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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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급할 때 일이 터진다.
연구원 마지막 과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데 스탠드 전구가 꺼졌다. 아마도 제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한동안 스탠드 없이도 잘 살았는데 요 며칠 연구원 과제 준비한다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살았더니만, 막상 스탠드 불이 없이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란 동물이 이래서 간사하다.
시계를 보니 대략 저녁 9시. 감기 걸린 돌박이 아이와 집사람은 모두 처가로 보내놓고 혼자 과제 한답시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시기도 해서, 이래저래 핑계 삼아 꺼져버린 스탠드용 형광등을 뽑아 들고 집을 나섰다.
첫째로 들른 곳은 우리동네 마트. 그나마 규모가 큰 곳이라 당연히 있겠거니 하고 들른 그곳에는 내가 손에 들고 들어간 18W(와트)가 아닌 27W용만이 놓여 있었다. 18W와 27W는 그 길이부터가 다른데, 27W짜리가 대략 손가락 한마디 정도 더 길다. 그렇다고 마땅히 동네에 갈만한 다른 상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안 맞으면 환불해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확인한 후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맞춰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가 길어서 아예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만 둘까 싶었는데 어째 눈이 침침한 것이 도무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까 환불 다짐도 받아두었겠다, 다시 집을 나선다. 냉큼 가게로 들어가 돈을 다시 받아 챙기고는 가까운 곳부터 수색하기 시작한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벌써 3년이 넘었건만 매번 다니는 길로만 다니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 지 감이 잘 안 온다. 발 닿는 곳으로 걷다가 만난 가게 몇 곳에서는 요즘 18W짜리 형광등은 안 나온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구했던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동네 철물점을 찾아 들어갔다.
"요즘 18W짜리 형광등 안나오나요?"
그냥 안나온다고 했으면 포기하고 집으로 왔을텐데…
"나오긴 나오는데 우리 가게에는 지금 없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럼 좀 더 큰 곳으로 가면 구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우리 집 차는 집사람이 가지고 가버렸고 가장 가까운 롯X마트 까지는 걸어서 대략 15분 거리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터라 잠시 고민을 한다. 그러나 마음이 가면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운동 삼아 다녀오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걷기 시작한다. 아무리 봄이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밤 기온은 쌀쌀했다. 게다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니 사이사이로 칼바람이 들어온다.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는데 갑자기 발목이 시큰거린다. 그래도 형광등을 사야 한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도착한 그곳에서 정말 18W짜리 형광등을 발견했다. 속으로 환호를 올리며 형광등을 집어 드는데 아뿔싸 낱개로는 파는 물건이 없고 2개 1조, 쌍으로만 판단다. 가격은 7,400원.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서 내가 찾아낸 돈은 6,900원 뿐이었다. 눈 앞이 캄캄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꿔볼까?', '매장 직원에게 잘 말해서 외상으로 달라고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 딱 감고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올까?' 평소 같으면 못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까짓 500원쯤 빌리는 건 일도 아닌데, 도무지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까 시리기 시작한 발목은 이제 아예 쿡쿡 쑤신다. 집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형광등 하나 산답시고 한 시간도 넘게 까먹었다는 생각에 영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책을 펴 들고 뒤척거리기를 십여 분. 아까 롯X마트에서 보고 온 형광등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나서면 또 30분 까먹는 건 기본인데,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달리 또 현관문을 나선다.
이번에 집을 나설 때는 정신을 좀 차리고 제대로 신발과 옷을 갖춰서 나왔어야 했는데, '갈까말까'에만 온 정신을 쏟다 보니 또 아까와 똑같은 차림새로 길을 나섰다. 슬리퍼를 신고 오래 걸었더니 엄지발가락 윗부분이 쓸려서 까졌는지 아주 쓰라리다. 발목은 이제 너무 아파서 다리를 절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다. 결국 마트에 도착하고 보니 엄지 발가락에는 피가 맺혔고 발목은 부러진 듯이 아프다. 그래도 2개 1조짜리 형광등 세트를 손에 움켜지니 가슴이 감동으로 벅차 오른다. 그리고는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부리나케 돌아왔다.
그!런!데! 형광등이 맞지를 않는다. 길이는 맞는데 형광등을 꼽는 부분의 소켓이 전혀 다르게 생겨 먹었다. 아이고~ 2시간 넘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디에서 멈췄어야 했을까? 때늦은 후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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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마지막 과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데 스탠드 전구가 꺼졌다. 아마도 제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한동안 스탠드 없이도 잘 살았는데 요 며칠 연구원 과제 준비한다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살았더니만, 막상 스탠드 불이 없이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란 동물이 이래서 간사하다.
시계를 보니 대략 저녁 9시. 감기 걸린 돌박이 아이와 집사람은 모두 처가로 보내놓고 혼자 과제 한답시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시기도 해서, 이래저래 핑계 삼아 꺼져버린 스탠드용 형광등을 뽑아 들고 집을 나섰다.
첫째로 들른 곳은 우리동네 마트. 그나마 규모가 큰 곳이라 당연히 있겠거니 하고 들른 그곳에는 내가 손에 들고 들어간 18W(와트)가 아닌 27W용만이 놓여 있었다. 18W와 27W는 그 길이부터가 다른데, 27W짜리가 대략 손가락 한마디 정도 더 길다. 그렇다고 마땅히 동네에 갈만한 다른 상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안 맞으면 환불해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확인한 후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맞춰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가 길어서 아예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만 둘까 싶었는데 어째 눈이 침침한 것이 도무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까 환불 다짐도 받아두었겠다, 다시 집을 나선다. 냉큼 가게로 들어가 돈을 다시 받아 챙기고는 가까운 곳부터 수색하기 시작한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벌써 3년이 넘었건만 매번 다니는 길로만 다니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 지 감이 잘 안 온다. 발 닿는 곳으로 걷다가 만난 가게 몇 곳에서는 요즘 18W짜리 형광등은 안 나온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구했던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동네 철물점을 찾아 들어갔다.
"요즘 18W짜리 형광등 안나오나요?"
그냥 안나온다고 했으면 포기하고 집으로 왔을텐데…
"나오긴 나오는데 우리 가게에는 지금 없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럼 좀 더 큰 곳으로 가면 구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우리 집 차는 집사람이 가지고 가버렸고 가장 가까운 롯X마트 까지는 걸어서 대략 15분 거리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터라 잠시 고민을 한다. 그러나 마음이 가면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운동 삼아 다녀오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걷기 시작한다. 아무리 봄이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밤 기온은 쌀쌀했다. 게다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니 사이사이로 칼바람이 들어온다.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는데 갑자기 발목이 시큰거린다. 그래도 형광등을 사야 한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도착한 그곳에서 정말 18W짜리 형광등을 발견했다. 속으로 환호를 올리며 형광등을 집어 드는데 아뿔싸 낱개로는 파는 물건이 없고 2개 1조, 쌍으로만 판단다. 가격은 7,400원.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서 내가 찾아낸 돈은 6,900원 뿐이었다. 눈 앞이 캄캄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꿔볼까?', '매장 직원에게 잘 말해서 외상으로 달라고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 딱 감고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올까?' 평소 같으면 못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까짓 500원쯤 빌리는 건 일도 아닌데, 도무지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까 시리기 시작한 발목은 이제 아예 쿡쿡 쑤신다. 집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형광등 하나 산답시고 한 시간도 넘게 까먹었다는 생각에 영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책을 펴 들고 뒤척거리기를 십여 분. 아까 롯X마트에서 보고 온 형광등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나서면 또 30분 까먹는 건 기본인데,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달리 또 현관문을 나선다.
이번에 집을 나설 때는 정신을 좀 차리고 제대로 신발과 옷을 갖춰서 나왔어야 했는데, '갈까말까'에만 온 정신을 쏟다 보니 또 아까와 똑같은 차림새로 길을 나섰다. 슬리퍼를 신고 오래 걸었더니 엄지발가락 윗부분이 쓸려서 까졌는지 아주 쓰라리다. 발목은 이제 너무 아파서 다리를 절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다. 결국 마트에 도착하고 보니 엄지 발가락에는 피가 맺혔고 발목은 부러진 듯이 아프다. 그래도 2개 1조짜리 형광등 세트를 손에 움켜지니 가슴이 감동으로 벅차 오른다. 그리고는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부리나케 돌아왔다.
그!런!데! 형광등이 맞지를 않는다. 길이는 맞는데 형광등을 꼽는 부분의 소켓이 전혀 다르게 생겨 먹었다. 아이고~ 2시간 넘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디에서 멈췄어야 했을까? 때늦은 후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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