 해석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아팠다. 세종대왕에 대한 책을 사기위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을 갔을때 초라한 세종대왕의 책과 서가 한쪽면을 넘쳐 두칸을 쓰고 있는 미국의 대기업 회장에 대한 책을 볼 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영어를 통한 세계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것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역사 속에 숨어있는 한국인만의 DNA를 하나씩 찾고 복구하여 코리아티니가 더욱더 그 가치를 발휘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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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9 17:19:16 *.5.23.40
언젠가부터 피상적이고 단편적이었던 우리 역사속의 인물들이
새로운 감동과 가슴으로부터의 존경심을 일깨우는 진짜(?) 위인들로
다가왔는데 세종대왕이 그런 분이지. 한글에서 세종대왕으로 코리아
니티의 고리가 연결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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