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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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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7일 02시 52분 등록
“엄마 어디갔니?”
골목에서 홀로 놀고 있는 남자 아이,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리 엄마요? 성폭력 하러 갔는데요.”
“성폭력?”
가슴이 콩알 만 해진 동네 아주머니들, 쑥덕거리는 통에 지나가던 경찰이 다가온다.
“무슨 일 입니까?”
“글쎄, 이 아이 엄마 되는 사람이 왜 그거.. 성...음.. 그.. 폭...”
입을 삐죽거리며 제대로 말을 못하는 아줌마.
“성폭력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 다시 한번 또릿하게 이야기한다.

1991년 상담소. 전화한통에 소장님이 뛰쳐나가신다. 동료 활동가들은 영문을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상담소에 돌아온 소장님 왈. “세상에, 내 아들이 날 신고 했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사무실이 떠나가게 웃어댄다. 저 사람이 단단히 무슨 일이 있나 싶다. 활동가들도 멍하니 넋이 나가, 어이없어 따라 웃었다.

처음 성폭력상담소가 황무지에 들어섰을 때의 풍경이다. 소장님의 발직한 아들은 동네사람들에게 엄마가 성폭력 하러 갔다고 선전하고 다닌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오해 받은 것만 해도 책 한권은 쓸 수 있다고 자부하는 소장님. 16년 전 그때는 그랬다. 성폭력의 ‘성’자도 꺼내지 못했던 세상, 차마 내 입에 올릴 수 없었던 단어, ‘성폭력’이다. 은행직원이 낯 뜨거워 우리의 단체 명을 부를 수 없었던 시절. 활동가들이 친구에게 내민 명함에 연락을 피하는 친구. 성폭력 피해로 전화를 해도 ‘$%#@ 상담소죠?’ 라고 조심스럽게 물어야 했던 시절.

16년간의 반성폭력운동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반성폭력운동의 전략적 변화는 세계가 서로 다른, 그리고 충돌 가능성을 지닌 3개의 물결로 분할되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뒤늦게 찾아온다. 1991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일련의 성폭력 사건 -21년 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과 13년간 의붓딸을 강간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성폭력에 대한 대중의 큰 관심과 여론의 호응을 얻는다. 동시에 터진 두 사건의 충돌은, 상상을 초월하는 역동적인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폭력상담소를 만들어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 1물결의 반성폭력운동은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모멸의 경험에 ‘성폭력’ 이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이름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침묵의 주체에서 말하는 주체로 재탄생 된다.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는 성적 보수주의자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1993년 12월에 국회를 통과한 ‘성폭력특별법’은 성폭력을 권리 침해의 문제가 아닌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부녀자’로 한계 지었다. 여전히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며, 여성의 자궁과 몸은 그녀가 지키고 보관해야 하는 남성가부장의 소유물 이다. 정조는 그 소유권을 봉인하는 인장이었다. 결국 제 1물결 운동은 불가피하게 여성 개인의 ‘순결’로 상징된다.

1993년 발생한 서울대-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5년에 걸친 재판과정은, ‘피해자 관점’이라는 새로운 제 2물결을 만들어 냈다. 제 2물결 활동가들이 제 1물결 전통세력을 뒤로하고 진보를 이루어 낸다. 성폭력의 개념을 정조가 아닌, 관계 안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성폭력 경험이 피해자에게 어떤 고통과 후유증, 상처를 안기는가를 통해, 인권의 가치를 옹호한다. 잠들어 있던 여성 피해자들이 모두 수면위로 드러난다. 피해자의 대량화 시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정된 피해자 상을 만들어 내는 함정이 존재했다. 사회적 구조아래,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하는 표준화된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이 과정 안에서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은 삭제, 탈락, 배제 된다. 더불어 성폭력의 범위가 끔찍한 고통이 수반되는 ‘표준화’된 성폭력 경험으로 극히 제한되는 현상을 마주한다.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우리는 더 이상 여성의 고통과 외침, 분노만으로 성폭력을 설명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같은 성폭력 경험도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다른 강도로 피해를 느낀다.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 이후 과정은 피해 여성의 사회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상태, 비혼 여부, 지역 등등의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 진다. 어떤 여성은 포르노를 보고 성욕을 느끼지만, 어떤 여성은 불쾌 할 수 있다. 이때 남성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는 여성도 있는데, 지나치게 민감한 거 아니냐?”. 제3의 물결 운동은 이러한 피해자집단을 해체한다. 여성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 느낀 피해의 의미로 구성된다. 개인 한명 한명의 다양한 경험이 살아난다. 이렇게 제 3물결 운동은 대량사회에서 표준화된 피해자 상이 탈 대량화 된다. 피해자들의 범위는 더욱더 작은 조각들도 쪼개진다. 또한 데이트, 스토킹, 아내강간, 준강간 등 성폭력의 범위도 끊임없이 세분화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성폭력운동을 위하여 성폭력을 세분화 할수록, 성폭력은 증가한다. 반성폭력운동이 성폭력인 셈이다.

이 구도 안에서, 이제는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성폭력과 급진하는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성폭력이 어떤 구조에서 발생하는 행위인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삼분화된 세계의 충돌 가능성을 감지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반성폭력 운동은 대부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이미 제 3물결 문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에서 성폭력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반성폭력 운동은 과거에나 적합한 방법들을 유지하고 있다. 긴급한 사건 지원 및 대응, 법과 제도를 통한 사후개입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예방 활동들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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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나의 아이에게 “엄마 어디갔니?”라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나의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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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4.16 08:01:48 *.114.56.245
미래지향적 예방할동이라--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저도 작년 한해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는 아이들의 성폭행(추행)때문에 꽤나 마음 조렸는데 올해는 님의 도움을 많이 받겠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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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4.16 09:47:05 *.99.241.60
사람에 대한 가장 심한 증오와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동 성폭력의 가해자인 것 같습니다.
또 복잡한 세상으로 변해가면서
고립되고 소외되어 폭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데,
좋은 방법을 찾으시어 좋은 세상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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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4.16 09:54:24 *.221.217.117
오프라 윈프리가 아홉 살 때부터 사촌오빠나 엄마의 남자친구 등 서너명에게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친척이 없다는 생각에 문제화시키지도 않았다지요.

자신의 새 남편이 딸을 추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김보은의 어머니 앞에서, 여자의 무력함에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던 기억이 있지요.

동물적인 영역과 신성함의 경계를 오간다는 성의 이면에 방치되어 있는 성폭력 - 그 어려운 분야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소라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현장활동가답게 잘 정리된 글, 잘 읽었어요. 지면의 한계가 있었겠지만, 제3물결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부분이 조금 추상적이고 서운한 감이 있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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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4.16 10:36:39 *.70.72.121
소라야 ! 역시 또 잘 이끌어 냈네. 나는 밤새 헤매기만 했다. ㅠㅠ
글이 많이 힘차다. 점점 더 표현을 잘하고 이번엔 현실적이고 잘 접목 시켰다는 느낌이드네. 이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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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2007.04.16 13:01:02 *.103.132.133
사실, 현장활동을 하면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일상업무에 묻혀,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보는 경우가 많지요.
연구원 하면서,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싶은데..

이번 글 쓰면서 정말 그동안 많으걸 놓치고 왔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글이 많이 부족하고 구체적이지 못할꺼에요.
이글을 올려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구요.
모두 격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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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4.16 15:04:02 *.99.120.184
한국의 정서상 어렵고 힘든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 속에서 느껴지는 힘으로 봐서는 잘 헤쳐나가리라 믿습니다.

의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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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4.17 08:35:44 *.218.205.128
누나, 오늘도 성폭력하러 갔어? ㅋㅋㅋ 그 아이 참 귀엽다.

성폭력과 3물결이라..
영덕이형 말고, 태형이 형이라는 또 다른 x룸메이트가 있어.
다섯살박이 아들이 있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아이가 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는 그거 뭐니? 하고 손을 펼쳐봤대.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과 전화번호들이 적힌 카드였지. 아빠 차 위에 덕지덕지 끼워져있던것들이었어. 할아버지가 뺐으니까 "내 딱지 내놔~~ 앙~~ ㅠ_ㅠ" 하고 목놓아 울더란다.
숨겨지고 은폐되어 더 신비스럽게 느껴지고 그래서 왜곡된 시각을 주었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늘 성인물속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은 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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