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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8일 17시 18분 등록
사월의 문턱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 우리 일행은 남해여행의 첫 번째 경유지로 촉석루(矗石樓)로 유명한 진주성(晋州城)을 찾았다.

서울에서 예까지 오기가 가히 쉽지는 않으니 이런 기회에 의(義)가 서린 고장 진주에 들러 성(城)과 누각(樓閣)을 둘러 보고감도 꿈 벗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가이드를 맡으신 초아선생님의 안내에 따라서였다.

촉석문(矗石門)을 삐죽이 낯선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들어서노라니 돌바닥 사이를 가로지른 나지막한 꽃들이 쑥스러워하는 나그네들의 표정을 화알짝 미소를 띤 얼굴로 친숙히 반긴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며 영남 제일의 명승지(名勝地)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전시에는 병사를 지휘하던 곳이며,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 이었다. 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한가로운 낭만이 흐르기도 하지만 전장 시에는 치열하게 격전지가 되었던 양면의 이중적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주는 조선 초기 사림의 세력이 왕성한 곳이기도 하였다. 의기 논개의 출현도 이 고장의 이러한 역사와 사상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마침내 일행은 의기사(義婍祠)라 쓰인 사당 앞에 발을 멈추어 섰다. 정유재란(丁酉再亂)시 진주성이 함락된 후 왜장을 끌어안고 같이 물에 빠져 죽은 논개를 기리며 세운 사당이다. 영정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감칠 맛 나는 여인의, 복사꽃보다 화려한 고운 자태로 아름답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부께서 작은 그녀의 사당으로 들어가 초상화 앞에 향을 꽂으신다.
우리도 같이 따라서 그녀 앞에 섰다.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그녀의 영정 앞에 서신 사부께선 조용히 묵상을 하셨고 몇몇이서 같이 따라했다.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위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나간 그 사람 그 사랑 영원하리....... 저절로 마음속에 그녀를 기린 노래가사가 새겨진다.

그때도 그랬고 다녀와서도 한참을 사부께서 왜 그녀의 영정 앞에서 묵상을 하셨을까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한낱 기생의....... 그러나 장렬한, 대변혁을 이룬 의로운 죽음임에 틀림없다.

기생으로서 뿐 만아니라 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고 우뚝 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지식과 학덕과 무예를 겸비한 이런 저런 여타의 양반들이 미처 행하지 못한, 그녀만이 선택한 운명을 넘어선 의로운 삶이었다.

성(城)의 한편에 의연히 자리하여 옳은 것을 행하는 바위라 칭해지는 의암(義巖)은 오늘도 무심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며 그 날의 장엄한 선택을 기려 지켜서고 있다.

논개(論介)! 당신은 오늘 우리 앞에 유구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당당히 헤치고 선 모습으로 이렇게 힘차게 살아 흐르는 것이로군요.


어제 오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좋지 않은 뉴스 보도로 시끄럽다. 재미교포 한국인 이민자 대학생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23)가 사소한 이유로 교내 무려 30여명에게 총기를 겨누어 무모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세계적인 뉴스다. 아직 자세한 결말은 보도 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한ㆍ미 FTA의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 협상을 이유로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조용하다.

범인이라고 지목되고 있는 조승희도 죽었단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상 초유의 미국 교내 사태로서 총기사건으로는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이 사건에, 우리나라 교포가 연류 되었다고 하는 아직 확실치는 않은 보도를 접하며, 재미 교포들은 소수 민족에게 가해지는 나쁜 일들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든 생명이 하찮게 경시되어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영문도 모른 채 무모하게 죽어가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정말 우리 교포가 그랬을까 마음이 안타깝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이 참 살만하고 아직 할 일도 많았을 터인데, 어쩌다가 그리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기생으로만 각인이 되었던 한 여인의 의로운 죽음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무심코 찾아본 이 여인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양반집 규수로 태어났으나 기구한 운명으로 인하여 어쩌다가 대가 집 후처가 되었다가 작게는 전장에서 적군에게 죽어간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아가 왜인 적장을 꾀어 장열하게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국했다는 설 등이 함께 전해지나 아직 역사적 고증이 더 남아있는 듯하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여염집 규수였든 그것이 무에 중요하랴. 어쨌거나 그녀는 그리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한계에 맥 놓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극단으로 이끈 삶이 개인으로서 무에 그리 행복한 삶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하였을 수도 있고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어떻게 사느냐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너무나 중요하다. 그녀는 의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역사 속의 오늘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함께 우리 가슴에 당당히 살아 숨쉰다. 그러한 면에서 논개의 선택은 너무나도 훌륭하며 아름답다. 대의와 명분에서만이 아니라 가치적인 면에서도.

한 때 나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던 경험이 있다. 긴 우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지다보니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당연하다. 죽을 힘이 있다면 그 힘을 헛되이 쓰기보다 의롭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래야 하는 것과 같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는 날이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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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4.18 22:01:06 *.211.61.210
정말 눈 앞에 남강이 흐르고 논개의 초상화가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절제된 표현이지만 하고자 하는 뜻은 머리와 가슴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 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훌륭한 글입니다.
참으로 좋습니다. 글쓰기 책도 잘 나올 것 같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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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07.04.18 23:10:11 *.187.231.216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게 된다던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 휩쓸려 살다 보면
생사와 같은 거창한 주제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써니님의 글로 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선천적으로 밝은 성격인 건지,
운 좋게도 저는 어리석은 선택은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서인지 살아야겠다고 지독하게 결심한 적도 없는 듯 합니다.
오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보면서
삶의 의지를 다시 다져 봅니다.
좋은 기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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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2007.04.18 23:27:43 *.234.26.40
죽음 앞에 누구도 교만할 수 없는 것처럼,
삶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천 날, 만 날 펼쳐질 듯,
방만한 모습을 반성하게 되네요.
오늘 사무실에서 아침부터 속상한 일이 있어서 하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는데, 내일은 논개가 죽음을 선택한 그 의연함으로 열심히 하루를 보내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써니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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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4.19 07:21:45 *.72.153.12
어제밤, 진주 남강과 진주대교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다리, 진주대교엔 쌍가락지 모양의 장식이 들어가 있는데, 논개물에 뛰어들때 왜장 껴안은 손 빠질까 우려하여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군요. 다음번 진주가면 사당가서 향도 다시 꽂고 다리도 꼭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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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7.04.19 09:32:39 *.133.120.2
정말 충격적이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저도 그 꽃다운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안타깝고 가슴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남겨진 조승희와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프더군요...주변에 건강하던 분들이 암 발병으로 힘겹게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는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분들에게는 삶이나 죽음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선택할 뿐 그 선택으로 얻어지는 결과는 운명에 따라 다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충격은 받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별로 못했는데 써니님 글을 통해 논개의 죽음도 듣고 보니 생각을 하게 되네요... 더불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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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4.19 10:24:19 *.218.203.42
누나.. 이 글 무척 좋아요.
요즘 하루가 무섭게 달라지는 것 같아. 대단하다.
사부님이 왜 뽑았는지. 초아선생님이 왜 추천했는지.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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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훈
2007.04.19 13:00:03 *.126.46.122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기분이 참 묘해지더군요. 내가 바라보고 느끼고 살아가던 세상에 나란 존재가 사라지고 없지만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돌아간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답이 없는 생각이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 가짐이 조금은 변하더군요.
과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며 남긴 건 무엇이었을까?
꼭 무언가 거창한 것을 남겨야 된다기 보다는 나란 존재의 진정한 모습, 내가 가진 기질을 맘껏 발휘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엄습합니다.
어쩜 그래서 이곳을 찾았고, 매일 같이 저 스스로를 반성하고 채찍질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두렵다기 보다는 아무런 슬픔도 남기지 못하고 무 의미한 삶을 살아가다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그런 모습이 두렵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잠시 되돌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아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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