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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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눈과 비를 좋아하지 않게 된 대가로 봉급을 받는 것 같다.’
이것은 기상청 입사동기의 이야기이다. 경북대학교 대기과학과를 졸업하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눈과 비를 일하면서 제대로 보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입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그녀가 한 말이다. 우리 동기들 뿐 만아니라, 선배들도 여러 명이 그러랬다. 입사 전에는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그러나, 막상 직업상 그것을 하게 되니, 감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전에는 편안히 즐기는 던 것이, 많은 일을 몰고 오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평소보다 일이 3배가량 늘어난다. 날씨가 나쁠수록 늘어나는 양이 많아진다.
지방에 있는 기상청 직원들의 근무는 날씨관측과 예보, 전화응대가 대부분인데, 평소에는 방송시간에 맞춰 근무 중에 한번만 전화해서 물어보던 TV방송 3사와 라디오 방송사들은 1시간에 한번씩 전화하기 일쑤고, 인근의 군부대에서도 1시간에 1번씩 꼬박꼬박 전화해서 강수량을 묻는다. 시각별로 해야 하는 일도 처리해 내면서, 평소보다 3배정도 많은 전화에 응대한다. 매시각 기상전문 입력, 상부에 상황을 전화로 보고, 단말기에 악기상 사실 입력하고, 131자동 응답전화 녹음, 팩스로 나온 각종 특보 통보 및 리스트 처리 등이 추가된다. 이럴 때는 서로 바쁜 중에 신경이 날카로와 지기도 해서 작은 실수에도 상부에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날씨 나쁜 것이 꼭 기상청 탓 인양 항의 전화하는 사람들 등살에 녹초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눈과 비가 괴롭히는 것은 아닌데도, 직원들의 의식에선 어느새 눈과 비는 나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일과 연결되고, 그리고, 야단맞았던 기억과 연결되고, 부당한 대우와 연결되어 버린다.
그렇게 감정은 변화하는 것인가 보다.
내 경우는 눈과 비,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는 댓가로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기의 이야기는 같은 일을 해본 사람으로서 공감이 간다.
나 또한 비, 바람, 눈, 천둥, 번개 등을 좋아했다. 특히 비바람 불고, 천둥번개 치면 더욱 좋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좋아한다.
내가 첫 번 일년을 근무한 곳은 비와 바람과 눈이 많은 군산이었다. (이런 요소가 많은 곳임 만큼 일도 많다.) 그곳은 특히, 바람을 빼놓고는 그곳을 얘기할 수가 없다. 군산기상대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제대로 맞을 수 있는 월명(月明)공원 내에 있었다. 군산에 오래 사신 외숙모의 말씀을 빌자면, 그곳은 ‘서방 없이는 살아도 찝게 없이는 못 사는’ 곳이었다. 군산의 월명공원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막힘없이 불어 닥칠 수 있는 곳이었고, 또한, 낮 동안에 가열된 육지와 상대적으로 천천히 데워지는 바다 쪽의 공기를 뒤섞으려는 해풍이 불어드는 곳이기도 하다. 전날 기록해둔 자료를 정리하고 단말기에 입력하기를 12시까지 마쳐야 했는데, 그 때쯤이면 해풍도 시작된다. 차갑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일하느라 달군 머리와 가슴을 식힌다.
군산의 해풍은 내륙보다 2~5도정도 평균기온이 낮게 한다. 하루 중 가장 따뜻해야 할 시점부터 불어오는 해풍으로 인해 그곳은 봄과 가을이 무척 짧은 곳이다.
그곳의 비와 바람은 항상 하늘로부터 뭔가를 청사 앞에 떨어뜨려 놓았다. 비와 바람이란 것이 나쁜 날씨를 대표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내겐 무척 낭만적으로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는 군산기상대는 이렇다. 봄이면 하늘에서 벚꽃이 내리는 곳. 여름이면 벚꽃나무 잎사귀와 잔가지가 내리는 곳. 가을은 붉게 물든 벚꽃나무 잎사귀가 내리는 곳.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이 후려치듯 내리는 곳이다. 밤샘근무를 하고 나서 날이 밝았을 때 이런 것들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밤샘 근무의 좋은 점은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날씨가 나쁜 날은 아니지만. 혼자서 근무하면서 눈과 비를 피하지 않고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 그것도 좋은 셈이다. 눈과 비가 좋은 이유를 수없이 댈 수 도 있을 것 같다. 자연이 살아 있음을, 변화를 실감할 수 있어서 좋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은 뭔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좋다. 하늘에서 쏟아져서 좋고,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린다는 것이 좋다. 공평하고 평화롭다는 것은 눈이 오고 난 뒤에 더욱 그렇다.
기상청 일을 그만두면서, 날씨와 연결시킬 수 있을 만한, 사람들과의 자질구레한 말썽과 '근무가 힘들어질 것 같다'라는 걱정거리 등 나쁜 일들이 사라졌다. 그리곤, 그것과 함께하던 내 감성들도 사라진 듯 하다. 예전만큼 빗소리가 시원하지 않다. 비바람 속에서도 옷을 다 버려가며 관측을 해야 했던 치열함이 사라진 만큼, 비에 대한 감성이 무디어졌다. 좋건 싫건, 눈 속을 달려서 눈 온 양을 재야했던 의무가 사라졌을 때, 눈에 대한 자질구레한 낭만들도 기억으로만 남았다. 곱게 빗어 무스를 말라 잘 정돈해둔 머리가 바닷바람에 뒹엉켜버리는 것을 막아보고자 했던 미묘한 실갱이도 사라졌다. 새벽의 찬공기가 뼈를 수시게 한다고, 야근이 지겨워서 일을 그만두고자 했을 때, 페 속으로 스미는 새벽공기의 싸한 차가움도 거기 두고 온 것 같다.
이것들은 일을 그만 둔 지금에야 그리워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이다. 그땐 밤샘근무의 피곤함과 쓸데없는 권위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는 서운함과 부당한 대우가 뒤엉켜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꼭 다른 것들과 뒤섞여 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들만을 가려 뽑아 본다 해도 그때만큼은 아닐 것 같다. 울게 하고, 웃게 하게, 놀라게 하고, 떨리게 했던, 긴장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 일이 없이 백수이지만, 다시 일을 갖게 되면, 이전처럼 지지고 볶고 하는 많은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 올 것 같다. 물론 다른 종류이겠지만.... 단순작업의 지겨움까지도 함께 다시 달려들겠지. 이번엔 어떻게 맞이해 볼까? 나중에 곱씹으며 사랑할 꺼, 달려들어 안겨올 때 제대로 사랑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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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상청 입사동기의 이야기이다. 경북대학교 대기과학과를 졸업하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눈과 비를 일하면서 제대로 보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입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그녀가 한 말이다. 우리 동기들 뿐 만아니라, 선배들도 여러 명이 그러랬다. 입사 전에는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그러나, 막상 직업상 그것을 하게 되니, 감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전에는 편안히 즐기는 던 것이, 많은 일을 몰고 오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평소보다 일이 3배가량 늘어난다. 날씨가 나쁠수록 늘어나는 양이 많아진다.
지방에 있는 기상청 직원들의 근무는 날씨관측과 예보, 전화응대가 대부분인데, 평소에는 방송시간에 맞춰 근무 중에 한번만 전화해서 물어보던 TV방송 3사와 라디오 방송사들은 1시간에 한번씩 전화하기 일쑤고, 인근의 군부대에서도 1시간에 1번씩 꼬박꼬박 전화해서 강수량을 묻는다. 시각별로 해야 하는 일도 처리해 내면서, 평소보다 3배정도 많은 전화에 응대한다. 매시각 기상전문 입력, 상부에 상황을 전화로 보고, 단말기에 악기상 사실 입력하고, 131자동 응답전화 녹음, 팩스로 나온 각종 특보 통보 및 리스트 처리 등이 추가된다. 이럴 때는 서로 바쁜 중에 신경이 날카로와 지기도 해서 작은 실수에도 상부에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날씨 나쁜 것이 꼭 기상청 탓 인양 항의 전화하는 사람들 등살에 녹초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눈과 비가 괴롭히는 것은 아닌데도, 직원들의 의식에선 어느새 눈과 비는 나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일과 연결되고, 그리고, 야단맞았던 기억과 연결되고, 부당한 대우와 연결되어 버린다.
그렇게 감정은 변화하는 것인가 보다.
내 경우는 눈과 비,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는 댓가로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기의 이야기는 같은 일을 해본 사람으로서 공감이 간다.
나 또한 비, 바람, 눈, 천둥, 번개 등을 좋아했다. 특히 비바람 불고, 천둥번개 치면 더욱 좋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좋아한다.
내가 첫 번 일년을 근무한 곳은 비와 바람과 눈이 많은 군산이었다. (이런 요소가 많은 곳임 만큼 일도 많다.) 그곳은 특히, 바람을 빼놓고는 그곳을 얘기할 수가 없다. 군산기상대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제대로 맞을 수 있는 월명(月明)공원 내에 있었다. 군산에 오래 사신 외숙모의 말씀을 빌자면, 그곳은 ‘서방 없이는 살아도 찝게 없이는 못 사는’ 곳이었다. 군산의 월명공원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막힘없이 불어 닥칠 수 있는 곳이었고, 또한, 낮 동안에 가열된 육지와 상대적으로 천천히 데워지는 바다 쪽의 공기를 뒤섞으려는 해풍이 불어드는 곳이기도 하다. 전날 기록해둔 자료를 정리하고 단말기에 입력하기를 12시까지 마쳐야 했는데, 그 때쯤이면 해풍도 시작된다. 차갑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일하느라 달군 머리와 가슴을 식힌다.
군산의 해풍은 내륙보다 2~5도정도 평균기온이 낮게 한다. 하루 중 가장 따뜻해야 할 시점부터 불어오는 해풍으로 인해 그곳은 봄과 가을이 무척 짧은 곳이다.
그곳의 비와 바람은 항상 하늘로부터 뭔가를 청사 앞에 떨어뜨려 놓았다. 비와 바람이란 것이 나쁜 날씨를 대표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내겐 무척 낭만적으로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는 군산기상대는 이렇다. 봄이면 하늘에서 벚꽃이 내리는 곳. 여름이면 벚꽃나무 잎사귀와 잔가지가 내리는 곳. 가을은 붉게 물든 벚꽃나무 잎사귀가 내리는 곳.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이 후려치듯 내리는 곳이다. 밤샘근무를 하고 나서 날이 밝았을 때 이런 것들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밤샘 근무의 좋은 점은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날씨가 나쁜 날은 아니지만. 혼자서 근무하면서 눈과 비를 피하지 않고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 그것도 좋은 셈이다. 눈과 비가 좋은 이유를 수없이 댈 수 도 있을 것 같다. 자연이 살아 있음을, 변화를 실감할 수 있어서 좋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은 뭔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좋다. 하늘에서 쏟아져서 좋고,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린다는 것이 좋다. 공평하고 평화롭다는 것은 눈이 오고 난 뒤에 더욱 그렇다.
기상청 일을 그만두면서, 날씨와 연결시킬 수 있을 만한, 사람들과의 자질구레한 말썽과 '근무가 힘들어질 것 같다'라는 걱정거리 등 나쁜 일들이 사라졌다. 그리곤, 그것과 함께하던 내 감성들도 사라진 듯 하다. 예전만큼 빗소리가 시원하지 않다. 비바람 속에서도 옷을 다 버려가며 관측을 해야 했던 치열함이 사라진 만큼, 비에 대한 감성이 무디어졌다. 좋건 싫건, 눈 속을 달려서 눈 온 양을 재야했던 의무가 사라졌을 때, 눈에 대한 자질구레한 낭만들도 기억으로만 남았다. 곱게 빗어 무스를 말라 잘 정돈해둔 머리가 바닷바람에 뒹엉켜버리는 것을 막아보고자 했던 미묘한 실갱이도 사라졌다. 새벽의 찬공기가 뼈를 수시게 한다고, 야근이 지겨워서 일을 그만두고자 했을 때, 페 속으로 스미는 새벽공기의 싸한 차가움도 거기 두고 온 것 같다.
이것들은 일을 그만 둔 지금에야 그리워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이다. 그땐 밤샘근무의 피곤함과 쓸데없는 권위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는 서운함과 부당한 대우가 뒤엉켜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꼭 다른 것들과 뒤섞여 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들만을 가려 뽑아 본다 해도 그때만큼은 아닐 것 같다. 울게 하고, 웃게 하게, 놀라게 하고, 떨리게 했던, 긴장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지금 일이 없이 백수이지만, 다시 일을 갖게 되면, 이전처럼 지지고 볶고 하는 많은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 올 것 같다. 물론 다른 종류이겠지만.... 단순작업의 지겨움까지도 함께 다시 달려들겠지. 이번엔 어떻게 맞이해 볼까? 나중에 곱씹으며 사랑할 꺼, 달려들어 안겨올 때 제대로 사랑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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