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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2일 19시 55분 등록
나무, 느티나무, 나 그리고 안식처


하나.

제가 사는 동네에는 나무가 꽤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이지만 오래 전에 조성된 터라, 큰 자태를 내는 나무들이 제법 많습니다. 단지 앞에는 작은 천이 흐르고 있고 그 주위로 또 초목이 있습니다.

오늘 낮에 외출을 했다가,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문득 그러고 싶어졌습니다. 막 피어나는 초록의 생기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풍겨내는 싱그러움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4월말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점점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멀리서 보면 연두 빛 점박이가 박혀 있었던 듯한 나무들이, 이제 점점 그 연두 빛을 온몸으로 덮고 있습니다. 엷은 분홍이 도는 흰 벚꽃의 물결이 가라앉고 벚나무는 잎을 틔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단풍나무는 다섯 가닥 잎을 활짝 다 피웠고 어떤 단풍나무는 아직 수줍은 듯 잎을 오므리고 있습니다. 라일락은 벌써 꽃을 피워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철쭉은 그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귀엽고 작은 잎들을 부끄러운 듯 팔랑거립니다. 언제나 푸른 소나무는 거기 꿋꿋이 서 있습니다. 어떤 이름 모를 나무는 벌써 온 나무에 많은 잎을 틔우고 봄바람에 살랑이고 있습니다.

이곳에 20년 가까이 살았건만, 내 주위에 이런 싱그러운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낮 시간에 이렇게 나무 사이를 여유롭게 거닌 것도 참으로 오래 되었으니까요. 그 동안 나름 참 각박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학업이니 직장이니 진로에 대한 고민에 치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을 감고 초록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느낄 여유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나무는 언제나 거기 계속 있었습니다.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직합니다. 나무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 합니다. 생명체임을 느끼게 합니다. 봄에는 생기를 여름에는 무성함과 활동력을 가을에는 원숙미를 보여줍니다. 겨울에는 맨 가지로 추위를 맞습니다. 아픔으로 봄을 준비합니다. 나는 이곳에 지원할 때 쓴 개인사에,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저는 그 이미지를 나무의 모습에서 캐치하였습니다.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느티나무를 좋아했습니다. 단단해 보이는 나무 기둥에는 윤기마저 있습니다. 가지는 사방으로 시원시원하게 뻗습니다. 그 많은 가지에서 잎이 돋아납니다. 잎은 언뜻 보기에는 타원형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장자리는 날카롭습니다. 잎이 제 크기를 다 키우면, 잎은 고개를 겸손히 내립니다. 그러면서도 느티나무는 너무나 풍성해집니다. 뿌리는 깊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라는데, 마을 어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자나무이기도 했습니다.

단단함, 깊음, 질기면서도 까다롭지 않은 자생력, 그리고 풍성함, 거기서 오는 넉넉함과 여유로움, 베풂, 꽉 참, 그 안에 있는 내면의 날카로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이미지. 나는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보니 제 주위에도 느티나무가 많았습니다. 생각보다 여러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꽤 살아 몸집이 큰 것도 있고, 이제 사람 키의 두 배 쯤 되는 어린 나무도 있습니다. 나는 또 이들에게 듬직함과 편안함과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내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같은 곳에서 나를 보았습니다. 이들이 곁에 있어 나는 좋습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갔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여승들의 절이 있다. 나는 절이라는 곳이 몹시 싫었으나 거기를 좀 더 지나가면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났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였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그는 두 발로 땅을 꾹 딛고 서서 말하였다. 나는 느티나무를 붙들고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젊은 느티나무’는 성장하는 아픈 청춘의 영혼이었습니다. 그 때 느꼈던 가슴 저림, 떨림, 애절함, 벅참이 다시 피어오릅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따뜻함이었습니다.
IP *.204.8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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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瀞
2007.04.22 20:05:42 *.204.85.225
나는 내가 사는 곳 그 다양한 나무들 사이를 정말로 오랜만에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흥을 글로 옮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쓰고 나니 이번 칼럼을 그 느낌과 연결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서로 다른 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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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2007.04.23 00:18:17 *.147.17.97
호정아,
그래 너는 나무인가 보다. 느티나무인가 보다. 느티나무에게는 햇살이 필요하다. 나는 햇살이다. 느티나무와 햇살, 멋지지 않은가!

호정아,
나는 물이 아니다. 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허나, 단 한 사람에게만은 물이 되고 싶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한 사람은 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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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4.23 08:08:08 *.128.229.88
거 참, 닮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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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7.04.24 20:16:50 *.122.143.72
ㅎㅎ, 두분의 모습 보기 좋습니다. 느티나무와 햇살, 한사람에게만 흐르는 물.. 불현듯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르네요.

새벽에 출근하고 밤 늦게 퇴근하는 일상속에서 날로 더해지는 푸르름은 제게 큰 활력소가 되어 줍니다. 특히 새벽 출근시에 들리는 박새의 울음소리는 아침을 보다 활기차게 시작하라는 메시지와 같습니다.

느티나무의 시원하고 포근한 이미지가 머리 속에 잘 그려집니다. 좋은 글 덕분에 마음 편해져서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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