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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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분히 힘들고 외로웠다. 누구와 함께하든 온전히 내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채 답답함은 점점 내 마음의 벽을 두텁게 보태갔다. ‘그들’ 또한 꼭 그 두께만큼 떨어져 내 안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빙빙 겉돌았다.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것 같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더욱더 많은 말을 했다. 그럴수록 공허함은 더했고, 웃고난 뒷맛은 씁쓸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른척 해 주었으면 더 좋을 일을 끄집어내어 나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다가 짜증이 나다가 그랬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마음은 동상처럼 딱딱히 굳어 가고 있었다.
정작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놔야 풀릴 것 같은 문제들 앞에서 눈물이 났다.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고, 그 사람에 의해 뒤틀린 내 속내가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나는 꿈꾸었다. 나는 끊임없이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 지쳐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외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다. 어느 누구와도 온전히 소통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다녔다. 끊임없이 혼자서 대화하는 법을 익히며 고립되기 위해 노력했다. 핸드폰을 잘 받지 않는 사람으로 공공연히 알려졌고, 매번 못 간다는 연락도 없이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같이 웃으며 놀다가도 쉽게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사람들과의 단절을 고하는 지점에서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반항 비슷한 일들을 저질러 놓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 애인을 만들어야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인맥을 동원하여 짝을 맺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런 나의 돌출 행동들이 전혀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았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언니가 소개팅을 시켜줄 수 없어 미안하다며 애인 없이도 스스로를 치유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할 한 사람을 찾기 보다는 다양한 관계 속에 놓일 것을 주문했다. 엉뚱하게도 그 주문 앞에서 온 마음과 마디마디의 힘 탁 풀려버렸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드러내고자 한 속내가 [관계 속의 버거움]이었음을. 잠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너무나 다양한 역할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온전히 나로 서 있지 못하고 항상 누군가의 무엇으로 존재했다. 너무도 촘촘하고 복잡해져버린 인간 관계 속에서 나는 힘들었다.
가끔 화를 내고 싶었고, 울고 싶었고, 멈추고 싶었고, 주저 앉고 싶었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욕망은 한번도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참았고, 웃었고, 계속 했고, 많은 말을 했다. 그것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내 안의 칭얼대는 어린 아이를 보듬을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들’만을 위한 내가 되었다. 보채다 지친 내 안의 아이는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 삐뚤어져버린 모습으로 터져나왔다. 어긋난 상태로 함께였던 나는 혼자 서 있는 방법을 몰랐다.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을 찾지 못했던 나는 모든 마음을 내려 놓는 순간에 무너졌다.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 외로웠다.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난 후부터 ‘그들’을 내 안으로 기꺼이 들여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의 아이는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풀어 놓고 싶을 때는 기꺼이 누군가를 찾아가 꺽꺽 울어댈 수 있는 마음도 나에게는 생겼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온전히 나로써 설 수 있을 때 ‘그들’ 앞에서의 역할 또한 잘 해 낼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해 지고 나면 다른 사람을 더 힘껏 끌어 안을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즐기고 빠져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언제까지나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라는걸 이젠 알겠다. 쓸쓸하다는 느낌이 반갑다.
IP *.6.39.21
정작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놔야 풀릴 것 같은 문제들 앞에서 눈물이 났다.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고, 그 사람에 의해 뒤틀린 내 속내가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나는 꿈꾸었다. 나는 끊임없이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 지쳐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외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다. 어느 누구와도 온전히 소통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다녔다. 끊임없이 혼자서 대화하는 법을 익히며 고립되기 위해 노력했다. 핸드폰을 잘 받지 않는 사람으로 공공연히 알려졌고, 매번 못 간다는 연락도 없이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같이 웃으며 놀다가도 쉽게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사람들과의 단절을 고하는 지점에서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반항 비슷한 일들을 저질러 놓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 애인을 만들어야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인맥을 동원하여 짝을 맺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런 나의 돌출 행동들이 전혀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았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언니가 소개팅을 시켜줄 수 없어 미안하다며 애인 없이도 스스로를 치유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할 한 사람을 찾기 보다는 다양한 관계 속에 놓일 것을 주문했다. 엉뚱하게도 그 주문 앞에서 온 마음과 마디마디의 힘 탁 풀려버렸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드러내고자 한 속내가 [관계 속의 버거움]이었음을. 잠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너무나 다양한 역할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온전히 나로 서 있지 못하고 항상 누군가의 무엇으로 존재했다. 너무도 촘촘하고 복잡해져버린 인간 관계 속에서 나는 힘들었다.
가끔 화를 내고 싶었고, 울고 싶었고, 멈추고 싶었고, 주저 앉고 싶었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욕망은 한번도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참았고, 웃었고, 계속 했고, 많은 말을 했다. 그것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내 안의 칭얼대는 어린 아이를 보듬을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들’만을 위한 내가 되었다. 보채다 지친 내 안의 아이는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 삐뚤어져버린 모습으로 터져나왔다. 어긋난 상태로 함께였던 나는 혼자 서 있는 방법을 몰랐다.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을 찾지 못했던 나는 모든 마음을 내려 놓는 순간에 무너졌다.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 외로웠다.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난 후부터 ‘그들’을 내 안으로 기꺼이 들여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의 아이는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풀어 놓고 싶을 때는 기꺼이 누군가를 찾아가 꺽꺽 울어댈 수 있는 마음도 나에게는 생겼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온전히 나로써 설 수 있을 때 ‘그들’ 앞에서의 역할 또한 잘 해 낼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해 지고 나면 다른 사람을 더 힘껏 끌어 안을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즐기고 빠져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언제까지나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라는걸 이젠 알겠다. 쓸쓸하다는 느낌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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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고 난 후가 아주 달랐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그는 아주 난폭하고 교만하여 심지어 자기를 따르라고하며 자신을 신적(인간적인가?- 인간이기에...)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부터는 말씀에 순명하고 일생을 헌신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롯이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깨우치는 시기와 꽃을 피운는 시기가 다 다를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서 배우러 모였고 그가 비로서 자신의 길을 갈때 박수를 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오는 오늘 당신의 글이 정겹습니다. 사랑해요. ^-^

부지깽이
그날, 네가 없어서 섭섭했다. 아마 재동이 몇개의 사진을 올릴 지 모르겠다. 그러면 보아라. 승완이 남해에서 떼고 난 다음에, 눈물이 더 많아 진 것 같다. 네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 뱅곤이는 끝날 때 쯤 오더니 노래 부터 한곡 했다. 영혈남아 오옥균이 멀리 포항에서 올라 왔다. 요한은 더 예뻐지고, 자로는 말이 앞만 보도록 하기 위해 달아주는 옆가리개 같은 검은테 안경을 쓰고 왔다. 재동이 풀륫 솜씨는 일취월장하는구나. 세나는 무지 바뻐서 그런지 눈이 좀 부어 있었다. 그날 또 다른 미영이는 아주 예뻤다. 기분이 아주 좋다 했다. 다음에는 빠지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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