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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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딸과 함께한 휴가(1)
올 해 휴가는 모처럼 딸과 함께 했다. 모든 가족이 모이는 휴가 개념을 깨고 남도 풍광을 딸과 같이 한 것이다. 현재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요즘 학교방학이 없단다. 더군다나 학원까지 등록되어 있어 아이들의 경쟁이 장난이 아니다. 어쩌다 학교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아내는 아들이 안타까워 내가 모처럼 광주에서 보내고자 했던 휴가계획에 합류하지 못했다. 대신 딸과 함께 하는 휴가를 제시했고, 불만족스럽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광주를 찾은 딸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고민하다가 담양을 들러 두 개의 남도 섬을 다녀오기로 계획했다. 20여년을 살면서 딸과 진지하게 이야기한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어엿한 숙녀이건만 속내를 드러낸 대화는 흔치 않았다. 요즘 어떤 생각을 갖고 장래 무슨 꿈을 꾸면서 사는지 알고 싶었다. 이 기회에 아빠를 바라보는 시각과 가정에 대한 관심사도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그저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딸이 남자친구와 동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반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딸은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동행코자 하는 남자친구와 사귀었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공부에 방해가 될 듯하여 말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다정히 다니는 모습이 옛날과 는 사뭇 달랐다. 늘 부모에게 허심탄회하게 만남의 과정을 설명했다. 주로 아내에게 해당되는 일이지만 아내 또한 이러한 만남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 친구는 매주 우리 집에 들르곤 하였는데 마치 친척집 들리듯, 아니 어쩔 때는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하곤 했다. 그 모습이 미워 보이지 않았고 서로 대화하는 모습에서 성실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둘은 어엿한 성년으로 성장했지만 현재까지도 만나고 있다.
그런 딸의 친구이기에 같이 오겠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했다. 한편으로 딸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딸의 친구는 몇 년간의 만남을 거쳐 이미 우리 가족과 친숙해 있었다. 아직 장래를 점칠 수 없지만 이 번 휴가가 그들의 긴 만남에 좋은 촉매제가 되었으면 했다. 그러다보니 다소 신경이 쓰였고 부담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광주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둘은 좋아보였다. 도착하자마자 담양으로 향했다. 지난번 선생님을 비롯한 2기 연구원들과 함께했던 그 코스와 동일하게 움직였다. 가사문학관과 메타 스콰이어거리 그리고 죽녹원을 들렸다. 담양은 선비들의 고장이다. 그들은 정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정치에 염증을 느낄 때면 미련 없이 고향을 찾았고 물좋고 산새 좋은 보금자리를 이곳에서 틀었다. 바로 담양은 그런 곳이다. 가사문학이 태동하고 정절을 내품었던 땅이요, 학식 높은 선비들의 휴양지였다. 올곧은 선비들의 배움터였으며 조선학자들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다. 면앙정, 송강정, 소쇄원 식영정 등.
다시 찾은 메타 스콰이어 거리는 지난번 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을 찌르는 녹음(綠陰)은 오히려 도를 더했다. 저 멀리 요즘 한참 뜨는 영화 ‘화려한 휴가’의 촬영지였다는 표지가 있다. 나중에 이 영화를 보고 안 사실이지만 첫 장면에 이거리가 등장한다. 전남을 다니다보면 왠 촬영지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아마 산수와 풍광이 좋아 그럴 것이다. 주몽 촬영지가 나주에 있었고, 지난 번 들른 증도에서는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를 찍었다고 했으며 보성다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자체에서는 이 점을 홍보용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정한 포즈로 몇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그리고 죽녹원으로 향했다. 봄에 솟아난 죽순들이 예외 없이 커있었다. 이 곳 또한 영화촬영지의 하나였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대나무는 절개의 상징이요 지조의 표상이라. 하지만 오늘날 나무들의 몸짱같다.
딸과 그의 친구와 ‘사랑이 변치 않는 길’을 함께 걸었다. 마음속으로 서로 사랑이 늘 함께하길 빌었다. 그들에게도 사랑과 행복을 가꾸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을 먹지 않고는 자생할 수 없다. 불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드디어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불행은 행복의 전위대다. 불행을 이겨내면 낼수록 행복의 윤곽은 뚜렷하다. 그들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분명 있겠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미 그런 과정을 겪었던 주변인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피로를 풀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저녁 낙지 사냥에 나섰다. 딸이 광주에서 낙지를 먹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낙지 사냥터를 찾았다. 우리는 거기서 세 마리의 낙지를 맛나게 씹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영화관으로 향했다. 바로 ‘화려한 휴가’를 같이 관람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영화화한 것이다. 나 또한 그 역사의 날에 서울역 광장에서 데모대와 함께 했기에 사뭇 감회가 깊었다. 딸들이야 지금은 편하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학생들은 민주투쟁의 선봉대였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늘 학생들은 데모에 가담하곤 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학교 정문 앞에서의 최루탄 연기를 흔하게 마시곤 했다. 딸과 그의 친구를 보면서 속으로 ‘너희들은 복 받은 놈들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의 사실성을 떠나 같은 민족끼리의 난투극은 참으로 역겹다. 정권이 무엇이길래 내 부모 내 형제에게 총을 겨눌 수 있단 말인가. 군인들의 정당성은 옹졸하다. 또한 시민들의 궐기 또한 타당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대치가 엄청난 사태를 초래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들이 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가 웃음과 울음을 교차시키면서 그날의 숭고함을 드높이지만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역사다. 딸과 친구는 무슨 생각을 갖고 이 영화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결코 나의 얼굴에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다시 갖게 해서는 안 될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는 늘 불행을 끼고 관객을 흡입한다. 내가 한국영화를 멀리하는 이유도 이런 연유와 무관치 않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경향이 있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 행복을 찾는다면 이를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행복은 나의 불행과 타인의 행복에서 찾아야 한다. 타인의 행복을 본받고 나의 불행을 극복하여 행복의 미래를 가꾸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행복에 관한 선진화라고 본다. 영화가 과거를 들추기보다 미래의 보지 못한 영상을 통해 관객을 모았으면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디-워’처럼.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배경에 대해 잠시 들려주었다. 그들은 영화의 깊이보다는 배우의 연기에 감동하는 듯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슬픈 과거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그런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장래 자신들의 모습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 그저 영상과 연기력에 치중해 영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두 눈에 맺혀있는 영상을 지우고 내일의 여정만을 생각하게 됐다. 땅끝마을로 향하는 딸과의 여행말이다.
IP *.57.36.18
올 해 휴가는 모처럼 딸과 함께 했다. 모든 가족이 모이는 휴가 개념을 깨고 남도 풍광을 딸과 같이 한 것이다. 현재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요즘 학교방학이 없단다. 더군다나 학원까지 등록되어 있어 아이들의 경쟁이 장난이 아니다. 어쩌다 학교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아내는 아들이 안타까워 내가 모처럼 광주에서 보내고자 했던 휴가계획에 합류하지 못했다. 대신 딸과 함께 하는 휴가를 제시했고, 불만족스럽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광주를 찾은 딸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고민하다가 담양을 들러 두 개의 남도 섬을 다녀오기로 계획했다. 20여년을 살면서 딸과 진지하게 이야기한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어엿한 숙녀이건만 속내를 드러낸 대화는 흔치 않았다. 요즘 어떤 생각을 갖고 장래 무슨 꿈을 꾸면서 사는지 알고 싶었다. 이 기회에 아빠를 바라보는 시각과 가정에 대한 관심사도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그저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딸이 남자친구와 동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반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딸은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동행코자 하는 남자친구와 사귀었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공부에 방해가 될 듯하여 말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다정히 다니는 모습이 옛날과 는 사뭇 달랐다. 늘 부모에게 허심탄회하게 만남의 과정을 설명했다. 주로 아내에게 해당되는 일이지만 아내 또한 이러한 만남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 친구는 매주 우리 집에 들르곤 하였는데 마치 친척집 들리듯, 아니 어쩔 때는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하곤 했다. 그 모습이 미워 보이지 않았고 서로 대화하는 모습에서 성실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둘은 어엿한 성년으로 성장했지만 현재까지도 만나고 있다.
그런 딸의 친구이기에 같이 오겠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했다. 한편으로 딸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딸의 친구는 몇 년간의 만남을 거쳐 이미 우리 가족과 친숙해 있었다. 아직 장래를 점칠 수 없지만 이 번 휴가가 그들의 긴 만남에 좋은 촉매제가 되었으면 했다. 그러다보니 다소 신경이 쓰였고 부담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광주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둘은 좋아보였다. 도착하자마자 담양으로 향했다. 지난번 선생님을 비롯한 2기 연구원들과 함께했던 그 코스와 동일하게 움직였다. 가사문학관과 메타 스콰이어거리 그리고 죽녹원을 들렸다. 담양은 선비들의 고장이다. 그들은 정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정치에 염증을 느낄 때면 미련 없이 고향을 찾았고 물좋고 산새 좋은 보금자리를 이곳에서 틀었다. 바로 담양은 그런 곳이다. 가사문학이 태동하고 정절을 내품었던 땅이요, 학식 높은 선비들의 휴양지였다. 올곧은 선비들의 배움터였으며 조선학자들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다. 면앙정, 송강정, 소쇄원 식영정 등.
다시 찾은 메타 스콰이어 거리는 지난번 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을 찌르는 녹음(綠陰)은 오히려 도를 더했다. 저 멀리 요즘 한참 뜨는 영화 ‘화려한 휴가’의 촬영지였다는 표지가 있다. 나중에 이 영화를 보고 안 사실이지만 첫 장면에 이거리가 등장한다. 전남을 다니다보면 왠 촬영지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아마 산수와 풍광이 좋아 그럴 것이다. 주몽 촬영지가 나주에 있었고, 지난 번 들른 증도에서는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를 찍었다고 했으며 보성다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자체에서는 이 점을 홍보용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정한 포즈로 몇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그리고 죽녹원으로 향했다. 봄에 솟아난 죽순들이 예외 없이 커있었다. 이 곳 또한 영화촬영지의 하나였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대나무는 절개의 상징이요 지조의 표상이라. 하지만 오늘날 나무들의 몸짱같다.
딸과 그의 친구와 ‘사랑이 변치 않는 길’을 함께 걸었다. 마음속으로 서로 사랑이 늘 함께하길 빌었다. 그들에게도 사랑과 행복을 가꾸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을 먹지 않고는 자생할 수 없다. 불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드디어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불행은 행복의 전위대다. 불행을 이겨내면 낼수록 행복의 윤곽은 뚜렷하다. 그들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분명 있겠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미 그런 과정을 겪었던 주변인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피로를 풀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저녁 낙지 사냥에 나섰다. 딸이 광주에서 낙지를 먹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낙지 사냥터를 찾았다. 우리는 거기서 세 마리의 낙지를 맛나게 씹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영화관으로 향했다. 바로 ‘화려한 휴가’를 같이 관람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영화화한 것이다. 나 또한 그 역사의 날에 서울역 광장에서 데모대와 함께 했기에 사뭇 감회가 깊었다. 딸들이야 지금은 편하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학생들은 민주투쟁의 선봉대였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늘 학생들은 데모에 가담하곤 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학교 정문 앞에서의 최루탄 연기를 흔하게 마시곤 했다. 딸과 그의 친구를 보면서 속으로 ‘너희들은 복 받은 놈들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의 사실성을 떠나 같은 민족끼리의 난투극은 참으로 역겹다. 정권이 무엇이길래 내 부모 내 형제에게 총을 겨눌 수 있단 말인가. 군인들의 정당성은 옹졸하다. 또한 시민들의 궐기 또한 타당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대치가 엄청난 사태를 초래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들이 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가 웃음과 울음을 교차시키면서 그날의 숭고함을 드높이지만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역사다. 딸과 친구는 무슨 생각을 갖고 이 영화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결코 나의 얼굴에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다시 갖게 해서는 안 될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는 늘 불행을 끼고 관객을 흡입한다. 내가 한국영화를 멀리하는 이유도 이런 연유와 무관치 않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경향이 있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 행복을 찾는다면 이를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행복은 나의 불행과 타인의 행복에서 찾아야 한다. 타인의 행복을 본받고 나의 불행을 극복하여 행복의 미래를 가꾸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행복에 관한 선진화라고 본다. 영화가 과거를 들추기보다 미래의 보지 못한 영상을 통해 관객을 모았으면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디-워’처럼.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배경에 대해 잠시 들려주었다. 그들은 영화의 깊이보다는 배우의 연기에 감동하는 듯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슬픈 과거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그런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장래 자신들의 모습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 그저 영상과 연기력에 치중해 영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두 눈에 맺혀있는 영상을 지우고 내일의 여정만을 생각하게 됐다. 땅끝마을로 향하는 딸과의 여행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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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지금 저희 아버지 연세는 83세 이셔요. 저는 아버지와 약 20여 년 전 쯤 남해 여행을 했더랬어요. 공직에 계신 아버지가 늘 바쁘셨기 때문에 그때 몇 박 며칠 함께 한 여행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지요.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저가 대리로 따라나선 여행이었지만 아버지와 딸의 여행은 참 좋은 추억이에요. 먹여보고 싶어 하는 음식, 남해대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설명해주시던 모습,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대견해 하시는 모습까지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그 후로도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아 그러고 보니까 벌써 어언 10년이나 됐군요. 동해 일출을 보기위해 일월 일일 날 정동진에 아버지와 함께 기차여행을 다녀왔었지요. 그때 남해 여행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날은 비가 와서 정작 해는 보지 못하였지만 가슴에 올올히 새기며 열심히 흔들리지 않고 살겠노라 다짐하고 돌아왔지요. 아빠와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제 가슴속 깊이 죄송한 마음 느끼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장 오래된 연인이라는 느낌 같은 것이 들어요. 이번 몽골 여행에서도 그런 장면을 보았지요. 부지깽이님과 그분의 막내딸 해언을 통해서 지난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저 맑고 푸름 그대로 간직하고 살 수 있도록 아빠 같은 연인을 만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었지요. 참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그리고 도선배님의 가정의 모습도 흐믓한 광경이고요. 너무 멋있는 삶으로만 꼭꼭 들어찬 여문 옥수수 알맹이 같아 부럽네요.
화려한 휴가 저도 연구원 몇 명과 함께 봤어요.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었지요. 백민식의 에드립 강한 연기보다 현장을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고통으로 남은 우리들의 슬픈 역사가 가슴 저미는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지요. 선배는 무슨 할말이 그리 많아서 아예 입을 다무시는지요.
모쪼록 늘 건강하시고 기회가 되는 날에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후배가...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저가 대리로 따라나선 여행이었지만 아버지와 딸의 여행은 참 좋은 추억이에요. 먹여보고 싶어 하는 음식, 남해대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설명해주시던 모습,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대견해 하시는 모습까지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그 후로도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아 그러고 보니까 벌써 어언 10년이나 됐군요. 동해 일출을 보기위해 일월 일일 날 정동진에 아버지와 함께 기차여행을 다녀왔었지요. 그때 남해 여행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날은 비가 와서 정작 해는 보지 못하였지만 가슴에 올올히 새기며 열심히 흔들리지 않고 살겠노라 다짐하고 돌아왔지요. 아빠와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제 가슴속 깊이 죄송한 마음 느끼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장 오래된 연인이라는 느낌 같은 것이 들어요. 이번 몽골 여행에서도 그런 장면을 보았지요. 부지깽이님과 그분의 막내딸 해언을 통해서 지난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저 맑고 푸름 그대로 간직하고 살 수 있도록 아빠 같은 연인을 만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었지요. 참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그리고 도선배님의 가정의 모습도 흐믓한 광경이고요. 너무 멋있는 삶으로만 꼭꼭 들어찬 여문 옥수수 알맹이 같아 부럽네요.
화려한 휴가 저도 연구원 몇 명과 함께 봤어요.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었지요. 백민식의 에드립 강한 연기보다 현장을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고통으로 남은 우리들의 슬픈 역사가 가슴 저미는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지요. 선배는 무슨 할말이 그리 많아서 아예 입을 다무시는지요.
모쪼록 늘 건강하시고 기회가 되는 날에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후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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