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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5일 18시 30분 등록
차가 멈추자마자 우린 좁은 길을 건너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 언덕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높지 않은 산자락과 낮은 언덕,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어우러진 아늑하고 평화로운 섬이다.

사부는 부지런히 문패 없는 주막의 차림표만 보고서 주인을 부르려 했지만, 어쩐지 사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문을 닫은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조그만 학고방 같은 가게였다.

그녀의 대문은 약간 헤벌린 채 우리를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었으며 어쩌면 누구든 들어와 불러달라는 몸짓 같았다.

사부는 그 집 대문을 삐끔이 열고 들어가 정중한 어조로 주인을 불렀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섬을 구경하며 드라이브하듯 차를 모는 초아선생님과 좀처럼 한시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사부의 감성이 차를 멈추게 한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다.

다음 날 다시 우리가 확인한 것 이었지만 그 풍광과 그 주막은 너무나도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정의 한 지점이었다. 이 보다 더 좋은 풍광은 없다! 이었다. 그러니까 차를 멈춘 그 지점도 그렇고, 간판도 없는 그녀의 집을 대문간에 소담하게 적어놓은 차림표만 보고서 솔잎막걸리가 있다는 것을 찾아냈으니 말이다. (이쯤에선 항상 다인이 캬~소리를 내며 장단을 맞춰줘야 한다.)

한 눈에 섬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당한 사부께서 언뜻 차창을 스친 솔잎막걸리를 놓치지 않고 30초도 안 되어 차를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차창 왼편의 섬의 진풍경에 반하며 그세 오른 편의 그녀 집을 놓치지 않고 "빠꾸 도!"를 외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이런 추억은 담겨있지 않으리라.

여기서 이 풍광에 어울릴 저 솔잎막걸리의 정체까지도 파헤치려 성급히 그만 그녀의 앞마당까지 침범하여 들어갔으리라. 우린 바로 앞 눈에 펼쳐지는 섬만 보기에도 벅찼고 정신없었다. 하지만 사부는 절대 이 순간의 흥을 돋워줄 결정(체)의 생소한 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서 구하려 애썼다.

한 번은 못 들었을 것이고, 두 번은 못들은 척했을 지도 모르나, 세 번 연거푸 불러대는 이방인의 어딘지 모르게 매혹적인 목소리를 그 아낙도 결코 여성의 감성으로 놓치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면 서방인지 남방인지 모를 방안의 그 사내가 영업을 방해해서는 안 되겠다는 일말의 양보심을 발휘했던 것일까? 이미 흐드러진 모습인지 막 취하려 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얼굴이 게슴치fp 이미 낮술에 흥건히 취해있었건만, 그녀의 매무새로는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단지 한 잔 걸쳤다는 것 밖에는...

마치 인구센서스 조사라도 나온 듯이 주인을 보채어 밖으로 끌어내고야만 사부의 정중한 의도(?)와는 달리, 전혀 예상치도 못한 한 사내의 엉거주춤 정신없이 줄행랑치듯 달아나는 뒷모습을 느닷없이 당하고서야, 사부는 놀라고 당황하여 잠시 뻘춤하였으리라.

보다 적나라한 모습을 그녀의 앞마당 동백나무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아마도 사부는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실지 모르나, 그 사내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토끼듯 뛰쳐나가는 바람에, 당혹감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지 싶다.
그리고는 이크! 하며 당신의 철없음(?)을 이내 탓하면서 못내 미안해 하셨다.

마침내 적잖이 머쓱한 사부께서 한 말씀 건네신다. "아주머니 젊었을 땐 참 예쁘셨겠네요." 이건 또 무슨 신소리인가? 다른 여자 같았으면 "에요, 그라믄 시방은 안 이쁘단 소링교?"하고 대번에 따져 물으며 바로 전투태세로 돌입해 일격을 가할 테지만 그녀는 수줍은 듯 더 말을 잇지 않았다.(사내가 뛰쳐나간 여운을 어쩌면 사부께서도 순간적 근성으로 재빨리 훑어 내리셨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지매가 너무 고와서 그럴 만도 하겠다는 동조와 이미 칭찬이란 걸 적어도 아낙은 알아차렸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랬지 싶다. 으음~ 끄덕끄덕 ㅎㅎ)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낮술에 나른한 사부의 중후한 음성까지, 게다가 챙 모자를 비스듬히 얹어 쓴 서울 나그네의 보일 듯 말듯 한 안면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만 대꾸할 말을 못 찾은 겐지, 그녀는 수줍은 듯 가벼운 미소를 띨 뿐... 언뜻 그녀에게로 눈길이 달려갔지만 그녀가 냉큼 고개를 떨구는 통에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앞이마가 도드라진 오목조목하니 꽤 이쁜 얼굴임에는 틀림없는 듯했다.

그들의 무드와는 별세계의 우리 일행은 빨리 주모를 불러 이 시점에서 이곳 만의 특산품인 솔잎막걸리를 맛보며 섬의 장관을 구경하고픈 정말이지 그 욕심밖에는 없었건만.......

마당을 나선 그녀는 배시시 쪼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그녀는 곧 그녀의 일이자 삶이며 직업인 일상의 취향으로 이내 젖어들었다.

우리는 챙도 없는 그녀의 대문 밖 탁자에 간이의자를 챙겨와 다닥다닥 걸터앉아 섬도 바라보고 주변 경치도 아우르며 둘러보았다. 아니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절로 풍광들이 안구를 통해 스멀스멀 들어와 가슴팍에 안기고 몸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더 없이 아름다운 평화로움과 한가함이, 투정하듯 더디게 떠가는 해거름과 함께 녹아드는 섬의 전경을, 우린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여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즐거움을 시처럼 조용히 읊조릴 수만은 없잖은가. 그녀가 솔잎막걸리를 성급히 주문하는 우리하게 그녀의 비틀거리는 눈과 불카한 뺨을 내보이면서도 당당히 말한 것은 '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수다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를 안주삼아 빗대어 씹어대는 우리들만의 한낮의 입씨름을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도 액면 그대로 만은 아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적어도 이 맑고 푸른 바다 앞에서는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는 원초적 순응일지 모른다.

적당히 애를 달구며 내어오는 즉석에서 빚은 그녀의 솔잎막걸리는, 솔 향이 솔솔 풍겨나게 사량도 주점에서 문패도 없이 빚어내는, 완전한 특허의 향긋하며 수줍은, 그러면서도 곰삭은 욕심 없는 한숨이 곁들여진, 중년의 그녀만이 뽐내며 담글 수 있는 맛이었다고나 할까?

혹시 가더라도 욕심내어 많이 사지 마시라. 솔 향이 빠져나가게 마시지 마시라.
그녀가 미리 다 담가 놓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팔지 않음을 알고들 계시라.
그녀를 우리식으로 해석하여 절대 우기며 마시지 마시라.

그녀는 우리가 문 밖에서 그녀의 솔잎막걸리가 상에 내어져나오길 기다리며, 그새를 못 참아 입방아를 찧어대는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아무 내색 않고 쪼그리고 앉아 채에 찌기미를 걸러내고 있었다.

우리에게 거친 장단을 맞추지도 않았고, 더 팔려고 애쓰지도 않았으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자신만의 속력을 내며 그녀의 일을 담담히 해내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라질, 염병할 놈! 아, 한방구석에 있었다믄야 끝끝내 책임을 지든가 문을 처닫든가 할 노릇이지. 도망을 쳐야, 썩을 놈. 에라이 빙신아!
너 같은 것을 서방인지 남방인지 끼고서는 술상을 봐야하는 겨! 시방. 똥을 쌀놈! 그러나 그런 생각은 페미니즘적 동조의식이 아닌 단지 어리석음 이었다.
왜냐하면, 그대로 지나쳤다면 우리 기억 속에 그녀와 그녀의 일이 빚어낸 그윽한 사량도 솔잎막걸리는 없을 것이기에........

제법 기암절벽의, 험하지만 높거나 거세서 마을을 누른 것이 아닌, 오히려 나즉하게 온 절경을 다 끌어내면서도 섬을 당당히 지키고 선, 소나무와 벗 꽃과 동백 등이 어우러진 뒷자락의 지리망산은 차라리 담담하게 든든한 아버지의 등이다.

좌우로는 섬이 소쿠리처럼 둘러 싸였으나 옹팎하다기 보다는 아늑함이 느껴지고, 어쩌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자유롭고 들어나지 않는 편안함이 스민다.

섬은 우리보다 낮은 시선의 조용한 바닷가의 한가로운 풍경처럼 그렇게 여유롭게 펼쳐졌고 물살은 잔잔했으며, 바람은 살랑거리고 아직 후하게 남은 오후의 늦은 햇살은 따사로왔다.

우리가 서있는 높지 않은 언덕을 폴짝 뛰어내리면, 유채꽃밭이 제법 소담하게 그러나 결코 부족함이 없게 피어있고, 바른 편에서는 두 아낙이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따가운 햇살에 얼굴을 가린 채 취나물을 쭈구리고 앉아 캐고 있었으며, 어슷한 유채꽃밭 좌측으로는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오솔길이 나있고, 길 왼 편은 다랭이 논으로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다.

포항의 어리버리한 사내가 우리와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두 그루의 나무를 보고는 (한 그루는 소나무였고 또 한 그루는 ....)'어! S라인 기막히네' 하며 탄성을 질렀다. 정말 그랬다. 마치 바닷가를 산책하듯, 좌우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담담한 연인만큼의 거리에, 두 그루가 나란히 곁에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에선 아이들이 조개를 주워가며 재잘재잘 두꺼비 집을 짓고 있을 것만 같은 한가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런 섬이다.

경사진 지형이 더욱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욕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머니 품속 같은, 그 섬에 마치 발을 담구고 싶어 구불구불 낮은 길을 따라가노라면, 저녁녘 아늑한 마을과 정박해 있는 고깃배가 물살에 일렁임이 한 눈에 다 펼쳐진다. 이곳이 사랑면 답포리이다.

여기는 이장댁, 저기는 경주이씨집, 아래는 순돌이네, 그 옆에는 옥이네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조밀하나 전혀 비좁지 않은, 별로 상업적 시설이 들어차지 않은 아직 맑고 고운 모습이 그대로 순하게 곳곳에 퍼져있는, 깨끗한 순이 얼굴 같은 섬이다.

우리는 그 집 앞에 그렇게 한동안 머물며 봄 향기에 흠뻑 취하고 화사한 해풍과 조그만 섬을 둘러싼 봄 풍경을 만끽했다.

그녀가 단지 차림표만 다소곳이 대문 기둥에 걸어 놓은 것은 애시 당초 사량도에 정착을 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언제고 사량도를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사내는 서방일까 남방일까? 그녀의 집이고 그녀의 가게이며 그녀의 작업장인 그곳을 걷어치우고 어델 가려는 걸까? 그것으로 뭍에 가서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녀의 솔잎막걸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알까? 그녀의 솜씨와 혼이 담긴 솔잎막걸리는 너무도 향그러운 일품이란 걸........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가 그 집을 팔고 뭍으로 나갈 모양이다.
평수가 얼마나 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 뒤 다 합치면 적어도 50평은 되지 싶다. 안채에 방이 서너 칸 있는 모양이고, 뒷간 쪽 뒤뜰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만일 남도에 가고 싶거들랑, 행여 사량도에 들르시거들랑, 문패 없는 그녀의 집에서 반드시 솔잎막걸리를 자시고 오시라. 그리고 그녀 집 앞에서 한낮의 햇살이 뉘엇뉘엇 해거름을 멈추고 싶어 하거들랑, 당신들도 발걸음을 멈추어 그녀가 즉석에서 빚어내는 솔 향 담뿍한 솔잎막걸리를 한 잔 죽 들이켜시라.


삶은 늘 많은 것을 갖추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적게 갖고도 아직 아름다운 풍광과 좋은 사람들과 살맛나는 세상은 많다. 그래서 여행에 기꺼이 동참한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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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2007.04.04 12:49:47 *.5.57.59
글이 참 재밌습니다.ㅎㅎ그림이 그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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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4.04 15:36:58 *.248.117.3
왠지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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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4.07 00:37:22 *.70.72.121
2007년 3월 30일(금요일) 이었네요. 편히 쉴 수 있는 섬일 것 같았고, 등산도 가능하면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쉬고 싶을 때 가보면 도움이 될 듯 하고요.

계절도 좋았고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모임(3기 연구원 첫 모임이며 1,2,3기 다 어우러진)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아서 적어보았지요.
그 즈음에 알랜 치넨의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30대 이후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16가지 이야기)을 읽고 있던 중이고
그 앞에는 조안 시울라의 일의 발견을 읽은 지라 중년과 그녀의 일(솔잎막걸리)을 생각해 보며 남겨봅니다.

아참, 간간히 사부님에 대한 탐색도 재미있어요.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배우게 되어서요. ㅋㅋ 글에서 처럼 무례하시지 않으심은 다들 알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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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4.10 09:01:16 *.249.167.156
와, 누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네요^^ 어제 얘기를 듣고 써니누나 방 구석에 잠시 들렸다가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감탄하고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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