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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7일 09시 55분 등록
송광사(松廣寺)를 찾아서

모처럼 주말 용인에 있는 가정을 뒤로하고 사찰하나를 찾았다. 물론 주중에 가족을 찾았고 허락을 받은 후였다. 년 중 계획상 이름난 절을 찾기로 하였는데 마침 전남에는 한국의 삼보사찰(三寶寺刹 :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 순천의 송광사) 가운데 하나인 송광사가 위치해 있었다. 장마 속 비는 멎고 고단한 심신을 달랠 겸 풍광 좋은 절을 한 번 찾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빛고을 광주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약 60여㎞를 달리니 송광사 IC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지명을 따 IC를 만들지만 워낙 유명한 절이다보니 IC자체가 송광사다. 이 곳을 나와 전남 보성 쪽으로 10여㎞쯤 들어가니 좌측에 송광사 출입구가 나타난다.

송광사!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종찰(僧寶宗刹)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양산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모셔왔다는 석가모니의 정골사리와 금란사라가 봉안되어 있다하여 불보종찰(佛寶宗刹)로 일컬어지고, 합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보장되어 있어 법보종찰(法寶宗刹)로 알려진 반면 승보종찰은 조선 초기까지 국사(國師)만 16명을 배출한 데서 이름 지어졌다 한다. 우선 사찰 규모가 대단해 보였다. 건물만 50여동에 이르렀다. 누가 이 같은 절을 지었을까? 송광사의 역사적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송광사지(松廣寺誌)》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당시 사찰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수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했다고 전한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명종(明宗) 27년(119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되었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때까지는 송광산이라 했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장(中興道場)이 되고부터 산 이름도 조계산이라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종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순․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 후 승려 취봉(翠峰)·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國師殿:국보 56)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90), 경질(經帙:보물 134), 경패(經牌:보물 175),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204),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鈔)》(보물 207), 하사당(下舍堂:보물 263), 약사전(藥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보물 572)가 있으며,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란다.

둘째로 보조국사 지눌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말이 제일 설득력 있어 보인다. 소나무가 널리 펴져 있는 울창한 송광산(지금은 조계산으로 바뀜)에 자리 잡은 절이 송광사다.

이 곳에 도착하니 우선 시원한 출입구가 마음에 든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 위에 세워진 누각[이름이 청량각(淸涼閣)으로 되어있음]이 들어오는 손님을 반긴다. 조금 올라가니 송광사 출입문이 보인다. 일주문이었다. 이 출입문을 지나 임경당에 들어설 쯤 우측 개울가에 송광사 우화각(羽化閣)이 보인다. 글자 그대로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는 의미의 우화각은 경내에 들어서기 전 항상 사뿐한 기분이 들게 한다. 우화각의 잔상을 뒤로하고 임경당을 지나면 양쪽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자리하고 있었다. 늘 사찰에 들리면 마치 위압적인 자세로 모든 악귀를 제압할 양 육중한 몸으로 서있는 왕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사천왕이다. 원래 인도의 신들로 부처님께 귀의한 분이 이들이며,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의 주신(主神)인 네 명의 외호신들을 말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 손에 검(劍), 선악에 대한 복과 벌을 주며, 국토를 수호해준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 손에 용(龍)과 여의주(如意珠), 만물을 소생시켜준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 손에 탑(塔)과 창(創),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유발한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 손에 비파(琵琶), 어둠속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사천왕상을 지나 경내에 진입하니 중앙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는 눈부신 보살들이 좌정하고 있었고 신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실 무릎 꿇고 앉아 절을 하고 있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불도(佛道)에 문외한이라 어찌할지를 몰랐지만 잠시 다리를 내려놓고 명상에 잠겼다. 불교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영감과 역할을 하였을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이 불교와는 꽤나 인연이 깊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전래된 불교가 고려에서는 국교(國敎)로서 호국불교의 역할을 수행했고, 비록 조선에서 쇠퇴했지만 여전히 민초의 가슴속에 자리 잡아 나라가 외란(外亂)으로 어려울 때마다 분연히 일어났던 종교가 불교였다.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불교는 아직도 우리 민중의 가슴 속에 아련히 새겨있다. 종교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나라로 수많은 종교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서 있지만 불교가 아직도 많은 신도를 가진 것은 불교가 주는 마음의 안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승들의 움직임도 생동감이 있어 보였고, 불심(佛心)을 널리 유포하기 위한 행사일정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대웅보전을 나와 우측에 있는 국사전(國師殿)에 들리니 이 절이 왜 승보종찰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 국사전에는 이 절이 배출한 16국사를 봉안한 곳이다. 표정이나 자세가 모두 달랐지만 조형에서 우러나오는 국사의 범상치 않은 모습이 필부를 압도했다. 다음으로는 조그만 보살로 가득한 승보전을 들러보았고, 그 뒤 관음전에 이르니 한 스님이 들어오라 청한다. 그는 찌든 세태를 벗어던지려는 듯 얼굴표정이 매우 엄숙했다. 아마 여기 온지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속세의 덧없음을 깊이 인식한 것인가. 아니면 불심(佛心)을 통해 깊은 깨우침을 얻으려는 것인가. 들어오라는 제의가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했다.

관음전을 돌아 뒤로 가니 계단이 하나 보인다. 바로 보조국사 지눌을 기리기 위한 감로탑(甘露塔) 이 있는 곳이다. 30계단을 오르니 조그만 탑이 하나 있었는데 일반적인 탑이 아니라 보조국사의 사리탑이라 한다. 원형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었지만 원래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 여러 번 이동했다고 한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송광사 대부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송광사는 건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50동에 가까운 건물이 있다보니 ‘예로부터 비를 맞지 않고 다니기로 유명한’절이었다고 한다. 사리탑에 내려와 약사전, 영산전 등을 둘러보고, 불이문(不二門)에 다다르니 외인출입금지란다. 사실 송광사는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외지인이 볼 수 있는 건물은 한정되어 있었다. 모두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가능한 모두를 둘러보고 약수터에서 물 한잔을 머금고 발을 뒤로했다.

아직도 주변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역사적으로도 외적의 침입으로 보존이 어려웠고 특히 6.25동란 때도 사찰의 일부가 불타는 등 수난이 적지 않았지만 꾸준히 복원사업을 벌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국내 3대사찰을 위용을 유지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여름수련법회를 갖고 불교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으며 특히 사찰내 보통 눈에 보이는 탑이 없다는 점이 특이했다. 송광사 입구에서 얻은 작은 종이위에 이렇게 씌어있어 눈길을 끈다.

걸림없이 살 줄 알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편안과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말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님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글귀다. 불교의 한 종파인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선수행(禪修行)의 도장이라 하여 조계총림이라 불리는 송광사. 그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각박히 돌아가는 세속을 아우르고 민중의 애환을 끌어안으며 모든 거칠고 척박한 토양을 정화하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리 역할을 하고 있는 송광사에 대한 여정은 불교와 불도를 모르는 나에게 있어 삶에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어떤 절을 찾을까.
IP *.57.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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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27 13:19:35 *.75.15.205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는 송광사의 작은 절/ 암자가 되는 건가요?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 손에 비파(琵琶), 어둠속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그랬군요. 비파를 든 사천왕상도 있었군요, 어쩐지 남달리 느껴지네요.
글쟁이들과 잘 어울릴 법 하기도 하고요.

요즘 글쓰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선배님의 꾸준한 남도기행과 멈추지 않는 열정과 자신과의 약속/신념을 굳건히 행하심이 마냥 부러울 따름입니다. 경험이나 조언 한 말씀 나누어 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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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6.27 14:11:59 *.253.249.69
곡원장!
참 좋은 기행문을 읽었습니다. 현재에는 수입된 서적 별로 감명 깊진 않해도 세계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읽지는 아니해도 사놓고 교만을 떠는 허구가 판치는 세상에 불교를 모른다 하면서 잘 안다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불교철학을 펼치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첫머리의 글부터 끝까지 군더덕이 없고 잔잔하면서 감명을 주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곡원장 변산에 있는 내소사를 가을이 되거 든 찾으십시요. 은근한 단풍과 작으면서도 아름다운 사찰과 풍광이 그리고 곁에 있는 '곰소'에서 식사를 하고 좋아 하시거든 젓갈도 시시구려...
그러나 체석강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면 헤어진다고들하니 조심하시구려.
좋은 글 잘읽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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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6.27 18:01:41 *.57.36.18
써니님 잘도 수행하시면서 무슨 내숭은..

아직도 숙제를 열심히 할 뿐인데 조언은 무슨 조언
굳이 한다면 첫째 나를 신뢰하라. 둘째 정념을 행하라
셋째 결과를 믿어라 정도라할까요.

저는 나를 가장 신뢰합니다. 믿음만큼 나를 강건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써니님 써니님을 가장 사랑하세요. 그리고 믿으세요
황홀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초아 선생님 오랜만에 글 뵈니 반갑습니다.
그동안 어디 다녀오셨어요.

명승지, 절, 산 등을 보면서 또다른 인생을 배우려합니다.
하지만 업무로 인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천천히라도 좋은 곳을 찾으려합니다.

무더위와 장마에 건강 조심하시고
이곳이 정리되면 한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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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2007.06.29 13:54:30 *.248.117.3
명수형, 오랜만이야, 반갑다.
아주 평온해보여.
다음에 만나면 도인 다 돼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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