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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6일 15시 54분 등록
색, 계(色, 戒 Lust & Caution)

지난 주말 모처럼 아내와 단둘이 영화를 관람했다. 대부분 영화 선택은 아이들이, 관람은 가족과 같이 하는 편이지만 이 영화는 아이들과 같이 하기에는 그 경계수위가 넘었기에 아내와 단 둘이 볼 수밖에 없었다. 〈색, 계〉, 무슨 뜻인가. 화류계란 뜻인가. 아니면 색을 계약한단 말인가. 한글이 좋은 이유는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예약을 위해 〈색, 계〉를 찾는 순간 이 상상력은 한 곳으로 쏠린다. 색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아내도 이미 예고편이나 영화프로그램을 통해 대충은 들었던 모양이다. 주연인 양조위가 어떻고, 고적한 스파이역을 맡은 여주인공 탕웨이는 신인배우이며 호남배우 왕리홍은 대만의 세계적 가수라는 등 제법 영화배우의 케릭터를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의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과 촬영상 2개 부문을 석권했었던 만큼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영화 배경은 일제 강점기인 1942년의 상하이 한 카페에서 여주인공인 탕웨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하는 모습부터 시작된다. 물론 영화가 그렇듯이 첫 화면은 과거를 수반하기 위한 상징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 장면은 4년 전 과거로 거슬러가기 위한 전제였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4년 전 홍콩대학 재학 시 애국심에 고취된 광위민(왕리홍분)의 연극부에 가담하여 서서히 애국심을 기르고 급기야는 일제의 앞잡이로서 친일파의 핵심인물인 첩보대장 ‘이(양조위 분)’의 암살계획에 동참한다.

여주인공의 임무는 결혼한 사업가의 아내(막부인)로 위장하고 ‘이’의 아내(조안첸분)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얻은 후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경계(警戒)와 호기심이 반복되며 서서히 이끌리고 계획은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듯하지만 ‘이’의 갑작스런 상하이 발령으로 무산되고 만다. 이에 연극부에 동참했던 학우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여주인공은 상하이의 이모집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연극부의 급진파 학우인 광위민이 수소문 끝에 찾아와 더욱 포악해져가 있는 ‘이’(이는 더욱 승진하여 일제 친일각료의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의 암살에 가담해줄 것을 또다시 권한다.

여주인공의 운명은 여기서 싹튼다. 막부인으로 변장한 그녀는 ‘이’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또다시 ‘이’의 눈에 띄어 영화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린다. 운명의 여인은 ‘이’를 유인하기 위한 임무로 인해 ‘이’를 끌어들이고 ‘이’는 무엇인가 모를 깊은 감정이 그녀에게 있음을 직감하면서 그녀의 몸을 탐하기 시작하며 관계가 깊어질수록 경계를 풀기 시작한다. 여주인공 또한 수많은 관계를 통해 자신이 스파이의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사랑이 싹틈을 알게 된다.

결과는 비극적 종말을 고한다. 민족에게 무수한 칼날을 들이대고 목숨을 빼앗아 같던 거대한 존재 앞에 색(色)으로 시작된 유혹은 좌초되고 무고한 젊은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운명의 여인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난날 함께한 학우들을 보게 된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색(色)을 통해 지키려했던 조국을 색(色)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던 학우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가 죽이려 했던 ‘이’는 버젓이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운명의 여인이 머물었던 방에서 그녀를 생각하는 ‘이’를 비치며 종영된다.

영화를 보고난 후 많은 생각이 머리를 뒤흔든다. 어떻게 정리할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내에게 물었다. 보고난 후 어때? 명성이 자자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기에 영화로서의 완성도는 뛰어나다고 말한다. 장면의 선택이라든지 배우들의 연기력은 나무랄 때 없다. 영화인들의 평 또한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 전문가가 아닌 나는 무엇을 느꼈고 어떻게 평해야 좋을까.

당초 이 영화의 압권은 농도 짙은 정사신에 있었다. 무삭제 영화라니 타영화에서 보지못한 장면이 있다느니 말이 많았던 영화였다. 감독 또한 이 정사신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한 흔적이 있다. 애로물에 나오는 흔한 정사신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동족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될 환경에 직면해 살아야만 했던 한 인간으로서 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부림을 색을 통해 풀고자한 흔적이 역역하다. 짐승과도 같은 새디즘적(가학적) 성교를 통해 한 여인의 몸을 무참히 짖누르면서 색에 대한 탐욕은 시작된다. 아마 그때는 이 여인을 경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그는 서서히 이 여인을 믿게 된다. 그는 색도 진실이 있음을 육감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곁들인 색욕이 마침내 냉혹하기 그지없는 남심(男心)을 뒤흔든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녀의 품에 안기는 듯하다. 감독은 이러한 관계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정사장면의 사실감과 섬세한 감정표현을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의 예술성을 높이기 위해 색의 미학에 너무나 치중했다. 영화는 예술성에 치우치기보다는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제국주의 칼날 앞에 도도히 저항하는 민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다. 저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일제와 일제앞잡이를 쓰러뜨리는 방법에 모든 수단이 마련되었으면 했다. 한 여인을 통해 몸을 빙자하건 사랑을 빙자하건 악은 무너져야 옳았다. 그러나 감독은 색의 경계를 통해 옳은 방향을 무참히 쓰러뜨린다. 색은 일제 앞잡이에게도 경계대상이지만 독립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도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색은 단지 색일 뿐이다. 이성을 넘나드는 감성이 색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색이 깊어 가면 갈수록 색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지나치게 드러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색은 적과의 동침을 통해 거대한 무기로 등장해왔다. 이런 역사적 흔적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러기에 색을 통한 고도의 심리전으로 적을 눕혀야 옳았다. 관객의 객관적 결과를 전도시키는 일이 감독의 또 다른 기량일지라도 배경의 냉혹성(일제강점기)을 직시한다면 악한은 선한 자의 발아래서 목숨을 다해야 마땅했다. 이 점이 나를 실망시켰다. 왜 ‘이’(양조위분)가 살아있는 장면이 마지막인가. 한국과 중국은 일제의 만행을 가장 지척에서 보았던 민족이다. 감독의 예술성은 찬양하되 그의 가치관은 탓하고 싶다.

영화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은 동양적 사고의 지나친 집착에 있다. 특히 중국 전반에 드리워진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싶다. 선과 악의 혼재, 이것이 동양사고의 기저임을 강조한다. 선과 악이 불분명한 사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명확히 구별되지 못하는 사회가 동양사회인 듯 비춘 점이 나를 슬프게 한다. 때로는 악이 선으로 돌변하고 선이 악으로 뒤바뀌는 혼돈의 사회가 동양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의 강점기에 동양 대부분의 국가가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그 세월은 차마 입으로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시대였다. 그 주범이 일본이었다. 그런데 중국인의 신분으로서 일본의 앞잡이를 그토록 미화한 것은 영화의 예술성을 떠나 시대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는 마치 인간을 짐승마저 못하게 생각하는 민족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한듯하여 못마땅하다. 색의 비이성적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달리해야 바람직했다.

감독의 선택은 무엇인가. 민족의 원융이자 일제의 앞잡이에 불과한 한 인간을 죽이려 했던 운명의 여인과 그의 동료를 애써 외면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적 시각에서 색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던 고뇌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대적 상황을 반영치 못한 연출은 분명 옳지 않다. 그런 상황은 인류의 역사에서 다시는 존재해서 안 될 비극적 사실이다. 이에 편승하고 두둔한 자들은 엄숙히 역사 앞에서 처단되어야 마땅하다. 그 중심인물이 버젓이 영화의 전반을 휘어잡는 모습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시대적 배경을 떠나 감독은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장면과 내용은 다른데 있다고 말한다. “욕망을 뜻하는 ‘색(色)’과 신중을 뜻하는 ‘계(戒)’가 연결된 <색, 계>라는 제목은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섹스이지만 그것을 넘어 내면적으로는 예술과 삶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색, 계>는 “삶의 욕망”, “사회의 경고”, 그리고 이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주제다. 서로에게 다가온 상대방을 신중하게 경계했던 두 사람은 사랑의 치명적인 유혹을 간과하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결국 육체의 뜨거운 욕망은 그토록 신중했던 그들을 비극으로 몰고 가게 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사랑과 고통은 공존한다(Love and torture co-exist).”는 점. 이것이야말로 영화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고 선과 악이 버무려지는 사회일지라도 미래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인간중심, 인간의 존엄성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인간을 경시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순위의 차등을 선호하는 국가나 사회는 21세기의 코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를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를 색의 이름 앞에서 무참히 전도시키는 감독의 태도는 그의 작품성을 떠나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어쨌든 나 같은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가 부족했지만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나타나는 남녀간의 끊임없는 욕정을 중국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밀도 깊게 표현하려 했던 감독의 노력은 곳곳에 남겨져 있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며, 말레이시아, 홍콩, 상하이 등 아시아 전역을 돌며 촬영했다는 후일담이며, 촬영이나 음악을 세계적인 스텝에게 맡겼다는 등 감독이 이 작품에 들인 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종합적으로 <색, 계>에 대해 이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색, 계>를 통해 젊은 배우들은 할아버지 시대의 중국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많은 감동이 되었다. 중국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왔고 어떠한 길을 거쳐 왔는지 만약 지금 세대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촬영에 임할 때 배우들이 자신의 전부를 표현토록 용기를 불어넣어줘야 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관객들에게 현실감 있는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아름다움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는 예술적 노력은 지극하지만 후대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명감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예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라는 여운을 내내 갖게 하는 영화였다. 다시 되돌아보기 싫은 역사적 장면이 영화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로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IP *.57.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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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07.11.17 03:31:52 *.207.136.252
저도 보았습니다. 개봉하기 전 날, 역시 이안 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도 보았습니다. 동성애의 사랑이 주제인데요. 색계 만큼 강도 있는 정사신은 없지만, 두 남자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날 생선을 먹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색계의 정사신에서도 그랬구요. 아울러 동양과 서양의 감성을 맘대로 넘나드는 감독의 역량에 다시 감동했구요.

역사적으로는 님과 같은 비판을 할 수 있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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