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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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서천의 해양박물관에 갔을 때 일이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을 전시해놓은 곳이 있었다. 이름을 기억할수는 없지만, 그 곳에 적혀있는 물고기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그만 실소를 떠뜨린 일이 있다.
“성격이 온순하고 집단생활을 좋아하여 늘 모여다닌다.”와
“성격이 흉포하고 공격적이며 주로 혼자 생활한다.” 는 설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독 작은 물고기들이었다. 작은 어항에서도 작게 느껴지는데, 망망대해에 풀어놓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물들에게 그처럼 다른 ‘성깔’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개처럼 대표적인 애완동물에도 유독 ‘성깔’있는 놈이 있다. 전에 내가 키우던 개는 제가 낳은 새끼들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새끼들이 밖에 나올 때가 되었는데 통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개집을 들여다보니, 운동부족으로 돼지처럼 살찐 강아지들을 어미가 통제하고 있었다. 서너마리나 되는 강아지를 다 키울 수가 없어 한 마리만 남기고 이웃에게 준 다음날 아침, 어미개가 하나 남은 새끼를 물어죽여 피가 흥건했다. 어미개의 집요함과 붉은 피가 섬찟해서 조금 울었던 기억이 난다.
꽃과 식물에게도 ‘성깔’이 있다. 염천을 능멸하며 피어난다는 능소화나 동백은 만개한 상태에서 뚝뚝 떨어져 제 붉은 마음을 증명한다. 반면에 장미는 시들다못해 시커멓게 짓이겨질 때까지도 가지에 붙어있다. 그럴 때의 장미를 보면, 젊은 날의 영화를 잊지못하여 나이들수록 히스테릭해지는 은퇴한 여배우를 보는 것같다. 능소화나 동백이 화려한 절정에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제 열정과 절개를 확인한다면, 장미의 몰락은 한 때의 미모마저 격하시킨다.
덩굴식물과 담쟁이의 집요함은 무서울 정도이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딪치는 것마다 덩굴로 감싸 포획해버리거나, 벽을 타고넘어 스스로 벽이 되는 담쟁이는 말그대로 의지의 표상이다.
당연히 사람에게도 제각기 다른 성격이 있다. 그런데 살아보니 사람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성격’이라기 보다 ‘성깔’이 아닌가 한다. MBTI를 예로 들자면 외향, 내향, 감각, 직관, 사고, 감정... 같은 개념은 이상적인 분석의 틀이다. 특수한 개인에게서는 각 요소의 배합이 다르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같은 유형이라고 해도, 그 정도와 종합적인 분위기, 특히 성깔과 의지력 같은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향기는 모두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깔’은 말하자면 나다움을 고수하려는 자존심이자, 마음먹은바를 관철하려는 의지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펼쳐보려는 실천력과, 실패의 경험을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투지가 나온다. 자칫 까칠해 보이는 ‘성깔’이 없이는 인생이 정말 까칠해질수도 있다.
바로 내가 그렇다. 어려서부터 욕심이 없고 늘 뒷전에서 빙빙 돌았던 기억이다. 공부에 죽어라 하고 열의를 내지 않아도 평균점수는 나왔으며, 시험보고 나면 꼭 교무실 가서 울고불고 하는 애들을 흉보았다. 작은 일에 파랗게 낯색이 변해서 따지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축이었다. 또 나는 사람, 돈, 명예... 아무 것에도 욕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적지않은 나이가 되었어도 없는 성깔이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만의 추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 더욱더 나를 비현실적이게 한다. 단지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 달라졌다면 ‘연령주의’에 대한 반발이 생겼다. 아무도 중년에는 도전하고 성취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 풍토를 본다. 그렇다면? 하는 오기가 생긴다. 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중년에 대한 각성이 없는 성깔을 드러나게 해주었다.
나쁘지 않다. 이제 어지간한 경험으로 하여 사고와 태도가 유연해졌다. 굳이 목에 핏대세우고 나다움을 증명하지 않아도, 의연하게 나로서 살아가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자신감과 유연함은 결코 젊은 날에는 가질 수 없던 것들이다. 여기에 역시 연륜으로 해서 더욱 은근해지고 끈질겨진 ‘성깔’이 가세한다면, 나의 남은 시간을 의미로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 성깔이여, 이제라도 모습을 드러내주어 고맙고 반갑다. ‘성깔’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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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물고기의 '성깔'에 대한 얘기는 정말 웃음을 자아냅니다^^ 실은 저도 예전에 '말티즈'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얘기 성깔이 정말 보통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윗집에 있는 '말티즈'는 같은 종인데도 어찌나 얌전하고 귀태가 나던지요 ㅎㅎ
저는 나이들면서 '덜 흥분하고 덜 노여워하기, 또는 무던해지기'를 연습중입니다. 명석님과 달리 본래 태성이 '잘 웃고, 잘 감동하고, 잘 흥분하고, 화나면 심하게 화나는' 성깔이라(ㅎㅎ) 기분이 좋을 때는 좋지만, 기분이 안좋을 때는 정말 별로거든요. 아마도 저의 사고와 태도가 유연해지려면 명석님처럼 '어지간한 경험'을 더 많이 해야할 것 같습니다. ^^
저는 나이들면서 '덜 흥분하고 덜 노여워하기, 또는 무던해지기'를 연습중입니다. 명석님과 달리 본래 태성이 '잘 웃고, 잘 감동하고, 잘 흥분하고, 화나면 심하게 화나는' 성깔이라(ㅎㅎ) 기분이 좋을 때는 좋지만, 기분이 안좋을 때는 정말 별로거든요. 아마도 저의 사고와 태도가 유연해지려면 명석님처럼 '어지간한 경험'을 더 많이 해야할 것 같습니다. ^^

명석
할리님. 기꺼이 즐길 수 있으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달랑 글쓰기 하나인 것이 서운해서, 스케치연습에 들어갔습니다. 아주 단순한 선으로 인물의 특징을 잡아내는 캐리커처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할리님은 직감상 ^^ 살사가 어울릴 것같은데 어떠세요? ㅎㅎ
비장의 무기가 있으면 털어놓고,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네요.
앨리스님, 지나놓고 보니 그 '어지간한 경험'이 모조리 내 인생이었더라구요. 인생의 매 장면에서 나름대로 골치아프게 살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인생 전체를 놓고 보는 큰 그림이 없었고, 치열한 승부근성이 없었네요. 결국 '성깔'이 없어서 요 모양 요 꼴이 ^^ 되었구나
싶지요.
수백 억을 들여도 살 수 없는 시간을 가졌으니, 맘껏 향유하기 바랍니다. 이 하루하루가 인생이랍니다.
할리님은 직감상 ^^ 살사가 어울릴 것같은데 어떠세요? ㅎㅎ
비장의 무기가 있으면 털어놓고,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네요.
앨리스님, 지나놓고 보니 그 '어지간한 경험'이 모조리 내 인생이었더라구요. 인생의 매 장면에서 나름대로 골치아프게 살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인생 전체를 놓고 보는 큰 그림이 없었고, 치열한 승부근성이 없었네요. 결국 '성깔'이 없어서 요 모양 요 꼴이 ^^ 되었구나
싶지요.
수백 억을 들여도 살 수 없는 시간을 가졌으니, 맘껏 향유하기 바랍니다. 이 하루하루가 인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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