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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여러분이

2007년 4월 3일 21시 56분 등록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먼저 바쁘신 와중에 저의 장례식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거 의례히 하는 인사말이라 안 할까 했는데 그래도 제가 워낙 이런 스타일이라 요것만 딱 한 말씀 올립니다. 내가 자기네 새끼들 결혼하고 뭐할 때 부조도 다 내고 그랬는데 안 오면 양심에 좀 찔리지.. 마 그렇다 치고, 본론 들어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다들 잘 들 지내십니까?
이런 물음엔 보통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일반적이겠죠.
여러분, 저 없어져서 슬프십니까? 하하하……
이제 저 혼이 돼서 웬만한 뻥은 다 눈에 착 들어옵니다. 긴장들 하세요!
누가 오셨나? 으음 다들 그래도 저를 사랑하셨던 분들께서 많이 오셨네요.
거기 저쪽 분들 인상 좀 피세요. 어머,눈물까지 뽑아내며 오버하는 저 늙은 영감님들 고정하세요. 그대와는 이 생에서 연이 닿지 않았으니 그렇게 우시려거든 빨리 저를 쫓아오시던가 아니면 눈물 접고 제 장례식에서 소개팅이라도 받으시던가.. 그러시는 게 저에게 도움이 됩니다. 이 쪽에 괜찮은 할매들 많이 앉아있구먼유..

여러분, 드디어 저는 여러분들을 멀리에서 지켜보는 몸이 되었습니다. 몸이 아주 가벼워서 살 것 같아요. 살아 있을 때는 여기저기 아파서 죽을 꺼 같더니만 진짜 죽으니 이거 완전히 새털 같네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장례식장 음식이 다 그렇죠 뭐. 술이나 좀 드시다 가세요.
한 잔만 하라는 거에요 뭐 몇 잔씩 마셔서 몸 축내지들 마시고.
여러분들 나이 생각하셔서 적당히 들 하세요.
너무 서두가 길죠? 제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자 인제 본론 들어갑니다.

혹시 여러분들 박 경리의 표류도란 소설을 아세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 책을 훔쳐본 건데.. 이거 사실 약간 성인용인데 히히 중학교 땐가 그걸 보게 됐어요. 좀 가물가물 한데 제가 기억하기론 분명 주인공 이름이 이 상현이고 여자는 강 현회였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거 그때 무지 재밌게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별 것 도 아닌데 약간 에로틱하고 그래서 좀 그랬죠..그래서 아부지 몰래 살짝 보고 다시 책꼿이에 몰래 꽂았넣었지요.

근데 거기서 참 그럴 듯한 말을 하더라구요.
인생은 표류도다. 사람은 다 떠내려 가는 섬이고 우리는 물줄기가 같아서 같이 떠내려가고 있다고, 그러다 물의 흐름이 바뀌면 서로 다른 데로 가기도 하고 또 어떤 섬은 그 자리에서 가라 앉기도 하고 , 그러다 다른 섬을 보내고 또 그러다 흐름이 같아지면 다시 만나기도 한다구…그러더라구요. 제가 그때가 중학생이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와 닿았어요.
우린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기억하다가 잊혀지다가 또 만난다는 그런 말들이 참 어린 가슴에 남더라구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과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다, 또 만났었고 오늘 다시 제 장례식에서 이렇게 만났습니다. 이제 저 세상에서 또 만나겠지요. 아 참 행복하네요. 그리웠던 여러분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뵙고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고맙고 항상 그랬듯이 저는 참 행복하게 잘 살다 갑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진정한 작별을 고합니다.
여러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혼이 되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그 폼 나는 인사로 마감해야 될 듯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바쁘시겠지만 저도 바쁠 거에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할 테니까요.
제가 보고 싶으시더라도 너무 자주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저도 거기서 놀꺼리도 찾아보고 연애도 하고 그 동안 책 속에서만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봐야 하니까요.
여러분들 오실 때쯤 마중 나가드리겠습니다. 너무 착하게 살다 오신 분들은 어쩜 급이 달라 방이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 줄 아시고 적당히 사시다 오십시오
오늘은 즐거운 이벤트처럼 그렇게들 드시다 가주셨음 좋겠어요.

그럼 깔끔하게 마무리 된 걸루 알고 저는 편히 갑니다.
다들 안녕히들 계십시오.

참 저의 묘비명이랄까 화장터의 비에는 이렇게 써 주십시오.
실은 “내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줄 알았다” 라고 쓰고 싶은데 어떤 아저씨가 벌써 이렇게 쓰셨더라구요, 할 수없이 저는 이렇게 써야 할 것 같아요.

“엔간히 잘 놀았다. 저 세상으로 놀러 가니 그런 줄 알도록”


IP *.48.4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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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훈
2007.04.03 13:03:01 *.126.46.122
"내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는 구절이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아 가슴에 팍 와 닿았습니다.
3기 연구원분들의 장례식 연설을 하나하나 읽으며
저의 장례식 연설도 한번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엔간히 잘 놀았다 하며 훌훌 털고 다음 생을 맞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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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4.03 21:59:23 *.48.44.248
주명훈님, 처음 뵙네요.
답글 감사합니다. 장례식 연설 쓰시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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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
2007.04.28 14:49:55 *.177.93.249
우와~ 넘 좋네요. 침통해 하는 슬픈 장례식장에 모인 모든 조문객들이 깔깔깔 웃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넘 위트와 유머가 풍부히 배어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셨구요. 나중에 만나면 소주한잔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묘비 얘기는 마지막 인사말 두 구절 앞으로 옮겼으면 더 좋지않을까 싶습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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