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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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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2일 22시 47분 등록


두 달 전에 관악산 아래로 집을 옮겼다. 그 전에도 관악산 근처에서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산 바로 아래의 산책로 초입의 집을 얻어 나온 것이다. 작년 첫 눈이 온 날, 사부님과 북한산 산행을 하며 자연을 늘 옆에 두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행동은 좇아 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기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이 집을 얻게 되었다. 대만족이다. 책상 앞의 커다란 창을 열면 관악산의 풍광과 흙 냄새, 풀 냄새가 시원하게 코를 간질인다. 날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책을 읽고 있으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오전에 책을 읽다가 창문 밖으로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두색의 풀과 흩날리는 벗꽃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가슴은 콩닥콩닥, 두 발은 이미 팔닥거리며 안달이 났다. 이 좋은 날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려니 한심하고 답답했다. 당장에 짐을 쌌다. 와인 한 병과, 컵라면 하나, 생수, 담요, 모자, 핸드PC.. 닥치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나만의 조용한 보금자리를 갖고 싶었다.

오전11시. 우선 돗자리가 필요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원당 시장에 들러 괜찮은 것을 찾았다. 건강에 좋다는 파프리카와 좋아하는 청포도도 샀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장 안 쭈글쭈글 아지매들의 수다가 정겹다. 이게 인간 냄새구나.

정오. 산을 오르려는데 집 앞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산책길을 하나 발견했다. 걸음을 돌려 우거진 수풀을 비집고 들어가니 산 비탈에 아무도 오지 않은 듯한 널따란 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다웠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삼십여분을 서성거렸다. 평평하고 벛꽃에 둘러싸인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

오후 1시. 알록달록한 돗자리를 펴고 누우니 벚꽃의 흐드러짐과 푸른 하늘이 겹친다. 띠리리라리디~ 여보세요? 창용이형이다. 초아 선생님 북세미나에서 꿈벗들 모임 계획이 있느냔다. 꿈벗들은 누가 주도하지 않아도 잘 모이니 염려할 것 없다 했다.

오후 2시. 가져온 파프리카를 우적우적 씹으며 책을 읽었다. 페이스 팝콘의 '클릭! 미래속으로'. 팝콘이라는 이름값 한다. 통통튀고 짭잘하다. 재미있는 만큼 통찰이 대단하다. 두어 시간 읽으니 스르르 잠이 온다. 큰 대자로 뻗었다. 햇살이 부드럽다.

오후 4시 반. 눈을 떴을 때는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바람은 더욱 가볍다. 책은 재미있었다. 팝콘의 선동적인 재치에 웃고, 눈 내리듯 휘날리는 벚꽃에 취한다. 정말 유쾌하고 행복한 하루였구나.

풋. 하루가 아주 재미있었다.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히고 곰곰이 생각하다 낄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특별한 일상 속에 팝콘의 통찰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 혼자 살기 시작한지 15년. 집 안이 답답할 때면 어김없이 밖을 찾아 나선다. 내가 원하는 곳은 조용하게 자연을 바라보며 명상할 수 있는 곳,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현대생활의 고삐를 풀 수 있는 곳이다. 15년간 죽 혼자인데도 나는 밖에 나가서도 여전히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원하고 있다. 집 바로 옆의 언덕으로 떠나면서도 코쿤(Cocoon)을 함께 가지고 떠난다. 보금자리를 틀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위를 장식하는 나는 코쿤족이다. (마음의 안식처, 코쿠닝 트렌드)

* 오늘의 언덕은 초행길이었다.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아 풀숲이 우거진 보일 듯 말 듯 한 길로 발걸음을 옮겨 놓으니, 시체라도 있지 않을까 불안하고 덜컥 겁이 난다. 그러나 이곳은 안전하다. 집에서 기껏해야 2분 거리이니까. 지나친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 그 곳이 내가 찾은 곳이다. 안전하면서도 짜릿한 모험을 즐기는 나는 안락의자 속의 탐험가이다. (환상 모험 트렌드)

* 평범한 것이 싫다. 앞에는 은박, 뒤에는 하얀 부직포의 2천 원짜리 돗자리가 싫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자리를 찾고 싶었다. 30분 동안 시장 곳곳을 헤집고 다니다 결국 마음에 쏙 드는 놈을 만났다. 비닐 돗자리가 만원이라니! 그러나 신선 같은 하루를 보내는데 만원쯤이야! 오늘은 지름신이 밉지 않다. 나는 특별하다. 특별한 나를 위해 작은 사치는 투자할 가치가 있다. (개성 찾기, 작은 사치 트렌드)

* 파프리카는 비타민 A, C가 많아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데 좋단다. 칠레산 청포도는 머리가 맑아지고 기억력을 높이는 데 좋다 한다. 풀숲에 누워 연신 새콤한 두 가지를 번갈아 씹어먹었다. 서른이 되어서일까? 언제부턴가 잘 먹지 않던 야채와 과일들을 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밥은 잡곡을 꼭 넣어 짓고, 흰 우유는 검은콩 우유로 바뀌었다. 나에게 인생은 단지 살아있는 것을 넘어 건강하게 오래 살아가는 것이다. (건강장수 트렌드)

* 창용이형은 꿈벗이다. 꿈벗들.. 멋진 사람들. 이 사람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이렇게 다양하게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일체감으로 내 삶은 활력을 얻는다. ‘꿈’이 우리를 엮어주는 끈이며 종교이다. 언젠가 꿈벗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함께 살며 웃고 울 날을 상상해 본다. 아직까지는 연구원이나 카네기 직원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나는 꿈벗이다. (유유상종 트렌드)

* 귀자가 산에서 담배를 피면 안 된다고 몇 번 주의를 주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두 가치를 피웠다. 이제 사회적인 금연 열풍에 질려버렸다. ‘해야 하는’ 그리고 ‘하면 안된’ 일들이 왜 이리 많은가. 반항심에 싱그러운 파란 잎사귀에 후 하고 지독한 담배 연기를 뿜어버린다. 그러면서도 담배 꽁초는 쉽게 버리지 못한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만 꽁초와 쓰레기들을 바리바리 주머니에 넣는다. 잎사귀를 키워 낸 땅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반항적인 늑대에서 때로는 순한 양이 되는 나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에 당황한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반항적 쾌락, S.O.S. 트렌드)


페이스 팝콘은 일상에서 발견한 진부한 사물과 사건에 의미를 주입하여 세상에 내 놓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뉴욕의 거리를 휩쓸며 트렌드를 찾아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의 일상 속에서 그 소재를 발견한다. 현재의 자료와 데이터가 반드시 신빙성 있는 시장 예측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과 창조력이 더 중요하다. 그녀의 비합리적인 방법이 경쟁력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로킨(Plotkin)에서 팝콘(Popcorn)으로, 사회로부터 주어진 이름을 거부하며 족보마저 바꿔버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트렌드란 현재의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갈, 항상 존재하는 힘이다. 미래의 씨앗은 어디에나 있다… 만일 여러분이 트렌드들에 대해서 연구해 본다면, 변화의 미묘한 신호와도 같은 초기 조짐들을 찾아내는데 능숙해질 것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 트렌드들을 이용해서 클릭하는 것 뿐이다”

미래가 토플러나 리프킨 같은 학자 풍의 ‘머리에 쥐나는’ 이론에 의해서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발견하는 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모래 속에서 빛나는 깨알의 사금(沙金)처럼, 흘러가는 나의 일상 속에 미래가 조용히 빛나고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된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그것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조용히 걸러내어 나의 꿈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꿈이 이루어진다.


IP *.112.7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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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4.23 04:11:47 *.167.112.35
옹박아
이제 담배 끊지,
나의 지난 과거중에 몇가지 후회하는 것들 중에
제일이 담배를 늦게 끊은 것이다. 그리고 귀자를 좀 구속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두번째 자내에게 주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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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4.23 07:50:21 *.128.229.88
매우 좋다. 책이 그대 안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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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4.23 08:20:51 *.244.218.10
좋네.. 사부님이 너는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 글의 소재임을 보여 주었다고 하셨었는데,, 이것도 몹시나 그렇다. 그리고 편하게 잘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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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4.23 10:05:24 *.99.241.60
봄의 파릇함 느낌과 미래를 보는 눈이 연상된다.
주말에 장용산이라고 잠깐 들렀는데
오묘한 초록의 색이 눈을 즐겁게 하더구나.
연한 초록과 짙은 초록사이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자연색이 정말 좋았다.

언제 주중에 관악산 야간 산행한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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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2007.04.23 11:50:27 *.103.132.133
옹박, 니 글은 정말 편안하고 좋아..
몸이 아주 편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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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4.23 11:54:17 *.218.203.41
초아선생님/ 담배.. 조금만 더 피우고 끊겠습니다. 자꾸 끊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아 더 피우게 되는 악순환인것 같아요.(핑계 참 그럴듯하죠..?) ㅎㅎ

사부님/언제 관악산으로 한번 원정 등반(?) 오세요. 산이 참 예뻐요

민선누나/ 아.. 고맙다. 누나. 누나 이번 글도 좋았어. 승완이형이 오랜만에 바른말 했더라. 자의식에서 멀리 떨어져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글쓰기.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글쓰기. 그게 누나가 가장 많이 발전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근거에요.

영훈이형/으와~ 좋죠. 야간등반? 한번도 안해봤는데.
형과 함께 가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언제 (월요일이 제일 편하겠죠?) 밤에 등산해서 아침 일출보고 함께 출근해요. 정말 좋다.

모모누나/누나 글은 신비해서 좋아. 팝콘 책 읽으면서 누나와 은남누나 생각을 했어. 어떻게 하면 통통튀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아무래도 어색해.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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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4.23 12:44:22 *.72.153.12
옹박은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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