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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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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08시 00분 등록
연구원 지원을 하는 몇 주 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숙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른 것은 사부님과의 만남에서 들은 몇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첫 번째 과제였던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가 재미없어 ‘토할 것 같았다’는 나의 말에 사부님이 따끔하게 내린 한마디의 충고가 발단이었다.

“옹박, 너는 공산당이 싫으냐? 아니면 인문학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냐?
그 책에서 무언가 느끼지 못했다면 너는 엘리트가 아니거나, 학교가 학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느낌이랄까.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기 보다는 완전히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눈물 찔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책을 제법 읽는 편이었지만 나의 책상 위에 꽂혀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자기계발 혹은 경영 관련의 실용서적들이었다. ‘밑줄 쫙쫙 치고, 아이디어를 얻고, 현업에서 적용해보고, 잘 되는 것은 내 기술로 만든다.’ 이런 류의 책들은 나를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도와주었다. 점점 유능해지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환상적인 책들이었다.

가끔 고전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가슴 두근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철학 책이나 종교 관련 서적들에 자꾸 손이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런 책들은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사부님은 그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날 사부님에게 메일을 썼고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지나오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열려 있다는 것'이 부족한 사회에 살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이 꽃을 피게 한다. 앞으로 많은 책들을 고루고루 보도록 해라. 지식에 금기는 없고, 무용한 지식이야 말로 기막힌 유용성을 지닌다. 인문학은 아마 무용한 학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무용함의 맛이 깊어야 아주 맛있어진다. 네가 귀자를 사랑하는 것은 유용함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더냐?”

나는 왜 그런 ‘효과적인’ 책들을 읽어왔을까? 카네기에 입사한 이래 나는 늘 분주한 사람이었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두세 시간은 더 사무실에 남아있었고, 주말에도 싸늘해진 사무실에 나와 손을 비비고, 차가워진 어깨를 문지르며 일을 했다. 그러다 지쳐 잠시 영화라도 보거나 웹 서핑이라도 하면 죄스러운 느낌이 드는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다. 거창한 사명감 때문에? 돈을 더 벌 수 있고, 더 빠르게 오르고 싶어서? 왜 그랬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러한 실용서들이 성공의 속도를 높인다고 믿었던 것 같다.

카네기에 입사한 것이 어려운 결정이었던 만큼 나는 남들과는 다르게 살 줄 알았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가 아닌,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유 있게 삶을 즐기며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월급의 대부분인 세일즈 인센티브 때문에, 잠시 환상에 젖었던 네트워크 마케팅 때문에, – 아니, 이런 것들은 핑계이다 –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지름길을 찾고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 나의 어려웠던 선택을 대견해하고 있었기에 인정하기 참 싫었다. 며칠을 그 말을 껴안고 가슴앓이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사부님과 꿈벗 형들을 만났다. 이리저리 오가는 대화 속에 ‘성공에 질식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날 나는 말을 별로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성공에 질식해버린 옹박, 실용성에 죽어버린 박승오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크게 휘갈겨쓴 문장으로,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뒤로 가지는 않는다”는 링컨의 말을 붙여놓았던 대학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연구원 과제를 하면서 읽은 첫 번째 책의 저자 에릭 홉스봄은 “나는 세계대전과 냉전 덕분에 (늦게 시작했지만) 중년까지 청년처럼 앞날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책의 저자인 사부님 역시 “빠르게 오르는 것의 약점은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부분의 일찍 성공한 사람들이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로 조안 시울라는 이렇게 말한다.

“일을 빨리 더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주어진 세 개의 공통된 메시지 -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효과성과 실용성이 나를 죽이고 있었다. 나는 빠른 성취에 질식해 진정한 여가를 갖지도, 제대로 생각하지도, 느끼고 창조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속도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중요한 것은 알차고 다양한 삶의 순간들에 충실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빨리 오르려다 결국 좋은 풍광들을 놓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죽도록 일하다가 결국 죽어버리는’ 최고로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가 아닌 충실히 살아야함을, 인간으로서의 삶에 적극 참여해야 함을 아픔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오늘 오후에 귀자와 관악산에 올랐다. 연구원 과제 탓에 제대로 데이트도 못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과, 여가에 대해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행동으로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지난주에 산에 올랐을 땐 미처 보지 못했던 녹색의 풀들과 분홍빛의 진달래들이 여기저기 번져있었다. 솔숲의 싱그러운 냄새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희롱하며 지나갔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자리에서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힘있는 독백이 그리웠다. 다녀와서 책을 뒤졌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것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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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26 07:11:38 *.167.160.37
이재 어른이 된 옹박!
다음에 만나면 아호를 하나더 지어 주어야...
영원히 개그맨 같은 이름으로 살아감이 싫타.
내가 좋아하는 귀자의 애인인데...
잘하면 신랑이 될련지 모르는데 말이다.

작가가 고민하고 괴로와 해야 독자가 행복하다. 산에 오르니 시간의 흐름을 보았을 것이다. 푸른 물결뒤에 붉은 향연이 펼쳐질 때에도 귀자와 같이 같은 장솔가보아라. 녹음이우거 질 때에도, 단풍으로 죽기전에 발악하는 군상의 모습도...
모두 시간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기시작하는구나.
옹박과 귀자를 다시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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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3.26 08:46:38 *.216.120.70
3기에 문장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지원자가 많아서, 읽는 사람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과제 하기만도 벅찼을텐데 친근한 마음에 '속내'를 드러냈다가 예기치않은 신경전까지 겪느라 애썼어요. ^^

기라성같은 선두그룹을 필두로 개성만점의 여성군단, 저마다 한 문장 하는데 이번에 주눅깨나 들었을 여타 지원자들... 정말 3기는 층이 두텁군요.

이처럼 좋은 파트너들을 만나게 된 것을 축하해요. 진중하고 사려깊은 옹박의 글도 결코 빠지지 않았으니, 스스로를 칭찬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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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26 10:18:52 *.218.205.128
초아선생님, 저도 빨리 뵙고 싶어요. 이번에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직접 응원전화도 주시고, 좋은 말씀 정말 감사했습니다.
호 하나 더 지어주신다니(야호) 저는 개인적으로 옹박이 좋지만.. 더 주신다면 (낼름) ㅎㅎ

한명석 선생님, 칭찬은 옹박도 춤추게 한다. 어깨가 으쓱으쓱. ㅎㅎ 정말 연구원 3기 대단했어요. 따라가기도 숨찼지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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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瀞
2007.03.26 12:56:55 *.244.218.10
이 내용이었구나. 좋다.
자극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렇게 풀어 낸 것도.

그리고 효용성과 실용성에 절어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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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7.03.26 13:31:43 *.76.83.129
저는 옹박 글에서 풍겨나는 진정성이 좋아요.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구나, 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죠. 바로 옹박의 글을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사람들은 제 글 속에서 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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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26 18:09:03 *.55.54.44
호정이 누나도 고생 많이 했어요~ 간절했던 만큼 좋은 결과 있겠죠?
얼렁 경마장에서 더블데이트 ㅇㅎㅎ

정재엽님 ㅋㅋㅋㅋ 저도 제 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인데. 원래 그런 사람이 멋진 사람이에요. (우린 너무 완벽해.ㅋㅋ) 정식 연구원 뽑히면 '재엽이형'이 될꺼니 각오하세요. 제가 좀 밥을 많이 먹어요. 별명이 왕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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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0:21:51 *.140.145.63
선생님에게 화두를 받는다는 것은 색다른 종류의 아픔이면서도
살아숨쉬는 진지한 고민을 통해 얻는 의미있는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난 그래서 선생님이 좋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난
이 글이 옹박이 그동안 썼던 그 어떤 글보다 좋다. 나도 옹박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경험들을 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괴로워하고 아파하며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장통이란 이럴때 쓰는게 아닐까..^^

옹박은 사람들을 어울리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널 좋아하게 만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겠지.

널 지켜보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이고..
어쩌면 옹박과 나는 훨씬 더 좋은 인생의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겠다.
고생 많이했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돼보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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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27 09:35:44 *.218.205.128
ㅠ_ㅠ 기찬이형,, 언제 이렇게 감동적인 글을..?
고맙습니다. 형과 초아선생님이 열심히 응원해준 덕에 되었어요.
정.말.로.
영원히 좋은 친구.. 형 그럼 이제 맞먹을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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