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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2일 08시 43분 등록
 내가 우리집 족보를 처음 본 것은 군대를 다녀와서이다. 한참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종친회라고 전화가 와서 문중에서 20년 만에 다시 족보를 만들었으니 하나씩 구입을 하라고 하였다. 뭐랄까. 무슨 책장사가 전집을 파는 것도 이것보다는 덜 하겠다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고향집 부모님한테 상의를 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였다. 중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났고 막내다 보니 집안일에 관여할 일이 많지 않았고 첫 직장을 충남 서산과는 정 반대인 부산에서 10년을 살았으니 마음이 가질 않았다. 족보 편찬에 대한 부모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거금을 들여 구입을 했다.

 족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반들 자기들만의 견고한 사회를 만드는 도구라는 것과 조선 후기에 상인들이 재력이 커지면서 족보를 사고팔고 했다는 것. 그리고 남자만의 전유물이라는 것 등등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다. 또한 족보를 가지고 촌수와 호칭을 따지는 것도 또한 어려웠다. 특히 원영이 태어나서 이름을 지을 때 항렬 때문에 약간의 분쟁도 있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이해를 해주셔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족보를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후이다. 원영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단원에서 조상과 외가, 본가 등 본인의 출생과 관련된 가족관계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꼬치꼬치 집요하게 물어보는 아들 녀석에게 어영부영 대답을 하다가 그만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냐”는 핀잔과 함께 호되게 당했다. 아..그 기분이란......해서 다시 아버지에게 여쭤보고 족보를 찾아보게 되었다. 본관은 경주이고 화숙공파 33대손이라는 것과 시조 최치원 할아버지의 9대 손인 현우 할아버지부터 우리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에 사화의 피바람을 피해서 정착한 곳이 지금의 서산이라고 한다.

 태어난지 40여년 만에 찾아보는 조상들은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명절때 성묘를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이분은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하며 이름과 일생을 가끔 얘기해주셨지만 매 추석이나 구정 때마다 똑같이 마음에 없는 지나가는 말이었다. 다시 족보를 보면서 내 직계 조상을 따져 들어 가보니 이것처럼 기가 막힌 것이 없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단 내 33대 조상들로부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고 장가를 가서 그 자손들이 계속 번성해야 한다. 만일 조상들 중 한분이라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던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변고가 있었다면 내 존재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 당시의 의술이나 환경을 보면 어린아이가 생존율이 2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6남3녀의 자녀를 얻었고, 그중에서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었고 이러한 아픔으로 천연두에 대한 의서인 마고유통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개인과 가족의 중요성을 알고 오랫동안 번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자료가 바로 족보가 아닌가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피부로 와 닿는다. 또한 가풍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로 계속되는 33번의 핏줄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은 대부분 조상님들이 평생토록 힘겨운 농사일을 하였고, 다른 길이 아닌 계속 대물림해서 고향을 떠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나 한국전쟁 같은 특별한 사건이 가끔 있었겠지만 아마 농사일의 반복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살다가 갔을 것이다. 아마 조상님 들 중에는 과거를 준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고향을 떠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싶으신 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 아버님도 그렇게 사셨다. 젊어서는 농사를 지으셨고, 나이가 들어서는 장사를 하셨다. 나는 아버님 덕분에 일찍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나오게 되었고,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미래학자인 페이스 팝콘의 「클릭 미래속으로」에서 보면 미래 트렌드로 마음의 안식 찾기가 있다. 미국에서는 마음의 안식 찾기의 일환으로 뿌리 찾기 운동이 유행한다고 한다. 특히 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이 자기 조상들의 뿌리를 찾기 위하는 노력은 눈물겹다고 한다. 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이다. 나라의 역사나 가족의 역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족보가 있으니까. 미래가 현재를 떠나서 성립될 수 없듯이 현재도 역시 과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변화 속에서 느리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가지고 자기의 뿌리를 하찮게 여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크게 자랄 수가 없고, 건실한 기초 없는 건축물은 오래 갈수 없다. 우리 가문의 족보를 다시 세세하게 읽고 찾을 것이다. 내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내 후대들에게 남겨줄 유대한 유산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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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4.22 21:58:38 *.211.61.164
소전, 한동안 잊고 있던 족보를 되새겨 주어 고맙네.
미래생활사전을 읽다보면 한 가지 트렌드가 보존인 것 같아.
동식물의 씨를 보존하는 여러가지 양상들이 나타나 있지.
극단적인지 모르겠지만 인간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참 쓸쓸해진다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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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4.23 11:52:33 *.70.72.121
저희 아버지께서도 정년 퇴직 후에 노동만 강요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며, 답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한 족보편찬 작업에 몰두하시고 수고비는 커녕 좋지 않은 탓만 들으시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내심 속상해하며 왜 늘 저리 자청해서 힘들게 사시나 찌푸린 적이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먼저 조상을 찾게 되더라고요. 나의 뿌리를 설명해야 할 때, 홀로서기를 하면서, 제일 먼저 자산 목록 1호로 정한 것이 바로 족보 였답니다. 필요할 것이라는 자각이 그때서야 절실하게 들었지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근본의 성체던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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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4.23 13:37:28 *.114.56.245
유산을 만든다는 말씀,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곧 나를 새롭게 인식한는 출발점이겠지요 . 좋은글 좋은 사람 옆에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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