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仁 이은남
- 조회 수 2261
- 댓글 수 16
- 추천 수 0
최근 두 달 정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전혀 다른 날들을 보내고 있다. 평소 같으면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을 책들을 정독한 것과 100페이지 이상의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더불어 조용하던 일상에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인간관계의 즐거움과 낯가림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책과 메모장을 들고 다니고 거리에서도 사물에 대하는 관찰의 각도가 예민하게 바뀌었다. 사고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나 반대로 지정된 기일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부담이 명석하지 못한 머리의 한계로 인해 자괴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한 이틀을 밤을 새워야 겨우 제출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왕이면 평소 안 써보던 글을 써봐야지 하면서도 출장을 앞두고 마음이 바쁘니 분석적인 글이 써지지가 않는다. 자판 앞에서 머뭇거리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그 때 그 마음을 떠 올려 보기로 했다.
30대가 끝나갈 무렵”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좀 궁상맞지만 구성진 그 가락이 주는 아련한 느낌에서 사는 게 참 쓸쓸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혼자만의 삶이니 그렇기도 했겠지만 또래의 사람들 모습에서도 역시 동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결혼유무와는 별개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고나 할까.
그 후 그 느낌은 집요하게 내 주위를 맴돌다 이따금씩 흥청거림에서 돌아 온 밤이면 살며시 내 방을 노크하며 메피스토텔레스처럼 거래를 제안해 왔었다. 흥정은 늘 녀석이 능숙했고 이윽고 내 손에 찰나의 웃음이 쥐어졌다가는 이내 굴욕이나 분노로 바뀌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내가 그에게 완전히 영혼을 팔지 않았던 이유는 녀석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십 대란 나이의 연륜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삶이나 정서적 부분에서 약간은 안정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발현되지 못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미처 통제되지 못한 잠깐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삶을 무차별적으로 흔들어 놓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실 슬픈 나이이기도 하다. 우연히 내가 발견한 것은 그런 순간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사실 글이라고 해봐야 감성적인 글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끄적거림이 주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웹에 처음 올리고 누군가가 위로가 되었다는 답 글을 해 주었을 때는 또 다른 공감의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글이라는 것은 연습을 해 본 일도 없고 더군다나 책도 현실에 필요한 것만 골라 읽다 보니 도무지 영혼을 울리는 글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으며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부끄러워져만 갔다. 어디 글뿐인가, 아는 지식이라곤 겨우 텔레비전의 뉴스나 유행어 정도이니 마음은 한번 써 보고 싶다로 달려가는데 자판 앞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무기력감에 젖어 들곤 했다.
현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 속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 개인의 역사 속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탑승 전에는 심장이 두근거려 죽을 것만 같고 당장이라도 뛰어 내리고만 싶다. 철컥철컥하며 각도가 꺾이는 지점까지 가는 동안 심장 박동이 요란하다. 그러나 이윽고 한 바퀴 타고 내려오면 두려움대신 해냈다는 환희가 저 깊은 곳에서 손쓸 틈도 없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우리의 인생 중에 앞서가는 사람들의 위치는 대부분 그러한 두려움이 선행 된 결과일 것이다.
어두운 터널 앞에서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앞에서 서성이던가 아니면 그냥 주저 앉던 가를 결정해야만 했었다. 그 때 내게 터널을 걸어가게끔 용기를 주었던 말은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 첫 번째 만나는 적은 공포다”란 문구였다.
칠흑 같은 터널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누군가가 잡아주는 손이 있음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기대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수 많은 터널이 앞에 포진해 있다. 한 번 그곳을 통과했던 사람들은 두려움보다는 밝아오던 터널 끝의 감동이 각인되어 있다. 올해가 시작되는 며칠 동안 생각주간을 가지면서 그 동안 너무 많이 받고 살았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터널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을 떠 올렸다. 내 손을 잡아주고 평지로 안내해 주던 보이지 않는 손도 기억해 냈다. 격려해주고 안아주던 품의 느낌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동시에 무력감이 사라져 가면서 그 자리에 조그마한 바램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글을 써서 행복해졌다면 열심히 써보자. 그대신 제대로 쓰자. 그리고 좋은 글을 써서 다른 사람과 공유하자. 혹시 내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면 이제라도 끄집어내어 갈고 닦아보자. 내가 쓰는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나 이외에 또 한 명을 구원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두 달 전 다시 새로운 터널 앞에서 버릇처럼 망설이다 발을 내디뎠다. 역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혼자가 아니다. 어둠을 두려워 말자고 마음 먹는다.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분명 터널의 끝에서 밝아오는 햇볕과 마주치게 된다고 계속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서툰 글이지만 혹시 나와 같은 이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그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으로 귀한 지면을 빌린다.
-------------------
엘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언급한 10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는 회사에 25마일의 관료들과 열흘이나 함께 간다. 늘 짐 싸고 떠나는 인생이었는지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자료준비에서 고양이 정서 걱정까지 발목을 잡는 게 많다. 혼자 사는 삶이라도 기르는 짐승이 있으니 옛날처럼 몸만 간단히 떠나게 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에서 기르던 난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는 느낌이 절절한 요 며칠이다.
(사족)
변. 경. 의 몇몇 미래예측 연구원이 3기 멤버 중 제일 먼저 그만둘 사람 리스트에서 일 순위로 글쓴이를 올려 놓았다고 한다. 아주 즐거운 분석 결과라며 그녀의 인생 중 이토록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없었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몹시 상쾌해진다는 말에서 어쩌면 그녀는 마조히스트 성향이 농후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과연 그들의 예측이 적중할 것인가?
변. 경. 에서 배출된 1.2기 연구원들의 역량을 시험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IP *.48.44.248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책과 메모장을 들고 다니고 거리에서도 사물에 대하는 관찰의 각도가 예민하게 바뀌었다. 사고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나 반대로 지정된 기일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부담이 명석하지 못한 머리의 한계로 인해 자괴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한 이틀을 밤을 새워야 겨우 제출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왕이면 평소 안 써보던 글을 써봐야지 하면서도 출장을 앞두고 마음이 바쁘니 분석적인 글이 써지지가 않는다. 자판 앞에서 머뭇거리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그 때 그 마음을 떠 올려 보기로 했다.
30대가 끝나갈 무렵”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좀 궁상맞지만 구성진 그 가락이 주는 아련한 느낌에서 사는 게 참 쓸쓸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혼자만의 삶이니 그렇기도 했겠지만 또래의 사람들 모습에서도 역시 동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결혼유무와는 별개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고나 할까.
그 후 그 느낌은 집요하게 내 주위를 맴돌다 이따금씩 흥청거림에서 돌아 온 밤이면 살며시 내 방을 노크하며 메피스토텔레스처럼 거래를 제안해 왔었다. 흥정은 늘 녀석이 능숙했고 이윽고 내 손에 찰나의 웃음이 쥐어졌다가는 이내 굴욕이나 분노로 바뀌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내가 그에게 완전히 영혼을 팔지 않았던 이유는 녀석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십 대란 나이의 연륜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삶이나 정서적 부분에서 약간은 안정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발현되지 못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미처 통제되지 못한 잠깐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삶을 무차별적으로 흔들어 놓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실 슬픈 나이이기도 하다. 우연히 내가 발견한 것은 그런 순간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사실 글이라고 해봐야 감성적인 글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끄적거림이 주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웹에 처음 올리고 누군가가 위로가 되었다는 답 글을 해 주었을 때는 또 다른 공감의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글이라는 것은 연습을 해 본 일도 없고 더군다나 책도 현실에 필요한 것만 골라 읽다 보니 도무지 영혼을 울리는 글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으며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부끄러워져만 갔다. 어디 글뿐인가, 아는 지식이라곤 겨우 텔레비전의 뉴스나 유행어 정도이니 마음은 한번 써 보고 싶다로 달려가는데 자판 앞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무기력감에 젖어 들곤 했다.
현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 속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 개인의 역사 속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탑승 전에는 심장이 두근거려 죽을 것만 같고 당장이라도 뛰어 내리고만 싶다. 철컥철컥하며 각도가 꺾이는 지점까지 가는 동안 심장 박동이 요란하다. 그러나 이윽고 한 바퀴 타고 내려오면 두려움대신 해냈다는 환희가 저 깊은 곳에서 손쓸 틈도 없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우리의 인생 중에 앞서가는 사람들의 위치는 대부분 그러한 두려움이 선행 된 결과일 것이다.
어두운 터널 앞에서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앞에서 서성이던가 아니면 그냥 주저 앉던 가를 결정해야만 했었다. 그 때 내게 터널을 걸어가게끔 용기를 주었던 말은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 첫 번째 만나는 적은 공포다”란 문구였다.
칠흑 같은 터널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누군가가 잡아주는 손이 있음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기대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수 많은 터널이 앞에 포진해 있다. 한 번 그곳을 통과했던 사람들은 두려움보다는 밝아오던 터널 끝의 감동이 각인되어 있다. 올해가 시작되는 며칠 동안 생각주간을 가지면서 그 동안 너무 많이 받고 살았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터널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을 떠 올렸다. 내 손을 잡아주고 평지로 안내해 주던 보이지 않는 손도 기억해 냈다. 격려해주고 안아주던 품의 느낌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동시에 무력감이 사라져 가면서 그 자리에 조그마한 바램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글을 써서 행복해졌다면 열심히 써보자. 그대신 제대로 쓰자. 그리고 좋은 글을 써서 다른 사람과 공유하자. 혹시 내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면 이제라도 끄집어내어 갈고 닦아보자. 내가 쓰는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나 이외에 또 한 명을 구원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두 달 전 다시 새로운 터널 앞에서 버릇처럼 망설이다 발을 내디뎠다. 역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혼자가 아니다. 어둠을 두려워 말자고 마음 먹는다.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분명 터널의 끝에서 밝아오는 햇볕과 마주치게 된다고 계속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서툰 글이지만 혹시 나와 같은 이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그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으로 귀한 지면을 빌린다.
-------------------
엘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언급한 10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는 회사에 25마일의 관료들과 열흘이나 함께 간다. 늘 짐 싸고 떠나는 인생이었는지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자료준비에서 고양이 정서 걱정까지 발목을 잡는 게 많다. 혼자 사는 삶이라도 기르는 짐승이 있으니 옛날처럼 몸만 간단히 떠나게 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에서 기르던 난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는 느낌이 절절한 요 며칠이다.
(사족)
변. 경. 의 몇몇 미래예측 연구원이 3기 멤버 중 제일 먼저 그만둘 사람 리스트에서 일 순위로 글쓴이를 올려 놓았다고 한다. 아주 즐거운 분석 결과라며 그녀의 인생 중 이토록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없었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몹시 상쾌해진다는 말에서 어쩌면 그녀는 마조히스트 성향이 농후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과연 그들의 예측이 적중할 것인가?
변. 경. 에서 배출된 1.2기 연구원들의 역량을 시험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댓글
16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초아
오십의 중반을 넘어서 철이 들었는지 그때야 자신을 표출해보려고 몸부림치며 홀로 홀로 컴의 좌판을 두둘기던 시절이 향인의 글을 읽으며, 지난날이 생각이 남니다. 주변에서 아무도 응원해주는 사람없이 오히려 져깐놈이 뭘한다고, 쓸데없는 시간낭비, 하는 질시 속에서 미친듯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홀로 몸부림치던 그 때가 향인의 글을 읽으며 생각 나는 건, 그대의 글의 향기가 그리 했는 모양입니다.
처음 향인의 글을 읽은 건 "통영후기" 였을 겁니다. 많이 쓴 글은 아니 였어도 그 속에서 독자를 끄는 힘을 느꼈고, 타고 난 글쟁이의 소질이 묻혀 있었습니다. 이재 진정 작가의 길로 들어 왔습니다. 겨우 몇달 되질 아니 했는데 그때의(통영후기의 글, 다시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글과는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문장을 이끄는 노련함이 보이고 전에는 성격이 급한지 좌판을 때리는 급한 소꾸락놀림이 보였는데, 이재 구성진 노랫가락과 함께 써가는 모습이 보임니다.
인생은 잠깐입니다. 멋있게 꾸미며 살아가는 향인의 생이 향기로와 보입니다. 이재 정말 자신의 진 면목을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드라이브하는 손 끝이 보입니다. 육십을 넘어 힛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후회없는 생을 산 한 여인 삶이 보임니다.
"嘉遯 貞吉"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그모습이 길하지 않으리요.>
항상 그대의 글의 변화를 즐기는 촌놈이 좋은 글 읽고 나감니다.
-부디 행복 하십시시요, 영원히 늙지 말고 삽시다.-
처음 향인의 글을 읽은 건 "통영후기" 였을 겁니다. 많이 쓴 글은 아니 였어도 그 속에서 독자를 끄는 힘을 느꼈고, 타고 난 글쟁이의 소질이 묻혀 있었습니다. 이재 진정 작가의 길로 들어 왔습니다. 겨우 몇달 되질 아니 했는데 그때의(통영후기의 글, 다시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글과는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문장을 이끄는 노련함이 보이고 전에는 성격이 급한지 좌판을 때리는 급한 소꾸락놀림이 보였는데, 이재 구성진 노랫가락과 함께 써가는 모습이 보임니다.
인생은 잠깐입니다. 멋있게 꾸미며 살아가는 향인의 생이 향기로와 보입니다. 이재 정말 자신의 진 면목을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드라이브하는 손 끝이 보입니다. 육십을 넘어 힛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후회없는 생을 산 한 여인 삶이 보임니다.
"嘉遯 貞吉"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그모습이 길하지 않으리요.>
항상 그대의 글의 변화를 즐기는 촌놈이 좋은 글 읽고 나감니다.
-부디 행복 하십시시요, 영원히 늙지 말고 삽시다.-

써니
난 알아요, 그대가 보따리를 풀면 한 없이 줄줄 터질 거라는 걸.
여태 동안 살면서 3~4권 쓸만한 이야기가 없다면 인생 너무 싱거운 것 아니유? 그게 잘 한 일이건 잘못한 일이건 좋은 일이건 미숙했건 간에.
그래서 또 배우고 익히고 실행하고 싶은 것 아닌가요? 난 아직도 몹시 떨리지만 잘 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 길에 들어선 것. 내가 흔들리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워 나가길 바라셨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자기 뜨거운 정열 스멀스멀 모락모락 피어남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게다가 선배들에게 도전하는 카리스마 역시... 개 봉 박 두 짜자잔~
여태 동안 살면서 3~4권 쓸만한 이야기가 없다면 인생 너무 싱거운 것 아니유? 그게 잘 한 일이건 잘못한 일이건 좋은 일이건 미숙했건 간에.
그래서 또 배우고 익히고 실행하고 싶은 것 아닌가요? 난 아직도 몹시 떨리지만 잘 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 길에 들어선 것. 내가 흔들리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워 나가길 바라셨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자기 뜨거운 정열 스멀스멀 모락모락 피어남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게다가 선배들에게 도전하는 카리스마 역시... 개 봉 박 두 짜자잔~

한희주
저는 믿어요, 휠 망정 꺾이지 않는 유연함의 힘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쓴 글,
확실한 컨텐츠만 담겨져 있으면 독자들은 호응으로 화답합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아카데미즘'의 글쓰기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만 읽히는 건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요.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전문성과 효율적인 전달방법을 함께 아우르는 향인님의 글을 읽는 마음은 그래서 늘 즐겁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논리 너머에 있는 것 아닐는지요.
행복숲에 보내신 후의도 훈훈합니다.
25마일의 관료분들과 함께하시는 여행이지만, 100마일 이상의 즐거움 홀로 누리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쓴 글,
확실한 컨텐츠만 담겨져 있으면 독자들은 호응으로 화답합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아카데미즘'의 글쓰기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만 읽히는 건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요.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전문성과 효율적인 전달방법을 함께 아우르는 향인님의 글을 읽는 마음은 그래서 늘 즐겁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논리 너머에 있는 것 아닐는지요.
행복숲에 보내신 후의도 훈훈합니다.
25마일의 관료분들과 함께하시는 여행이지만, 100마일 이상의 즐거움 홀로 누리시길 바랍니다.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529 | 전세계 인구 65억명 모두 1인기업가 [6] | 海瀞오윤 | 2007.04.09 | 2109 |
2528 | 소야, 소야 [13] | 素賢소라 | 2007.04.09 | 2146 |
2527 | 나를 찾아가는 길 [5] | 賢雲 이희석 | 2007.04.09 | 2085 |
2526 | '1984' 그리고 유비쿼터스 [6] | 香山 신종윤 | 2007.04.09 | 2187 |
2525 | ' 범찬아 힘든일 있으면.. ' [4] | 에레혼 | 2007.04.09 | 2126 |
2524 | 부산의 신발공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5] | 素田최영훈 | 2007.04.09 | 3542 |
2523 | 두 눈을 부릅뜨고 ... [4] | 백산 | 2007.04.10 | 2043 |
2522 | -->[re]봄날에 좋은사진 [4] | 기원 | 2007.04.10 | 2537 |
2521 | 조선 선비의 상징-소쇄원 [5] | 도명수 | 2007.04.11 | 2285 |
2520 | 이차장 그리고 양말 이야기 [4] | 신종윤 | 2007.04.11 | 2238 |
2519 | 일상 속 액센트 둘 ^^ [8] | 오윤 | 2007.04.11 | 2211 |
2518 | [칼럼06] 한계를 넘어서 [16] | 余海 송창용 | 2007.04.12 | 2099 |
2517 | 좋은 커뮤니티의 요건 [11] | 한명석 | 2007.04.12 | 2604 |
2516 | '위대한 저자'의 멋진 우정에 경의를 [5] | 지나가다 | 2007.04.12 | 2171 |
2515 | 햇살 [6] | 홍승완 | 2007.04.12 | 2110 |
2514 | [6] 21세기형 지식 대통령은 누구? [11] | 써니 | 2007.04.13 | 2039 |
2513 | 첫번째 시도 [4] | 한정화 | 2007.04.13 | 2284 |
2512 | 오래 전에 받은 메일 하나 [2] | 신재동 | 2007.04.13 | 2184 |
2511 | 충격! 게시판 조회수 분석 1 [6] | 香山 신종윤 | 2007.04.13 | 2696 |
» | 마흔일곱, 그 여자의 미래 [16] | 香仁 이은남 | 2007.04.14 | 22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