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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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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1일 18시 16분 등록
'이상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잘 몰랐는데 하루 종일 신발 속이 불편하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어딘가 어색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여봐도 그다지 시원하지가 않다. 어찌된 일인지 양말이 자꾸 흘러내리고 뒤꿈치 부분은 발바닥 쪽으로 기어 내려간다. 그러니 신발 속에서 발은 헛돌고 벗겨지기 일쑤다. 하루 종일 신발 속에 정신이 팔려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결국 일은 퇴근 길에 터졌다. 사무실을 나서니 비까지 내려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교차로를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파란 불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어깨엔 노트북 가방을, 왼손엔 우산을 들고 신발이 벗겨질 새라 뒤뚱거리며 겨우 횡단보도에 들어섰는데 고개를 살짝 들어 살피니 어느새 파란 불이 깜박거린다. 곧 신호가 바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더 바쁘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다고 한껏 내민 발이 무엇을 밟았는지 쭉 미끄러진다. 잠시 아찔한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추스르니 차도 한복판의 물웅덩이에 대자로 누워있는 나를 발견한다. 신발 한 짝은 저만치 뒤로 날아갔고 양말은 반쯤 흘러내린 채 발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모든 게 다 빌어먹을 '양말' 때문이다.

맞지 않는 양말을 신고는 빨리도 멀리도 갈 수가 없다. 방법은 꼭 맞는 양말을 찾아 신는 것 뿐이다.

우리 사무실의 이차장은 올해 나이 마흔 셋이다. 하얀 피부가 보기에 좋지만 한쪽으로 몰아 빗은 머리는 그가 세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배가 좀 나왔고 운동엔 영 소질이 없다. 말 수가 적은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말재주가 화려하지도 않다. 대화 중에 흘러간 주제를 꼭 쥐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시간을 되짚어서 하고 싶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그의 스타일은 종종 대화의 맥을 끊는다. 그런 것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직 총각이다.

그는 좋은 엔지니어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였지만 그가 짜는 프로그램의 코드는 정갈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대용량 클러스터드(clustered)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는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튜닝에도 능숙하다. 일전에 우연히 그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디버깅을 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란 적이 있다. 대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디버깅 규칙을 거짓말처럼 차근차근 따져서 코드를 살펴 나가는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꼼꼼하고 정확했다. 그는 참 좋은 엔지니어였다.

그는 더 이상 엔지니어가 아니다. 좋은 엔지니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별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수많은 대한민국 40대 개발자가 그렇듯이 그는 '관리자'로 승진(?) 되었다. 프로그램을 짜고 버그를 잡던 시간 대부분이 고객과 대화하고 팀원들을 다독이는 일들로 채워졌다. 좋은 엔지니어는 좋은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그를 다른 사람보다 더욱 많은 책임 속으로 몰아넣었다.

요즘 이차장은 누가 봐도 불행하다. 고객들은 그의 대응이 느리다고 불평하고 상사들은 그가 직원들을 적절히 윽박지르지 못한다고 소리 지른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직원들은 소신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차장이 못마땅하다. 이차장은 마음을 터놓을 곳이 없다. 그래서 불행하다. 언제부턴가 이차장이 낮 시간에 정신 없이 졸기 시작했다. 회의 중에도 근무 시간 중간중간에도 고개를 젖히고 골아 떨어진 그가 발견된다. 나는 이차장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면 그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끝까지 가도록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에드거 샤인(Edgar H. Schein)은 직장인들이 업무와 경력에 적응해 가는 5가지 다른 방식의 '경력 지향성(career anchor)'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다양한 경력의 길(career path)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한국 IBM의 경우 핵심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관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인정을 받은 기술 인력들이 전문가 경력을 따라 승진하여 최고가 되면 관리의 책임을 지지 않는 중역의 대우를 받도록 하는 전문가 제도를 통해 '직위승진'과 '자격승진'을 분리하고 엔지니어로 존경 받을 수 있는 근본적인 길을 마련했다. 백발의 50대가 된 이차장이 돋보기를 쓰고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와 씨름하는 장면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진다.

기회와 몰락의 변곡점에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이차장'들이 있다. 그들이 자신의 강점을 살리고 직장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면 결국 기업의 생명력 또한 심각하게 위협받게 될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깜짝 놀란다. 물구덩이 속에서 헤엄을 쳤으니 꼴이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줄줄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서는데 집사람이 한마디 한다.

"어머! 당신 오늘 내 양말 신고 갔었네?"

아이고! 결국 양말이 문제였다.
IP *.254.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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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9 16:52:53 *.5.23.40
신종윤님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게 틀림없는데 슬며시 웃음이
나는건 어쩔 수가 없네요.. 한편으로는 이차장님같은 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군요.

1기 연구원 오병곤님의 첫 책을 신종윤님이 선물하신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한권의 책이 백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을
안겨줄 수 있으니까요.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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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7.03.21 15:51:51 *.183.177.20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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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07.03.21 21:10:59 *.187.226.215
글을 참 맛깔스럽게 쓰셨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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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22 09:04:36 *.227.22.4
to 이기찬님 : 이차장'님'은 저보다 선배이십니다. 저랑은 파트가 달라서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니 안타깝네요. 책을 건네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제 의도와는 달리 받아 들이실까봐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흠~ 그래도 해주신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보니, 그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에서 조금 깨어나게 되네요. 방법을 조금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봐야겠습니다.

to 경빈조교님 :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제 한몸 바쳐 한 분이라도 웃으실 수 있다면 슬랩스틱 코미디에 빠져볼까 싶기도 하다는... ㅎㅎ^^

to 김지혜님 : 좋은 글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잘 읽어주셨다니 많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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