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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8일 21시 46분 등록
최근 쇠고기 구이를 저녁으로 먹을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제레미 리프킨의 책 <육식의 종말>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한 입 크기로 썰어진 쇠고기 토막들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벌건 근육질 사이로 틈틈이 실모양으로 박혀있는 하얀 지방질이 보였다. 불 위에 올려지자 그 토막들은 점점 오그라들었다. 적갈색의 육즙이 흘러나왔다.

나는 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그 조각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들어갔을 테지만, 그 날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많은 질문들이 흘러갔다. 여기에는 무슨 사연이 담겨있을까? 이 쇠고기의 산지는 어디인지, 이 소는 무엇을 먹으며 사육되었는지, 비만으로 인한 질병은 없었는지, 도축장의 환경은 어땠는지, 어떤 방법으로 운반이 되었는지? 이 안에 있는 호르몬제, 항생제, 살충제, 제초제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러고 나니 선뜻 먹게 되지가 않았다.

대형 마트를 가니, 정육 코너에 환한 불빛 아래 각종 포장육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 있다. 흰 색 스티로폼 포장재와 대비되어 더욱 붉어 보인다. 서로 자기를 고르라고 잘 보이려는 듯한 이 수많은 팩킹들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는 미국산 쇠고기 허벅다리 부분입니다. 어려서는 목초를 먹고 자랐는데, 도살되기 얼마 전부터는 사료가 옥수수로 바뀌더라구요. 금방 살이 더 붙었죠. 하지만 그로 인한 관절염과 혹위 농양으로 고생 좀 했어요. 근데 제가 이랬던 건 쇠고기 등급 판정에 별 영향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난 송아지 때부터 호르몬 정제를 귀에 달고 살았어요. 빨리 자라야 했다는군요. 당연히 여기에는 호르몬 성분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요. 90년대 후반에 푸에르토리코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죠. 생후7개월 된 아기의 젖가슴이 부풀고 3~6세의 여아가 월경을 하는 등 비정상적 조숙 현상을 보이는 어린이가 2천 명 가량 보고되었다고요. 에스트로젠이 투여된 플로리다산 닭고기를 먹었다는 것이 이유로 밝혀졌었죠.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훨씬 미치지 못하죠.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되요.’

‘이 안에는 다이옥신이 1만큼 들어있어요. 용케 검사에서 걸리지 않았죠. 치사량이 100이니 1쯤은 별거 아니지 않겠어요? 난 어때요?’

‘난 트럭에 실려 오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도축장에 들어왔었습니다. 그런데 도살된 후 제대로 씻겨지지도 않고 그대로 컨베이어 벨트로 옮겨지더라고요.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죠. 머리카락 등 각종 이물들이 널려 있는 걸 봤어요. 난 부패 직전의 다른 소의 부위들과 함께 갈은 고기로 이곳에 왔습니다. 어차피 갈린 고기인데 그 전이 어땠는지 무슨 상관이겠어요?’

‘난 라틴 아메리카에서 왔어요. 내가 있던 목초지는 원래 산림지대였다고 합니다. 나와 동족의 먹이감을 위해서 수십 종의 식물, 백 여 종의 곤충, 수십 종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가 몰살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있던 곳이 목초지로 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이젠 거기서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대요. 땅이 너무 척박해졌다네요.’

‘여기 돼지고기 코너를 보세요. 같은 양의 쇠고기와 비교해서, 돼지고기에 드는 사료량은 절반 정도라구요. 빈민국에서 굶어죽는 아이들 좀 더 살리는 셈 치고 날 사는 건 어때요?’

약간의 과장과 장난기를 섞어 몇 자 적어보았다. 여태 별다른 생각 없이 음식 재료를 선택하였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나오는 음식을 그저 주어진 대로 먹었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식재료와 식당의 모든 음식이 다 먹거리로 부적합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시무시한 사연이 담겨있을 수 있다. 나는 <육식의 종말>을 읽고 상품으로 진열된 고기들 이면에 있을 위와 같은 사연들을 충분히 예상하여 볼 수 있었다. 고기가 아닌 농수산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제는 먹거리가 깨끗한 것이냐에 대한 선택보다는, 어느 것이 덜 오염되었는가에 대한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당분간 나는 고기라는 먹거리를 앞에 두고 지구 온난화, 물 부족, 사막화과 같은 문제들이 머리를 스칠 것 같다.

이제 저녁 밥 먹을 시간이다. 무엇을 골라서 먹을까.
IP *.204.8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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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4.08 23:18:21 *.140.145.63
색다른 맛이 느껴지는 글이군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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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7.04.09 00:16:06 *.147.17.183
고생과 고민이 많았구나. 글에서 느껴진다. 글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 많이 고민한 것 같구나. 괜찮다. 전보다 나아졌다.

호정아, 글은 쓰다보면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좋아진다. 사부님 지적이 옳다. 책 읽는 것에 좀 더 공력을 들여라. 저자되기에 고민을 더 쏟아라.

너는 지금보다 아주 많이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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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7.04.09 10:06:31 *.122.138.93
칼럼과 수필사이를 넘나드는 글이라 생각되네요. 하루 3끼 이상을 먹으며 무엇을 먹을까만 고민했지, 이렇듯 원산지며 상태며, 자라온 환경까지 생각해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는 글,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글, 지식의 전달을 넘어 감정까지 동화시켜 주실 수 있는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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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4.09 14:11:41 *.244.218.10
양재우님 반갑습니다..
네, 칼럼은 북 리뷰와는 주제와 방향이 또 다르죠.
이 부분 생각 좀 해보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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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4.09 14:52:41 *.70.72.121
승완 선배에게 너무 짓눌리지 말아요. 이 글 아주 좋으네요.
호정 당신이 그대로 얼굴을 내민듯. 쏘옥~ 하고 돋아난, 움트는 뽀얀 새싹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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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4.10 12:26:27 *.39.179.237
마치 소, 돼지와 대화하듯이 몰입하여 쓴 흔적이 보인다. 원래 호정의 글이 좀 건조했는데 이 글은 술술 잘 읽힌다. 지금의 마음과 자세로 글을 써라.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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