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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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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4일 00시 35분 등록

오늘도 열심히 눈팅중에 이런 글을 하나 건졌습니다. 참교육에 관심있는 모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예전에 잠깐 소개했던 김동렬님의 글입니다)

교육(education)의 어원을 풀어보면 겉(e-)으로 당겨(-duca)서 끌어낸다는 뜻이 있다. 감추어진 재능과 소질을 당겨서 ‘끌어내는’ 것이다. 관련된 말은 앞(pro-)에서 끌어주는 프로듀서(producer), 사물에서 숨은 가치를 끌어내는 생산(production),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이를 뒤(de-)로 끌어당겨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는 연역법(deduction), 안(in-)으로 끌어들이는 설득하다(induce)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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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아마를 단련시켜 프로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되 장비를 갖추고 오르느냐 아니면 아무런 준비 없이 맨손으로 기어오르느냐의 차이와 같다.

정상을 꿈꾼다면 반드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은 장비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눈에 보이는 장비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라는 보이지 않는 장비도 구비되어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이 베테랑은 반드시 장비를 쓴다. 교과서로 전달되는 하드웨어 장비는 아마추어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성교육으로 전해지는 소프트웨어 장비는 베테랑만이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교육계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아마추어와 풋내기에게는 없고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프로페셔널과 베테랑들만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장비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다.

미술을 배운다면 연필로 긋고 붓으로 칠하는 기교보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의 구상단계에서부터 그림을 완성하고 난 다음 학부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단계까지 1 사이클로 이루어지는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만 해서는 같은 길을 백번 갔어도 막상 핸들을 잡으면 길을 찾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내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면 길치가 아닌 이상 한 번 가본 곳은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체험이 중요하다.

전체과정을 체험한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와 체험한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그 ‘이야기’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면 교육은 실패다.

동기유발≫과제실행≫결과보상으로 이어지는 1 사이클 진행의 전체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엄마 앞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두 번째의 과제실행뿐이다.

동기유발과 결과보상은 평가가 불능이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참된 교육이 그것이다. 평가가 가능한 부분만 수업하는 기술교육에서 벗어나 평가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훈련하는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인교육을 위해서는 장비가 필요하다. 장비는 교과서처럼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다. 체험과 노하우 또한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과서 위주의 하드웨어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문제는 창의력이라는 소프트웨어다. 경험부족에다 노하우 빈곤이다. 인간의 창의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 번도 선두에 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베테랑과 풋내기의 차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되는가? 내 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추어 있는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에서 발견된다.

어디서 주워들은 ‘카더라’ 말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프로는 누구나 그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베테랑들은 다들 그 ‘이야기’라는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 베테랑은 그 연장을 쓴다.

자유방임이든 스파르타식이든 유행하는 교육방법들은 그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책이나 교보재로 이루어진 하드웨어를 판매할 뿐 체험과 노하우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있는데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앞에 털어놓을 것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요하게 말하려고만 드는 아이가 제대로 배운 아이다.

‘동기유발≫과제실행≫결과보상’이라는 전체과정이 없으면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배운 것을 말한다는 것은 곧 소통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모든 분야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이다. 교육은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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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예는 없다고 한다. 왜일까? 한 국가의 운명이 그 집단 전체의 집단지능의 질적 수준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인류전체의 집단지능의 계발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침략을 당한 나라도, 식민지를 얻은 나라도,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도 어떻게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의 접속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성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교육의 최종목표는 인류 전체의 집단지능과의 접속에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다. 한 사람의 지식이 전체 인류문명의 일부로 기능할 때 유의미하다.

기존에 알려진 교육사상들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전히 계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없는 교육은 실패다. 내 머리 속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미술수업을 받아 실력이 늘었다 해도 그 실력이란 것은 손가락이라는 하드웨어를 운용하는 장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싶어 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소통의 한 단위가 되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욕망을 일으켜야 하고 성과를 달성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한다. 욕망과 성과와 보상이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요건을 구성한다. 그 이야기를 획득할 때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소통한다.

참된 교육은 과제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타인의 마음과 공명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기를 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말듯이 모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은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하여 길을 기억하려 함과 같다. 알기는 아는데 아는 것을 한 줄에 꿰어내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구성하지 못한다. 혼자 알 뿐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지 못한다. 소통하지 못한다.

듀이에서 몬테소리, 로웬펠드로 이어지는 교육계의 경향도 실제로는 교육포기이기 쉽다. 듀이 이래 유행하고 있는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은 환경을 조성하고 자극을 가하면 저절로 된다는 식이다. 교육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교육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비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친구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문명과의 접속은 실패다.

스승이 없고 친구가 없는 교육은 실패다. 인류의 집단지능과의 동조화하지 못하므로 실패다. 혼자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모든 교육학자가 자발성을 강조하지만 일 사이클의 완성을 통한 전체과정의 체험이라는 연장이 없으면 자발성은 유도되지 않는다. 자연의 진리에 기초한 완성형의 재현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면 연장은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진리≫완성형의 포착≫모방을 통한 재현≫전체과정의 체험≫이야기의 획득을 거쳐서 교육의 성과는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한다. 자연의 진리로부터 완성된 패턴을 끌어내는 과정을 제공하지 않으면 자발성 유도는 실패다.

교육(education)은 감추어진 것을 밖(e-)으로 끌어내는(-duca)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서 그것을 끌어내는 데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연역의 장비다. 연역하기 위해서는 일반명제의 전제가 필요하다.

일반명제는 자연의 완전성이다. 참된 교육은 자연과 접촉하고 자연에서 뒹구르며 그 자연의 완성된 모습 안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서 얻어진다. 자연의 이야기와 동조화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평범한 하나의 돌멩이,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부는 바람, 누워있는 흙들도 다들 자기 내부에 이야기를 하나씩 감추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는 ‘결’이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질 때 자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자발성과 창의성은 교실에 가둬놓지 않고 막연히 들판에 풀어놓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완성된 모델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 의해 포착되고 그로부터 유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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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끌어내는 데는 장비가 소용된다. 그 장비는 ‘이야기’라는 장비다. 자연의 완전성과의 소통을 통해 나의 내부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창의력에 주목하는 교육이론가들 많으나, 교육이 끌어내는 것이며, 끌어내야 할 것은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사전에 세팅하고 장착해야 하는 장비라는 사실을 모른다. 듀이이래 실용주의 한계이다.

합리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경험하다 보면 우연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식이다.

우연히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도 있다. 직관력이 뛰어난 아이는 자연에서 뒹구르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패턴을 읽어내고 이를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는 방임할 경우 저절로 PC방에 가두어져 버린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어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하고 갖가지 장난감을 던져주고 자유방임하면 우연히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는 추측은 어리석다. 교육은 우연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 엄격한 지도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대부분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자연은 감옥이다. 저절로 갇혀버린다. 시골의 단조로움 속에 갇혀버린다. 자연의 완전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대부분 도시 어린이들에게 있어 도시는 감옥이다. 저절로 게임방에 갇혀버린다.

진정한 교육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이야기의 획득이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을 거쳐 결과보상으로 진행되는 전체과정을 체험하는 데서 이야기는 얻어진다. 자연의 완전성과 교감함에 의해 그 전체과정은 체득된다.

자연의 완성된 모습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이를 모방하고 재현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유도해낸다. 나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체과정을 체험함에 의해 결(나이테)을 품듯이 전체과정을 체험하고서야 내 안에 결을 품는다.

그렇게 유도해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함에서 동기가 유발되고 집단지능과의 접속에서 성과가 보상되는 것이다. 이로서 완전해진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으며 그 리듬감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하게 될 때 인간은 전율한다. 긴장한다. 고조된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공명시킬 때 이완된다. 편안해진다. 보상된다.

인간의 행동은 긴장으로 촉발되고 이완으로 보상된다. 긴장이 동기유발이면 릴렉스가 결과보상이다.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긴장이면 친구와 마주앉아 차 한 잔을 나눌 때처럼 편안하게 이완되는 것이 릴렉스다.

그 긴장의 시작지점과 이완의 종결지점이 다시 만나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이야기는 성립한다. 비로소 일 사이클은 완성된다. 완전히 정신 차릴 수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릴렉스할 수 있다면 곧 깨달음의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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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장비의 획득이다. 장비는 자연과 인간과 문명을 연결한다. 접속을 위한 모뎀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만남의 기쁨으로 벅차오른 만큼 릴렉스의 편안함으로 가라앉히기가 ‘이야기’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장비다. 소프트웨어 장비는 일 사이클 전체과정에의 참여에 의해서만 세팅된다. 묻지마식 자유방임은 극소수의 재능 있는 천재를 우연히 찾아낼 뿐 전체적으로는 교육포기다.

한 명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다수의 범인이 세팅해 놓은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장비가 그 한 명의 천재가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천재는 그 천재가 속한 그룹의 집단지능이 생산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장비운용 능력이다. 자연의 완전성이 있고 이로부터 유도되어 문명의 진보가 있으며 교육은 그 사이를 연결하는 모뎀이다. 자연에서 유도해낸 성과물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으로 전송하여 보내기다.

참된 교육은 큰 집을 짓듯이 일 층부터 차례로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강변에서 모래로 까치집을 짓듯 단순한 단계에서 먼저 전체를 완성하고 난 다음 그 완성된 모델에 밀도를 높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초등교육에서 중등, 고등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1층 위에 2층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본형의 틀 내부에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밀도를 채워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이야기의 완성된 경지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완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 유도한 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문명으로 전송하는 본질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 집단지능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어학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유아 수준의 낮은 단계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전체과정을 완성하지 않은 채 알파벳과 단어학습의 높은 단계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1백 단어 안팎의 낮은 단계에서 결이 완성되어야 한다.

알파벳에서 단어≫문장≫문법 순으로 단순한 단계에서 복잡한 단계로 진행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야 한다. 교육은 하나씩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일이 없다. 자연에서는 작은 하나의 씨앗 속에 배아형태로 이미 미래의 완성형이 들어있다. 씨앗 속에 완성된 나무의 모습이 있다. 유전자 속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방법은 완성된 배아에 수분과 당분을 집어넣어 크기를 부풀려 겉으로 드러내기다. 어학교육도 이와 같아야 한다. 1백단어 만으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아기는 단어보다 문법을 먼저 배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익힌 다음 문장과 단어를 그 문법의 틀 속에 집어넣어 밀도를 높인다. 아기가 비록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했어도 맥락으로 보면 이미 문법이 포함된 문장을 말한 것이다.

자연에서는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아기의 언어학습도 전체가 먼저다. 그 전체는 물론 유치한 수준이다. 그러나 ‘엄마’ 한 마디로 타인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이미 문법은 완성되어 있다.

자연은 언제라도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으로 드러난다. 완성이 먼저다. 일반명제가 먼저다. 전체가 먼저다.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운다. 형식을 완성한 다음 밀도를 높여간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먼저고 소통이 먼저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면 교육은 실패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과 리듬감을 읽는 능력이 없다면 원초적으로 실패다.

인간의 그릇 크기는 애초에 그 지점에서 정해져 버린다. 작은 그릇에 고등교육으로 밀도를 높인들 한계가 있다. 원초적으로 큰 그릇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내 안에서 재현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이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접속을 유지하고 문명과의 접속을 유지하고 널리 세상과 소통하는 큰 그릇을 완성한 다음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고등교육으로 그 그릇의 내부에 단계적으로 밀도를 채워넣기다.

그림을 그려도 그렇다. 먼저 투박하게 스케치를 완성한 다음 세부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다. 음악을 연주해도 그렇다. 먼저 하나의 프레이즈를 완성한 다음 그 프레이즈를 도구로 삼아 가능한 모든 음역에 도전하여 고루 탐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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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14 05:04:01 *.72.153.12
교육과 자연과의 연결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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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희
2007.07.14 12:25:54 *.163.91.225
하나의 글이 맘으로 들어와 소통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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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7.07.16 11:19:52 *.96.167.193
교육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비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친구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문명과의 접속은 실패다.

스승이 없고 친구가 없는 교육은 실패다. 인류의 집단지능과의 동조화하지 못하므로 실패다. 혼자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대부분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자연은 감옥이다. 저절로 갇혀버린다. 시골의 단조로움 속에 갇혀버린다. 자연의 완전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대부분 도시 어린이들에게 있어 도시는 감옥이다. 저절로 게임방에 갇혀버린다

그밖에 몇군데 더 밑줄을 긋습니다.

제 관심이 "교육"에 가서 꽂힐거란 생각은 예전에 미처 못했는데
삶이란 참 알 수 없네요.

어디서 보다 심화된 글을 읽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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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7.16 18:31:42 *.140.145.80
김나경님.. 이 글을 쓰신 김동렬님은 대단히 통찰력이 뛰어난 분인데 기본적으로 정치컬럼사이트 서프라이즈 대표필진으로 정치관련 글을 주로 쓰고 계십니다.

이분외에도 교육관련 고수들이 이 사이트에는 많습니다. 일단 사이트(www.seoprise.com)에 방문하셔서 필명 시골훈장, 테디베어, 신선생 등으로 검색하시면 교육과 관련된 이분들의 주옥같은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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