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양재우
  • 조회 수 1744
  • 댓글 수 6
  • 추천 수 0
2007년 12월 11일 08시 49분 등록
새벽에 일어나 오늘은 어떤 주제로 글쓰기 연습을 할까 하다가 문득 가방 안에 넣어 다니던 '3년전 유서'가 떠올랐습니다. 조심스럽게 다시 뜯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일로 한줄 한줄씩 옮겨 적기 시작했습니다. 3년전 작성할 땐 뭉클했던 기억이었는데, 오늘은 많이 울었습니다. 미안함에 죄책감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아직은 아내를, 아이들을 안고서 볼을 부빌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2004년 12월 20일. 37살의 나이. 사랑스런 아내와 이쁜 두 아이를 둔 가장.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해 갈등하고 있는 소심한 남자. 세상에 태어나 이룬 것이라고는 지금 살고 있는 집 1채 그리고 약간의 현금.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무엇이 남을까. 지금 죽는다면 나의 존재는 세상에 어떤 의미로 남겨질 것인가. 너무나 의미없이 살아온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한/미. 당신을 만나 결혼하여 근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이도 싸웠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갑끼리는 많이 싸운다고 하지. 게다가 둘다 철부지인 막내끼리 였으니 절대 양보하지 않는 파이팅의 연속이었지. 하지만 지금 이 유서에서 당신에게 진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내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하고 잘 하려고도 했지만 참으로 부족한 남편이었음을 실감해. 당신에게는 조금 더 나이가 있고 마음이 넓은 남자가 있어 챙겨주는 사람이 더 필요했었는데 어쩌다 나 같이 속 좁고 소심한 남자를 만나 여기까지 고생만 많이 시켰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고 호강시켜 주고 싶었는데 나의 능력이 그렇지 못해 여지까지 그렇게 살아올 수 밖에 없었네. 이 생의 인연이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다 이해하고 용서하길 바래. 미안해.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는거라 하지만 미안해. 용서해. 마음만큼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 거.

내가 사라지면 더 좋은 남자 만나서 내게 받지 못한 호강 받으며 살아주길 바래. 그래야 내 마음이 더 편안해지지. 절대로 나 없다고 불행하게 되면 난 눈 못 감을꺼야.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당신을 정말 정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사랑해. 정말 사랑했어.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어. 내 소중한 사랑. 먼저 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듬직한 아들 효빈아. 이 세상에 아빠가 없다면 우리집 가장은 너란다. 우리 효빈이가 아빠를 대신하여 엄마와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거야. 물론 아직 어려 경제적으로 엄마를 도울 수 없겠지만 사내 대장부로서 여자들을 지켜야 하는거야. 남자는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갈비뼈로 태어난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거야. 물론 지금은 아빠말이 잘 이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효빈이가 커가고 이 편지를 몇 번 더 읽어본다면 아빠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러니 그때까지는 엄마 말 잘 듣고 동생 잘 챙기며 오빠 역할 잘 해줘야 한다. 아빠는 우리 효빈이가 그 역할을 아빠 생각 이상으로 잘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단다. ^___^

우리 이쁜 공주님 수정아. 갈수록 이뻐지는 수정이를 보며 아빠는 문득문득 놀란단다. 단지 어리기만 해 보이던 우리 딸이 점점 숙녀티가 나는 걸 보면.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건 우리 수정이가 좀 더 조심성을 가졌으면 하는 점이란다. 조금만 더 조심해서 생활한다면 잘 다치지도 않고 더 이쁜 딸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단다. 가끔 오빠랑 장난하며 놀 때 보면 집에 두 아들을 키우는게 아닌가 할 때도 있었거든. 푸훗. 농담이야, 농담.
수정아! 아빠가 없더라도 엄마 말 잘 듣고 오빠도 잘 도와주면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우리 수정이는 성격이 좋아서 금방 이 생활에 적응하리라고 생각해. 그만큼 강하고. 아빠 생각이 맞지?

이 아빠는 세상에서 우리 가족을 정말로 정말로 사랑한단다. 비록 이 아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하더라도 사랑하는 우리 가족 만큼은 정말 정말 잊지 못할거야. 이 아빠가 세상에 태어나 여태까지 제대로 이뤄놓은 일이라곤 없지만 엄마뿐 아니라 우리 이쁜 아이들까지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단다.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이라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이 아빠는 이렇게 4명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2004년 12월 20일
양 재 우
IP *.122.143.72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12.11 11:53:18 *.75.15.205
세상의 아빠들의 유서네... 매일 죽고 또 죽어서 사는...


정 많은 남자, 양 재 우

그도 역시 막내로군. ^-^

사랑 빼면 시체 그럼 시체를 빼면 사랑이 되나?

사랑 또 사랑 뿐이다. 인생은...


아, 그래서 김수한 추기경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고는 스스로를 "바보야"라고 하셨구나.ㅋ

나도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바보처럼.
프로필 이미지
계원 송경남
2007.12.11 18:38:13 *.36.235.182
저도 언젠간 유서 써보리라 다짐했었는데, 아직 실행을 못했습니다.
올하개 가기전에 한번 써보렵니다.

재우님 감동입니다.
재우님 글을 읽으면서 언제나 느끼는 거 있습니다.
제가 바로 재우님 같고, 재우님이 바로 저 같다는 생각입니다.
가족도 비슷하네요.. 저도 동갑내기 아내와 듬직한 아들, 귀여운 막내 딸을 두고 있거든요.. 그리고 결혼하고 일궈놓은 것도.. 작은 집한 채, 그리고 약간의 현금..ㅋㅋㅋ
언제나 행복한 가정, 많이 본 받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더라도 지금의 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프로필 이미지
생각 줌마
2007.12.12 13:13:49 *.233.240.178
세상을 마감할 때는 모든게 다 후회로,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아요.
전 사실 많이 염세주의여서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더랬죠.
그래서 어떨땐 내 사정 안 보고 퍼 주고 후회한 적도 많았고요.

심각하게 고민 할 일이 있을 땐 죽음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버려서 그럴땐 맘이 넓어지는것 같아요.

일년에 한번 유서 쓰는 것도 좋다 하던데요..
저도 첨으로 함 써보고 나중에 올릴게요...
프로필 이미지
양재우
2007.12.12 13:32:50 *.122.143.72
써니누나..
이미 당신은 변경연의 엄마 자리를 꾀차고 있네요. 어느 한구석 당신의 손길이 닿지않는 곳이 없으니 말이예요. 당신의 따스한 눈길, 부드러운 손길 너무 고맙고 힘이 됩니다.

송경남님..
이제 겨우 2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경남님의 환한 미소는 잊혀지질 않네요. 치열한 사업을 전개하시는 분이라기보다는 여유작작한 젊은 카페주인 같습니다. 좋은 자리 만들어 많은 시간 말씀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줌마님..
어제 잘들어 가셨죠? 첫만남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꿈벗 14기 몽정기 신입으로 들어오심을 다시한번 환영드립니다. 다음번 모임에는 병곤이를 빼고 모실테니 눈치보느라 못다 하신 얘기 맘껏 풀어 놓았으면 합니다.ㅋㅋ^^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7.12.12 20:08:58 *.128.229.81
재우냐, 지금 죽이지 마라. 죽음이 삶에 기여하는 삶의 일부가 되게 하려면 너를 멀리 데리고 가야한다. 갈림길이 생길 때 마다 너를 네 '미래의 장례식'으로 데려가라. 그러면 작은 이익에 지지않고, 두려운 것을 해 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죽음의 자리에서 자랑스러운 삶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느냐 ? 죽은 다음의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 나를 죽이니 삶이 좋아지는구나.
프로필 이미지
여행자
2007.12.12 21:57:45 *.176.44.24
재우님 유서를 보고서 살짝 눈시울이 적셔 옵니다.
저도 유서를 쓸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진정 써야겠네요.
재우님의 조언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