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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1일 17시 50분 등록
'태릉입구'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을 지나면서 문자를 날립니다. 이건 일종의 약속 같은 것입니다. 저희 부부만의 언어이지요. 짧은 메시지의 앞과 뒤에 생략된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나 지하철 타고 지금 '태릉입구'역을 지나고 있으니까 당신도 이제 준비하고 나오면 시간이 맞을 거야.'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아내가 19개월 짜리 아이를 데리고 퇴근 길의 저를 마중 나옵니다. 편하지요? 제 퇴근길은 요즘 한창 걷고 뛰는데 재미를 들인 아들 녀석이 자기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부지런히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차오른 숨을 고르는데 맞은 편 엘리베이터의 저만치 위에 익숙한 두 얼굴이 보입니다. 아마 오늘은 문자도 받기 전에 집을 나섰던 모양입니다. 대부분 온갖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길 한복판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오늘은 둘이 더 많이 걸어왔습니다.

아내가 먼저 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아이의 눈에도 제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아이의 눈이 주먹만큼 커지는가 싶더니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갑니다. 그리고 입을 동그랗게 말아서 '오오!~' 소리를 연발합니다. 최고로 반갑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걷는 듯 춤추는 듯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과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창문에 코를 바짝 대고는 케이크를 바라보며 박수를 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응응!'하고 말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라는 재촉입니다. 제과점 앞에 셋이 나란히 서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박수도 쳤습니다. 아이는 유리창에 입술을 대고 초를 끄는 시늉을 합니다. 셋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아내가 차려놓은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은 왠지 자꾸만 다른 곳에 눈이 갑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아내가 배시시 웃습니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맛난 것을 사먹은 기억이 흐릿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저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몇 번 가보았던 고깃집으로 향했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동안 못 오는 사이, 9,000원이었던 갈비살 값이 11,000원으로 올랐습니다. '아차' 싶었는데 별다른 내색은 못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고기를 2인분 시키고, 소주도 한 병 시켰습니다. 잘 익힌 고기를 조그맣게 잘라 아이의 입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오물거리는 모양이 꼭 제비새끼 같습니다. 쓴 소주에 고기 한 조각 무니 온 몸이 나른합니다. 술을 잘 하지 않는 아내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한 잔 하겠다며 다가 앉습니다.

웃다가 먹다가, 또 먹다가 웃다가 보니 고기가 떨어졌습니다. 배 부르다며 그만 먹자는 아내의 만류를 못들은 척하고 고기 1인분을 추가했습니다. 자주 하는 외식도 아닌데, 고기 1인분에 오그라드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쓰럽고. 또 한편으론 고맙습니다. 고기 1인분 더 시킨 참에 쌈 채소와 동치미 국물도 큰소리로 더 부탁했습니다.

먹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길었던 즐거운 식사가 끝났습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조금 모자랐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카드로 결재하고 고깃집을 나섰습니다. 바람이 꽤나 차갑습니다.

"그냥 집에서 밥 먹을 걸 그랬다. 그치?"

아내의 한마디에 갑자기 코끝이 시큰합니다. 흐릿해진 눈을 들킬 새라 아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저만치 앞으로 뒤뚱거리며 달려나갑니다. 얼른 쫓아 가서 아이를 번쩍 들었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구치자 아이의 입에서 '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를 어깨에 올려 목마를 태웠습니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두 손을 잡으려니, 어느 새 이 녀석이 제 머리를 꼭 끌어안습니다.

집에까지 오는 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또 하루의 퇴근길 풍경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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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식
2007.10.11 13:36:58 *.55.214.10
가족의 사랑이 글자 사이로 아지랭이를 일으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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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향기
2007.10.11 14:33:43 *.109.85.26
아이를 목마태우느라 아빠는 보지못하겠지만, 아빠목에 올라타는순간 별빛을 한가득 담은 눈은 더 크게 반짝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동그란모양의 입으로 환히 웃음을 짓는 모습이 어찌나 가슴저리도록 사랑스러운지...
보진못해도 맞닿은 두 부자의 온기로 느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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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11 17:04:40 *.48.38.252
암만봐도 괜찮은 남자. 신종윤.
요 며칠 이 남자 생각으로 얼마나 애타는지 알라나 몰러.ㅎㅎ

(연구원 숙제인 나의 인물묘사 대상인지라 ../오해할까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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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보이
2007.10.11 17:08:53 *.143.152.79
하~~~ 좋은 글...
이 글 쓴분도 분명 좋은 분 일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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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12 07:26:58 *.72.153.12
이렇게 사랑스런 존재의 소리를 뒤로 하고 문닫고 공부하느라 고생했겄구만... 그런데 에구 부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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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10.12 09:54:14 *.227.22.57
진명식님~ '글자 사이로 아지랭이'란 표현이 좋으네요. 좋은 하루였답니다.

숲속의 향기님~ 그러게요. 목마 타고 올라 앉아 있던 아이의 느낌이 지금도 간질간질 남아있네요. 아내에게 부탁해서 올라앉은 아이와 저의 사진을 한장 찍어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향인누나~ ㅋㅋ '괜찮은 남자' 아~ 요거요거 아주 맘에 드는 칭찬이네요. 우리 그냥 숙제는 편한 맘으로 하게요.

할리보이님~ 바이크와 공연!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정화야~ 그래. 그러니 문닫고 공부가 잘 됐겠나? ㅎㅎ 부러워 말고 너도 함 해보거라~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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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
2007.10.12 11:31:39 *.114.22.72
세월은 이렇듯 지나가고 있었고, 먼 훗날 오늘을 기억하리라 생각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에게도 있었던 과거의 어느날이 추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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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보이
2007.10.12 12:03:21 *.133.238.30
종윤님, 제가 22일에 조그만 공연할건데
그 행복한 세식구 보고싶으니 시간되시면 같이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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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2007.10.12 12:24:22 *.128.30.7
아 !! 좋다.
그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는 느낌이다.
마치 그대로 보고 있는것 같아.
3명의 표정 눈빛 미소. 그리고 그 길들 , 아이의 탄성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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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10.12 15:26:44 *.227.22.57
철민님~ 이렇게나마 적어두고자 하는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오늘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랍니다. 제 짧은 글이 기억을 불러오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할리보이님~ 저희 셋이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공연이라면 가보고 싶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그 공연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그리를 통해 넌지시 물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은미누나~ 몽고 다녀오고 나서 우리 좀 뜸했네. 그치? 나는 내 일이니까 써놓고 다시 보니 그 느낌이 다시 사는데... 그냥 읽기만 하는 누나에게도 그게 느껴진다니 다행이네. 누나가 예민한거 아닌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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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
2007.10.14 13:02:37 *.96.189.10
너무나 행복한 가정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되어 글을 남깁니다.
일상을 이렇게 감칠맛나게 풀어내는 종윤님의 글도 부럽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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