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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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를 잠깐 엿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아테네와 헤파이토스의 불과 지혜를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 되어있다. 맨발과 맨몸으로 무기도 없이 있는 인간에 대한 일종의 구원책이었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지나온 수십 세기를 뒤돌아 볼 때, 과연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건네 준 지혜와 불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해 주었을까?
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민간연구기구에서 40년 전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프로잭트다. 외계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전 세계 전파 망원경에 포착된 우주 전파 중 누군가 일부러 만든 흔적이 뚜렷한 인공전파를 찾아내는 게 SETI의 핵심과제다. 이 연구원들이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질문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놀랍게도 첫 번째 질문이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높은 기술문명을 가지고도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나?’ 라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구원책이 완전한 것이 아닌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결 못하는 일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해결 못하는 일’을 우주 저쪽에 살고 있는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그 ‘해결 못하는 일’ 의 초점인 기술 문명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과학과 사회라는 측면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한층 명확해 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 온 메세지에 대한 성찰의 방법으로 보자는 것이다.
기원 전 5세기 그리스인의 자연관을 시작점으로 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 성찰은 끝임 없이 이어져왔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외부환경인 자연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 될 수 없었던 셈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요, 우리와 동등한 존재’ 라는 입장에 선 생성론적 자연관에서 존재론과 기계적 자연관을 거쳐 오늘날의 자연관까지 자연은 단지 인간 사유의 대상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때론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배의 되기도 하였지만 인간에 의해 끝임 없이 도전 당했다고 보는 측면이 더 현명하다. 그러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의 결과를 자연의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자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는 해류의 흐름 변화가 지구 기후를 변화시키고 이의 결과로 빙하기가 닥쳐온다는 설정이다. 에너지 흐름의 변화가 몰고 온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셈이다. 영화 내용의 과학적 타당성 근거를 떠나서 이러한 결과의 원인적 측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책임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의 숨통을 죄이는 온실가스라는 물질이 오존층 파괴의 결과를 낳고 이는 또 다른 인류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 행위에 대한 자연의 경고인 셈이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긴 지구의 역사, 나아가서 우주의 변화 생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구에 찾아들고 있는 에너지 흐름의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큰 흐름에 맡겨라.” 그러나 큰 흐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르다. 우리 행위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앞서야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과학 발달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과학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도를 해야 한다. 인류사회의 진보적 측면 뒤에 숨어 있는 그늘도 직시해야 함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부정적 측면의 해결의 실마리 역시 과학으로 풀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과학과 기술의 모습을 숨김없이 파 헤져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마음 편한 것이다.
고대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 까지 과학과 기술은 독립적으로 발달하거나 기술이 과학 발달에 영향 기여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과학이 기술에 영향을 주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학과 기술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서 외부 사회와의 영향도 그 어느 때 보다 크다. 현대 일상의 복잡성처럼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또한 복잡하다. 그 관계의 복잡성에서 파생된 문제 또한 다양하다.
먼저 현대 과학 기술 발달로 인한 물질적 풍요이다. 이 넘침의 풍요는 물론 긍정의 측면도 있지만 자연을 비롯한 타 생명체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러나 더 문제인 것은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간 세계관의 변화와 가치갈등 문제다. 세계관은 우주와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서술적이고 해석적인 정신 모형이다. 존재하는 사물의 본성, 세계에 작용하는 기본적인 힘,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제세하며 반대하는 세력을 극복하도록 격려한다. 세계관의 변화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했다. 이는 인간이 우주 중심이 아님을
인식하는 차원을 넘어선 저 건너편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기온 상승으로 인한 다양한 흐름의 변화, 지구의 사막화, 경제적 양극화 현상, 나아가서 인간성 파괴 까지다. 자연이 인류에게 준 경고의 메시지를 떠나 파멸에 이르기 까지 한 예를 2500년 전에 신화를 빌어 피력한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죽은 아스클레피우스가 그렇고 네 차례의 홍수를 보내 타락한 인간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제우스 힘이 그렇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변형시키려는 인간의 오만함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생태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연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알아 겸허해지고 문화의 위대함에 함께 동참하자는 말이다. SETI의 연구원들이 구하고자 하는 해답도 바로 이 겸허 해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미래는 인간이 변화하고자 하는 결실에 따라 달라진다. 인류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노력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세대에 대한 의무다. 미래에 대한 제한적이고 편견된 시각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로 보고 냉철하게 판단하되 능동적으로 가꾸어 가야한다.
하늘을 보며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보존된 지역으로 일종의 시각적 휴식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명 공해는 캄캄한 밤하늘이 주는 영적이고 사색적인 아름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방 자치단체들이 이러한 제한 지구를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의 불빛에서부터 야간 리틀리거 경기를 위한 조명에 이르기까지 에리조나에 있는 팔머 호수는 일찍부터 밤하늘 보호지구로 지정된 지역이다. 뉴멕시코에서는 주지사가 밤하늘 보호법령에 서명했다. 이 지역의 환경보호단체는 밤하늘을 뉴멕시코의 상징 가운데 가장 멸종 위기에 처한 것들 중 하나로 꼽는다. 조명 생산업자들은 빛을 아래로만 쏘는 조명기구를 설계함으로써 이 운동에 동참하려한다. 미래의 삶이 고다내질수록 명상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
고, 개발이 진행될수록 과잉조명은 더욱 많아져 밤하늘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날 것이다. 공해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는 점, 그리고 조명도 유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셈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는 (www.darksky.org)
- 페이스 팝콘의 ‘미래사전 백과’ 중에서 -
밤하늘 보호구역이 우주 본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우리 미래세대는 알까?
그러나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 세대가 그려내는 다가오는 시대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것만 같은 과학은 우리에게 희망의 불빛을 보내고 있음을.
추신 : 다음은 제가 쓸 책의 제목입니다. 성급하죠. 페이스 팝콘이 선물한 것입니다.
제목 : 과거 생활 사전
그 중 일부입니다.
과거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것도 공짜였다. 별은 한 두개가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 개가 모여 반짝거리곤 했으며
때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기 까지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별똥별이라고 불렀다.

IP *.114.56.245
현대에 이르러 지나온 수십 세기를 뒤돌아 볼 때, 과연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건네 준 지혜와 불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해 주었을까?
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민간연구기구에서 40년 전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프로잭트다. 외계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전 세계 전파 망원경에 포착된 우주 전파 중 누군가 일부러 만든 흔적이 뚜렷한 인공전파를 찾아내는 게 SETI의 핵심과제다. 이 연구원들이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질문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놀랍게도 첫 번째 질문이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높은 기술문명을 가지고도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나?’ 라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구원책이 완전한 것이 아닌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결 못하는 일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해결 못하는 일’을 우주 저쪽에 살고 있는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그 ‘해결 못하는 일’ 의 초점인 기술 문명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과학과 사회라는 측면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한층 명확해 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 온 메세지에 대한 성찰의 방법으로 보자는 것이다.
기원 전 5세기 그리스인의 자연관을 시작점으로 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 성찰은 끝임 없이 이어져왔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외부환경인 자연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 될 수 없었던 셈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요, 우리와 동등한 존재’ 라는 입장에 선 생성론적 자연관에서 존재론과 기계적 자연관을 거쳐 오늘날의 자연관까지 자연은 단지 인간 사유의 대상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때론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배의 되기도 하였지만 인간에 의해 끝임 없이 도전 당했다고 보는 측면이 더 현명하다. 그러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의 결과를 자연의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자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는 해류의 흐름 변화가 지구 기후를 변화시키고 이의 결과로 빙하기가 닥쳐온다는 설정이다. 에너지 흐름의 변화가 몰고 온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셈이다. 영화 내용의 과학적 타당성 근거를 떠나서 이러한 결과의 원인적 측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책임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의 숨통을 죄이는 온실가스라는 물질이 오존층 파괴의 결과를 낳고 이는 또 다른 인류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 행위에 대한 자연의 경고인 셈이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긴 지구의 역사, 나아가서 우주의 변화 생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구에 찾아들고 있는 에너지 흐름의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큰 흐름에 맡겨라.” 그러나 큰 흐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르다. 우리 행위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앞서야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과학 발달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과학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도를 해야 한다. 인류사회의 진보적 측면 뒤에 숨어 있는 그늘도 직시해야 함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부정적 측면의 해결의 실마리 역시 과학으로 풀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과학과 기술의 모습을 숨김없이 파 헤져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마음 편한 것이다.
고대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 까지 과학과 기술은 독립적으로 발달하거나 기술이 과학 발달에 영향 기여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과학이 기술에 영향을 주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학과 기술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서 외부 사회와의 영향도 그 어느 때 보다 크다. 현대 일상의 복잡성처럼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또한 복잡하다. 그 관계의 복잡성에서 파생된 문제 또한 다양하다.
먼저 현대 과학 기술 발달로 인한 물질적 풍요이다. 이 넘침의 풍요는 물론 긍정의 측면도 있지만 자연을 비롯한 타 생명체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러나 더 문제인 것은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간 세계관의 변화와 가치갈등 문제다. 세계관은 우주와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서술적이고 해석적인 정신 모형이다. 존재하는 사물의 본성, 세계에 작용하는 기본적인 힘,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제세하며 반대하는 세력을 극복하도록 격려한다. 세계관의 변화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했다. 이는 인간이 우주 중심이 아님을
인식하는 차원을 넘어선 저 건너편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기온 상승으로 인한 다양한 흐름의 변화, 지구의 사막화, 경제적 양극화 현상, 나아가서 인간성 파괴 까지다. 자연이 인류에게 준 경고의 메시지를 떠나 파멸에 이르기 까지 한 예를 2500년 전에 신화를 빌어 피력한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죽은 아스클레피우스가 그렇고 네 차례의 홍수를 보내 타락한 인간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제우스 힘이 그렇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변형시키려는 인간의 오만함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생태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연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알아 겸허해지고 문화의 위대함에 함께 동참하자는 말이다. SETI의 연구원들이 구하고자 하는 해답도 바로 이 겸허 해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미래는 인간이 변화하고자 하는 결실에 따라 달라진다. 인류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노력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세대에 대한 의무다. 미래에 대한 제한적이고 편견된 시각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로 보고 냉철하게 판단하되 능동적으로 가꾸어 가야한다.
하늘을 보며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보존된 지역으로 일종의 시각적 휴식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명 공해는 캄캄한 밤하늘이 주는 영적이고 사색적인 아름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방 자치단체들이 이러한 제한 지구를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의 불빛에서부터 야간 리틀리거 경기를 위한 조명에 이르기까지 에리조나에 있는 팔머 호수는 일찍부터 밤하늘 보호지구로 지정된 지역이다. 뉴멕시코에서는 주지사가 밤하늘 보호법령에 서명했다. 이 지역의 환경보호단체는 밤하늘을 뉴멕시코의 상징 가운데 가장 멸종 위기에 처한 것들 중 하나로 꼽는다. 조명 생산업자들은 빛을 아래로만 쏘는 조명기구를 설계함으로써 이 운동에 동참하려한다. 미래의 삶이 고다내질수록 명상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
고, 개발이 진행될수록 과잉조명은 더욱 많아져 밤하늘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날 것이다. 공해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는 점, 그리고 조명도 유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셈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는 (www.darksky.org)
- 페이스 팝콘의 ‘미래사전 백과’ 중에서 -
밤하늘 보호구역이 우주 본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우리 미래세대는 알까?
그러나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 세대가 그려내는 다가오는 시대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것만 같은 과학은 우리에게 희망의 불빛을 보내고 있음을.
추신 : 다음은 제가 쓸 책의 제목입니다. 성급하죠. 페이스 팝콘이 선물한 것입니다.
제목 : 과거 생활 사전
그 중 일부입니다.
과거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것도 공짜였다. 별은 한 두개가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 개가 모여 반짝거리곤 했으며
때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기 까지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별똥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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