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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일 13시 38분 등록
다산초당(茶山艸堂)을 찾아서-44

빛 고을 광주에 내려온 지 3개월이 지났다. 당초 전남의 풍광 좋은 곳을 찾기로 계획했음에도 가정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다 지난 달 겨우 무등산 등정과 소쇄원을 찾은 것이 전부였다. 이러다 안 되겠다싶어 큰 맘 먹고 찾은 곳이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사랑하며 나라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들러야 하는 장소가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광주에서 제법 먼 거리였다. 내 사택에서 정확히 89㎞거리였으며, 승용차로 1시간40분 정도 소요되었다. 과거 전남의 중심 나주를 거쳐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강진에 다다르면 다산초당행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이 팻말을 따라 약 10여㎞ 진행하면 귤동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도착하는데 다산초당은 이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에 있었다. 이 날은 휴일이라 삼삼오오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총총하다.

다산초당에 첫발을 내딛자 시원한 바람과 흙냄새가 청량함을 더해준다. 우선 다산을 머리에 떠올렸다. 다산 정약용 선생, 그는 조선이 낳은 최고의 석학이었다. 정치․경제․국방․의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이 인적인 드문 머나먼 시골에 무려 18년이란 유배생활을 하게 하다니 조선이란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를 의심케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저술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름지기 깊은 사상은 깊은 사색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다산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보통 그의 삶을 3기로 구분한다. 1기는 1762년 태어나 정조가 승하하여 순조1년 신유박해로 유배가기전의 39세까지 기간. 이 시기는 다산이 승승장구했던 시절이었다. 22세 때 경의진사에 합격하여 정조의 신임을 얻으면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부승지를 거쳤다. 조선왕 중 정조는 개혁임금이었기에 다산 같은 개혁적 인재를 찾았으며 그를 중용했다.

2기는 정조가 승하하면서 찾아왔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정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유백해로 인해 경상도 포항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유배 중 황사영백서사건(천주교인들의 구제를 위해 청나라주둔 프랑스군의 조선입국을 요청한 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移配)된다. 이때부터 강진의 주막을 7년간 전전하다 외가인 윤씨의 도움을 받아 다산초당에서 머물게 된다. 다산은 여기서 10년의 유배생활을 갖는데 이 때를 다산의 인생 2기라 말한다.

3기는 다산초당에서 해배(解配)되어 1836년 75세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때 향리로 돌아와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 한 시절을 보냈다.

다산초당은 다산의 2기 인생으로 강진에 유배되면서 10년간 머물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실학을 집대성한 명저를 모두 탈고한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알게 한다. 그 중 지방관리가 지켜야할 덕목을 담은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세계적인 도서로 외국의 국가경영자들의 지침서로서도 이름이 높다. 베트남의 호치민도 이 도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내가 찾은 다산초당은 여러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있었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숙소로 활용했던 초가였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서암과 책을 집필했다는 동암이 있으며, 강진만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천일각(天一閣)이 있었다. 이 천일각은 흑산도에 귀양 가 있던 친형 정약전과 가족을 그렸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현재 있는 누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다산이 유배생활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또한 다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다산4경이 그 안에 있었다. 정석(丁石 :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암벽에 새긴 글자), 다조(茶竈 : 차를 다려먹은 곳), 약천(藥泉 : 약수터),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 연못)이 그것이다. 다산은 그곳에서도 무엇인가 자신에 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던 듯하다.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갖고 말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다산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그 같은 생각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산을 기리기 위한 다산유물전시관이 다산초당으로부터 남쪽으로 800m 지점에 건립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영상물을 통해 다산의 위대성을 알리고 있었다. 한강의 배다리이며, 토지 개혁을 위한 여전제, 거중기를 발명해서 화성을 축조한 것이며, 종두법을 최초로 시행했던 내용 등 한 사람이 했다고 믿기기 어려울 정도의 너무나 찬란한 업적이 있었다.

나는 다산 영상물을 보면서 시대와 장소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세상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임을 다시 한번 읽을 수 있었다. 그 분은 사색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자신의 목숨이 사라질지 모르는 형국임에도 무적시의(無敵時宜)를 통해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즉,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시대에 알맞게 하라’고 말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만이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고난과 역경이 그를 외워 싸도 늘 다산은 변화를 즐겼고 백성과 함께했다.

다산은 올곧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다산초당에서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벗어나게 하기위한 지인들의 노력과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다산은 곧은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번은 아들이 주변인물에게 아부하여 유배생활을 벗으라는 편지를 받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한다.

“보낸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천하엔 두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 가장 낮은 등급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해를 입는 경우이다”고 말하면서 아부는 세 번째이나 결국 네 번째 등급으로 가는 길이라고.

다산초당을 나오면서 모든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삶의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나의 흔적은 어디이며 쌓을 수 있는가? 나의 조그만 흔적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가? 나는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간극에서 짧은 찰나를 맛보겠지만 다산의 기나긴 정신은 민족의 한가운데서 영겁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다산유물전시관을 나서면서 마지막 멘트가 내내 내 귓가를 울렸다.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에 취하면 천년대계(千年大計)가 이루어진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항상 위대한 명구가 따라붙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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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5.02 17:15:47 *.70.72.121
선배님의 큰 걸음이 느껴져요. 이제 휙 날으려고 하시네..
글이 선명한 것을 보니 무거운 상념 들을 떨고 새로운 각(覺)을 세우셨나봅니다. 가장 어려운 높은 등급을 향하여 힘 모으시려 다짐하셨는지요.

선배를 따름은 스승님의 뒤를 함께 가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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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03 09:41:05 *.99.241.60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사실 저도 2002년도 마지막날에 강진에 사는 친구집에 들러서
땅끝마을에서 새해 일출을 보고 다산초당으로 일행과
같이 이동하던중,
전날 무리를 한탓인지 다산초당은 못보고
차안에 있었습니다. ㅠ.ㅠ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이번에 정민 교수님이 지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고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갈 계획이었습니다.

선배님 글 잘 보았습니다.
시간내어서 지난번 보지못했던 다산의 향기를
직접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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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5.03 11:00:45 *.167.160.219
곡원장!
고 스톱 할줄 아세요? 화투판에서 제일 필요없는 몇장 중 6월 목단이 있을 것입니다. 육월이 되면 강진에 한번 더 다녀오셔요. 강진시네에 있는 "영랑 김윤식"님의 생가를 방문해보세요. 화강암에 쓰여진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봄을 기다리고 있을레요.
- - - -_ _ _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리고,
영랑시인 생가 앞에 피는 모란꽃속에 잠시 빠져 보세요.
영란이 집필하던 "琴書堂"도 둘러보시고, 담장에 붙어 있는 돈나무의 아기자기함도...
강진 시장통의 짱뚱어 매운탕의 얼큰하다 못해 남도의 여인이 주는 情같은 강하면서도 맛있는 그 향취도 음미하면서..

애국애족하던 선각자의 행열과 같이, 일제 반항하던 우리의 시인도 찾아 보세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맞이하기 전에 떠난 님을 그리워하면서, 선생님과 함께 영랑의 생가를 그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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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5.03 11:50:11 *.57.36.34
써니님 각은 아직 세우지 못했어요. 하지만 옳은 것을 행하면서
이익을 얻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의 길을 따르려고
합니다.

영훈님 너무 잘 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지식경영법 한번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초아선생님 고돌이 잘 쳐요. 하지만 지금은 손끊었어요.
그리고 유월 김영랑생가를 다시한번 찾을께요.
그런데 언제 빛고을에 오실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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