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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29일 13시 41분 등록
세상에는 여러 인물과 역할의 신神들이 존재한다. 어떤 신은 가르침을 전재로 하여 나의 내면을 일깨운다. 바라만 보아도 믿음이 가는 그런 신심이다. 마치 문수보살文殊菩薩과도 같고 유대교의 랍비rabbi와도 같은 존재의미다. 그래서 그런 신과 함께 하게 될 때면 나는 할 수 있는 한 만사를 재껴두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신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절하기에 안간힘을 써본다. 그래도 늘 상 번번이 역부족이다. 능력이 일천한 사람은 작은 일도 효율적으로 실행치 못하기 때문에 공연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된다. 효율로 치면 아주 비효율적, 비능률적인 셈이다. 그래도 어쩌랴, 생긴 범위 안에서 발버둥을 칠 밖에.


어떤 신神은 바른 이치와 경우로서 일상을 따끔하게 일깨워준다. 그런 신을 만나는 것은 매우 즐겁다. 칼칼함이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덜 아쉬워하며 차일피일 미뤄가며 시간을 맞춰보려 애를 쓴다. 왜냐하면 믿거니 해서이다. 약간의 기질이 같은 신을 만나면 어리광을 부리거나 약간 소홀해도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안함이 먼저 생기는 것이다. 또한 그 신 자체도 서운함을 무릅쓰고라도 속으로야 어떻든 이해하고 수용해 주려하는 배려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발휘하심이라. 그래서 기질이 같은 신에게는 좀 싹수없이 굴면서도 덜 무서워하게 된다.


어떤 신神은 존경하고 사랑함에도 믿음직스럽지 않다. 늘 마음은 그대로 인데 상대의 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진정으로 바라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마음은 편하지만 뜻은 잘 통하지 않는 것일까. 말로는 누구보다 예뻐라 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어쩐지 그 행위와 중심이 바른 이치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수행자가 아직 너무 철이 없는 탓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내를 다 이야기 할 수 있는 허심탄회虛心坦懷함과, 거르지 않고 가시지 않아도 부끄러움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가식 없이 열어 보일 수 있음에야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오랜 벗이란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눈물이 나고 슬픈 것도 아니면서 애잔하다. 그렇다면 겉만 알고 속은 모르는 까닭일까. 아니면 세상사에 가장 밀접한 현실의 신일까.
그런 신에게는 삶의 이중성二重性과 인간의 모순矛盾을 느끼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진실보다 환상 내지는 야누스Janus와 같은 일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니, 그 또한 위대한 신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어떤 신神은 계명誡命과 말씀으로서 당신만을 섬기면 영원한 생명과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만천하에 선포한다. 어떤 신神은 깨달음으로 인하여 진리와 생명의 원천을 각자 나름대로의 철학을 세워 해탈解脫하기에 이르라 하고, 저마다 부처가 되어 태어나고 죽음에서 자유로이 안심安心과 입명立命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음이라한다.


나는 세상에서 이렇듯 여러 신들과 만나게 되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신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나만의 신神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모든 신들의 결정체結晶體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가 이해한 해답은 ‘후련히 살고 홀연히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신들이 내게 주신 사명使命을 완수하기 위해 거듭남을 주제로 날마다 또 하루하루를 애써 살아가고자 한다.


오늘도 멋진 신들이 내 귓전을 속삭이고, 나의 일상을 파고들어 나의 하루를 나와 함께 지배한다. 오늘은 어느 신과 더 가까워질 것인가. 내게는 언제나 선택권이 있고 제각각 신들의 강건한 유혹은 찬란한 가을 햇빛처럼 눈부시다. 오늘 또 하루의 신과의 접속接續 혹은 나만의 신과의 독립獨立을 선포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 땅에서 가장 최선의, 살아있음의 또 하루를 향하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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