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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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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9일 02시 16분 등록
지난 주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증도’에 다녀 왔다. 드라마(고맙습니다)를 촬영한 곳이라는데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가고 있는 곳에 대해 잘 살피지 못했다. 한참 바쁜 사이에 정신 없이 출발한 여행이었지만,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설레여 기꺼이 따라 나선 여행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시간조차 쉬었다 갈’ 만큼 멋진 곳이었다. 섬의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부분에 해안선을 따라 지어진 이 리조트는 모든 방에서 바다가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거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백사장은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모래가 노랗다 하얗다 보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각종 인테리어와 창 밖 풍경을 살폈고, 작은 공간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는 사소한 사실에 감탄했다.
이것저것 빠르게 살펴 놓고 각자 제 취향에 맞는 음식을 펼치고 저녁인지 점심인지 모를 무언가를 시작했다. 와인과 소주와 복분자가 어우러져 애매모호한 맛을 내긴 했지만 분명 파티였다. 충분히 즐거웠으니. 우리의 여행은 늘 이런 식으로 신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딱 회 네 접시를 해치웠다. 뽈록한 배를 두드리며 앉아있자니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의 파도소리가 마루까지 쳐들어왔다. 반복적으로 밀려드는 파도에 우리는 엉덩이가 들썩였다.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나가자 했고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들고 바닷가로 들어 섰다.

멀리서 보았을 땐 아주 고운 모래 백사장으로만 보였는데 가까이 가 보니 고운 모래를 사이에 두고 바다 가까이와 숙소 가까이에는 검고 거친 모래가 있었다. 신발을 벗고 모래알을 발가락 사이에 끼워 넣으며 걸었다. 모래알을 느끼고 싶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가끔 후벼 파기도 하고 괜히 모래를 발등 위에 얹어 하늘 높이 올려 보기도 했다. 좋아 어쩔 줄 모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바다 쪽을 보니 파도에 발을 담그고 싶어졌다. 몇 초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들어오고 나갔다. 아직은 바다에 들어서기에는 좀 이른 날씨였고, 나온 다음에 다시 모래밭으로 돌아오면 발에 너무 많은 모래가 붙을 것 같았다. 운동화를 신고 온 게 낭패였다. 파도는 어서 들어오라고 자꾸 손짓하고, 여기까지밖에 마중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내가 있는 고운 모래밭에 닿기 전 검은 모래 밭에서 모두 부서져 사라졌다. 검은 모래밭을 건너 그 물 속으로 들어서는 것. 그게 그 순간 내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모래와 바다 사이를 두어번 번갈아 보는 새에 선생님은 이미 물 속으로 들어서 있었다. 나도 씩씩한 걸음으로 용기를 내 보았다. 검은 모래를 건너 파도가 부서지는 지점으로 들어섰다. 좋았다. 5월의 바다는 의외로 따뜻했다. 파도와 부딪히는 순간에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알싸함이 좋았다. 부서진 파도가 내 발의 모래를 쓸어내려 갈 때는 간지럽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파도에 발을 담근 채 소주 한잔. 캬!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즐거웠고 편안해 졌다.

내가 파도 소리에 이끌려 바다에 들어서는 것이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자국 내딛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 꿈은 주기적으로 나에게 꿈을 향해 다가오라는 소리를 보냈다. 파도소리를 보낸다. 하지만 나는 고운 모래밭에 두 발을 꼿꼿이 꽂은 채 망설이기만 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핑계로, 다시 돌아올 현실이 두려워 쉬이 꿈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내 발로 바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알았다. 파도가 밀려드는 지점까지 내 발로 들어서지 않으면 아무리 꿈이 손짓을 해도 나는 꿈 속으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발을 담그지 않은 채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맛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들어서지 않으면 파도는 밀려들었다가 다시 돌아서고 그때 내 꿈은 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자연에 힘에 의해, 그리고 현실에 우뚝 선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두 발에 의해 바다는 나에게서 또 멀어져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선생님을 보고 내가 어렵지 않게 용기를 내었던 것처럼 그 꿈으로 들어서는 것은 누군가 그 꿈을 먼저 이루고 있을 때, 나는 훨씬 쉽게 한발을 내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그렇게 용기가 필요할 만큼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백사장으로 들어서니 꼭 내가 들어갔던 깊이만큼, 종아리까지 차 오른 깊이 모양으로 많은 모래가 붙었다. 꿈에 젖었던 만큼, 꼭 그자리 만큼만 현실도 나에게 착 달라붙었다 생각 하니 피식 웃음이 나 버렸다.

잠이 들기 전 잠깐 베란다에 나와 앉았다.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꾸만 내 꿈이 부르는 소리 같다. 20년을 넘게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파도소리의 재발견이었다. 수없이 밀려들었다 나가는 파도만큼 내 마음에도 많은 소망과 희망사항들이 들락날락 거리느라 분주하다. 내 마음을 건드는 것을 향해 내가 움직이지 않는 한 그것들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꿈을 향해 들어서는게 잠시라도 망설여 질때마다 바다로 나서야겠다. 바다의 끝에 내 꿈을 얹어놓고 그 곳까지 내 발로 들어서는 연습을 해야겠다. 발목을 적시는 용기를 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두 팔로 힘껏 휘저어 꿈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겠다.

내 꿈을 맛보기 위해서는 내 두발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파도가 부서지고 다시 밀려나가도 나는 바다에 서 있게 되는 지점까지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물이 차 오르도록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아직 거품이 되지 않은 파도를 타고 자연스럽게 하늘과 가까워졌다 다시 내려 앉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점까지. 엎드려도 손이 바다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어 진 다음 나는 너른 바다 속을 맘껏 날아다닐 수 있다. 파도를 타고 더 깊은 바다 속 꿈을 향해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언제고 파도가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면,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설 수 있는 큰 힘을 안고 돌아왔다. 훌륭한 여행이었다.


* 잘 쓰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서 마지막에 뒤죽박죽 힘이 빠져버렸다. ㅠ

IP *.6.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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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5.29 06:07:04 *.128.229.230
어두워져가는 모래밭에 앉아 그날 유난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미영이 파도 앞 서있는 뒷 모습을 보고 있었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 꿈에 적신 만큼의 현실이 주어지지. 그날 종아리의 모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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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5.29 08:55:35 *.209.119.254
정말 모래알의 비유가 탁월하군요! 파도소리와 복분자와 노래가 함께 한 바닷가에서, 내 인생의 명장면을 하나 추가했지요.

2기 도명수님의 넉넉한 마음씀 덕분에, 호강했습니다. 돈과 감각과 뱃포를 모두 지닌듯한 오너의 고급리조트에서 지내며, 우리 모두 두고온 소중한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였지요.

경빈씨, 사진 좀 올려주지요? 단 내 얼큰이 사진은 빼고! ^^
몇 달 치 비상금을 축낸 명수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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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7.05.29 09:36:08 *.183.177.20
깡미는 마냥 실실거리고 깡총거리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선 언제나 이런 깊은 생각들이 돌아다닌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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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5.29 09:53:51 *.57.36.34
선생님을 비롯한 2기 연구원 고생하셨습니다.

항상 가슴에 꿈을 품은 미영이를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보다 나은 현실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언젠가 선생님이 꿈꿔온 연구소가
그같은 장소에 세워지기를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정말 의미있고 반가웠고 즐거웠던 추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음 만날때까지 모두 건승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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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
2007.05.29 13:16:53 *.200.97.235
에궁, 부러운 글이 올라왔네요. 이번엔 꼭 가리라고 다짐했건만 또 여의치 않았습니다. 사진좀 올려주세요.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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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7.05.29 17:05:27 *.244.218.8
언니가 여행내내 신나서 방방 뛰어다닌다 했어 ㅋ

즐거웠어요. 벌써 여름을 체험하고 온 기분이에요.
여전히 즐거우신 도선생님,
여전히 생각많고 아름다운 귀자,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ㅋ 상큼한 미영언니,
나날이 미소가 아름다워지시는 한선생님,
우리의 카수~ 착한 경빈오빠.
이틀동안 사부님 사부님 하도 불러대서 월요일까지 입에 붙어 있던
우리의 사부님까지.

아주 즐거웠어요. 또 봐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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