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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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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4일 04시 08분 등록

1
吃飯的時候吃飯,睡覺的時候睡覺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 때 잠을 잔다.

‘마지막 유혹(Last temptation)’ 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던 중국의 유명한 고승 영화(永和) 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문구는 스님이 그의 제자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다.


스님의 제자는 형보다 똑똑해서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자가 된 태자를 모시던 근위대장이었다. 제자는 형의 계략에 의해서 태자가 죽게 되자 반역자로 몰려 도망다니며 방황한다. 그러다가 인생역정 끝에 스님을 만나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내용인데....
쇠락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사찰의 주지스님인 영화에게 찾아가 몸을 의탁한다. 번뇌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추운 겨울 어느날, 깊은 밤 중에 스님이 주무시는 곳의 다 쓰러져 가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외쳐댄다.

‘ 스님! 드디어 알았습니다. ..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이 놈아... 추와야!... 문 닫혀야!’
‘모두 가 다.. 이 모든 번뇌가 바로 제 허영 때문이었습니다...’
‘황제에 대한 미움도, 마음 속의 분노도,, 다 제 허영때문이었습니다.’

‘... 잠이나 자야 ! ’
무장이 나가자,, 스님께서 돌아누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깨닫기는...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놈아, 깨달음이 별거인줄 아냐? .. 밥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자는 거여... ’
(吃飯的時候吃飯,睡覺的時候睡覺)

스승님이 살아가시면서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황홀’에 대해 이야기 하실 때마다 나는 이 대화가 생각나곤 했다.
삶의 완성이나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각오로 대단한 이벤트를 완성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 때 잠자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으로 일으키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살고 있음’ 이라는 일상 그 자체뿐이다.

2.

행동의 변화를 이루는 인간 내적 영역들

냉전 시대였던 60년대에 평준화 교육으로 소련에 뒤처진 미국이 천재교육 정책을 시도하면서 시작된 연구는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교육심리학자인 벤자민 브룸(B. Bloom)은 그의 연구 팀원들과 함께 천재적인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피아니스트, 테니스 선수, 수영선수 등을 연구하였다. 그의 결론은 탁월한 재능은 선택받은 몇몇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요소들이 환경과 학습에 의해 집중적으로 발달한 것이라는 귀결이었다.
그들의 많은 연구결과중의 하나로서 인간의 발달 영역을(learning domain)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인지적 영역 (cognitive domain), 심동적 영역 (psychomotor domain), 정의적 영역(affective domain)이다. 이러한 영역구분은 현재 미국의 교육 과정에 적용되고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우리가 말하는 전인적인 교육이란 완벽한 인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세 영역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육은 지나치게 인지학습을 강조해 왔다. 다른 한 편 현장에서는 지나치게 이해되지 않는 기능적인 반복 숙달 (경험을 위주로 하는 심동적인 면)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현대의 가정이나 기업은 정의적인 면을 발달(인성과 윤리적 태도 가치관 같은)시키는데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부모들은 공중 질서교육을 하는 것을 등한시하며 많은 교육비를 들여가며 경쟁심만 부추기고 기업은 시장경제의 논리에만 집착한다.
나의 견해는 그것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과 적절치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 잘못된 것은 대체해야 하지만 적절치 못한 것은 그 정도를 조정하여 균형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내심과 함께 전체로서 역할에 따른 관계성의 발달이 균형을 잃어 편중된 것이다. 구조를 조정하는 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향한 노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장기적인 안정과 지속성장을 위한 접근방법이나 배려가 이윤추구라는 것과의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3

학습영역 (learning domain)

인지적 영역(cognitive domain),심동적 영역(psychomotor domain),정의적 영역(affective domain)

이 세 영역의 구분의 핵심은 영역에 따라 학습이나 발달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지 영역(cognitive domain) 이란 감각과정과 지각과정을 합쳐서 부르는 영역이다. 사람의 감각과정은 자극으로부터의 정보를 두뇌에 전달하는 과정이며 지각과정은 정보를 비교분석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다. 감각과정은 감각수용기에 의해 접수된 자극을 신경통로를 통해 뇌에 전달하는 것이며 전달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신호일 뿐이다. 이 신호가 대뇌의 처리과정을 거쳐서 사물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 즉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것’이 지각과정이다. 이런 감각과정과 지각과정이 통합된 인지 과정의 완성은 이해이다.
심동영역은 이런 인지적 판단을 포함하여 무의식화 되고 자동화되어 있는 것들을 행동으로 표현해 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동적인 영역(psychomotor domain)은 내적으로 신경계와 외적으로 근골격계가 연합하는 행동의 영역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행동으로 동일하게 옮길 수 있는 영역이다. 아는 것(이해: understanding)과 행함(수행;performance)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 심동적인 영역과 인지적인 영역의 간격에서 오는 것이다. 건강상태가 양호하고 뇌기능(지능)이 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일반적으로 몸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다. 사고를 행동으로 바꾸어 주기위해서는 신경통로의 개설(목적에 따라 필요한 근육들을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이 필요하다. 이러한 수행을 위해서는 이해가 아니라 반복훈련이라는 신체활동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백미터 달리기와 같은 보다 많은 근육군을 동원하는 움직임에서 사격이나 양궁의 조준력과 같은 미세한 움직임 뿐 아니라 느낌과 앎을 전달할 수 있는 표정과 말도 그러하다 인지적으로 이해하고 치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몸치가 되는 이유는 뇌기능 상태가 비정상이거나 건강상태가 나쁜 것이 아니라 수행을 촉진시키는 기능적인 반복 학습의 결여로 생긴 것이다. 뇌성마비와 같은 뇌기능 장애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신경발달이 고도로 발달하는 유아 또는 아동기에 부모나 주위사람들이 반복학습을 저해한 경우가 그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수저의 사용의 예를 들면 올바른 사용법을 유도해 주고 자기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데 대신 밥을 먹여주거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경우이다)‘
정의적인 영역(affective domain)은 설명이 좀 모호하다. 현재의 인지과학이 정복하려고 하는 최종목적지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정의적인 영역은 인지와 심동의 통합적인 영역이다. 정의적인 영역은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태도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신념, 감정 및 행동 의도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태도란 일종의 선택적 행동의 규준이다. 행동과 연관되어 있지만 행동 자체는 아니고 행동으로서 나타난 것이다.
태도와 같은 정의적인 영역의 발달은 자각과 깨달음 혹은 통찰 같은 것으로 완성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을 때렸다면 당신은 그에 대한 대처로서 다양한 행동이 가능할 것이다. 같이 때리든지, 허허 하고 웃던지, 울던지, 혹은 화를 내든지.. 상황에 따른 인지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대응 능력과 정서적인 반응이 동시에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진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배워서 하는 행동과 깨닫고 하는 행동은 차이가 있다. 조직에서, 시스템에 의한 역할이 그래야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과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포괄적인 이해와 체득에 의해서 하는 행동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정의적인 영역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 체험을 통해서 자기만의 인식의 체계 를 형성해 그 안으로 사실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정의적인 영역은 보다 더 선천적이고 본질적인 존재가 인지적 자아가 이끌고 있는 후천적인 요소와 소통하는 영역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정의적인 측면들은 의식에 의해 수정되어진 의식 밖의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면 태도, 습관, 편견 등과 같은 것들은 거의 무의식적이며 자동화되어 있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의식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4

인지, 심동, 정의적인 영역에 대한 개별적인 정보들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면 충분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 세 영역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을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위 그림에 있는 최적 수행을 설명해주는 도표이다.
현장르뽀 11에서 말한 것처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행위가 환경과 과제(task)에 따른 개인의 주체적인 반응이라고 한다면 미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은 개인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인지 심동 정의적인 요소들의 통합적인 발현이다.
개인의 행동에는 항상 이 세 영역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들은 분리되어 병렬적으로 존재 하면서도 통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적인 도식을 통해서 이 세 영역의 균형의 필요성을 나타내 보았다.
과제(task)를 수행하는 인간의 행동은 그 과제가 가지고 있는 환경(상황과 여건)속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태도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루어진다. 이와 동시에 개인의 내부에서는 외계에 대한 전체성에 따라 자기 내부의 구성요소들의 균형을 찾아 발현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상황이나 과제가 요구하는 행동을 일으키는 세 영역 주체의 수준은 항상 다르다. 예를 들어서 선수가 경기를 하는데 있어서 동일한 상대 선수라도 시합의 중요성에 따라 달라진다. 예선전일 때와 결승전 경기일 때, 수준이 낮은 시합일 때와 올림픽 경기일 때가 다르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작업이 요구하는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동일한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회의석상과 일상적인 회의석상에서 할 때가 다르고 익숙한 내용인지 낮설은 내용인지에 따라 다르다.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능력은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며 또 그 일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다르다. 중요하게 생각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영역보다 광범위하고 다중적이며 병렬적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내가 일하는 곳의 현장에서는 시술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객의 요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반대로 고객의 요구를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시술능력이 부족하면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태도는 물론 고객에 대한 열의와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친절함이나 긍정적인 의사소통의 근거가 되면서 결과를 강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시술하는 사람의 능력은 이 셋의 통합된 것에서 최소값이 된다. 즉 세 요소를 표준점수로 환산하여 놓는다면 최소점수를 받는 값이 그가 실제적으로 발휘하는 능력의 값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은 ‘기록은 최빈 값의 대표치다’ 라고 말한다.

5.

기록은 최빈값의 대표치다.

개인이 어떤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주어진 과제에 대해 발휘할 수 있는 수행수준이 통합적이라면 그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은 이 세요인의 가장 약한 값이 된다. 그래서 ‘기록은 최빈값의 대표치이다’ 라고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펜싱경기는 체급이나 체격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부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준이 낮을수록 힘이나 체격조건이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수준이 높아지면 기술적인 세기와 전술적인 대처로 인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 2m 가 넘는 장신들은 결승에 이르지 못한다. 균형을 갖추기 어려운 장점은 수준 높은 차원에서 약점이 되는 것이다. 고급관리자가 일의 전문성 뿐 아니라 폭넓은 인간 관계와 유연성을 갖추는 것은 그러한 균형을 갖추므로 인해서 다양한 현안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싱코치나 야구 해설가들이 선수들보다 인지적으로는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역할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요인들의 균형에 의해 지배된다. 얼마나 행동할 수 있느냐? 혹은 실천할 수 있느냐? 는 인지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많이 알고 잘 행동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성이나 정서상태에 따라 또 다르다. 잘 알고 잘 풀 수 있는 문제도 수능시험장에서 풀 때와 모의고사로 풀 때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언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의적인 영역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값들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행동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한계는 최빈값이다.
생리적이고 신체적인 것일수록 최빈값에 좌우되는 것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기술이나 체력과 같은 것들이 높은 수준에 이르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이 결과를 좌우한다. 이러한 균형을 이해하는 것은 훈련이나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만 경기의 극한 상황에서의 전술적인 의사결정에도 도움이 된다.


5.

통합적인 접근을 생각하게 된 이유

물론 나의 연구는 보다 우수한 펜싱 선수를 키우고 그들이 삶과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학습과 훈련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동물을 사육하는 듯한 그런 맹목적인 훈련이나 힘없고 설득력 없는 가치나 의미중심의 허울 좋은 자기위안 같은 과정중심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할 수 있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것’ 이나 ‘이해는 되는 데 실현 할 수 없는 것’을 보완 하려는 노력이었다. ‘철학’과 ‘실천’이라는 모호한 구분보다는 ‘왜’와 ‘어떻게’ 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적 기틀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다.
스포츠 사회가 실제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이러한 원리는 동일하게 다른 세계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유추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아가 포트폴리오나 미니어쳐 처럼 전체를 이해하여 효율적인 적용과 응용이 가능 하리라고 본다.

나는 운 좋게 어린 나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코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또 나의 주변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던 (양궁, 레스링, 유도, 숏트랙 등의 지도자들과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능한 연구원들, 해외 우수학자들의 초청강연등...)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있었고, 또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호의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론과 가설들, 그리고 훈련 방법론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것들을 실제로 경기와 훈련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통합적인 체계가 필요하게 됐다.
비록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검증이 부족하더라도 선수의 삶이나 행동에 관하여 납득이 갈만한 일관성 있는 규준( criterion : 어떤 사물의 적부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는 근거를 만듬으로 인해 구체적인 접근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즈음에 와서 통합이라는 단어는 세분화와 함께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각광받지만 그 시절에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어리석은 화두였다. 전문화와 배치되는 한심한 생각으로 치부되었다.

6.

전인적인 선수란?

전인적인 선수란 어떤 선수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게 답하고 싶다. 전인적인 선수란 성공적인 선수생활의 수명이 긴 선수를 의미한다.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 대부분은 실제로 좋은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10년 이상을 유지했다. 어떤 선수는 올림픽에 4번이나 출전을 하고 마지막에는 입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에게 붙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균형을 갖추게 하면 후에는 자기학습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가치, 의미같은 철학적인 관념들과 기술의 방법론적인 이해력을 증진시켜 훈련의 성실함과 집중력을 높여주면 선순환의 궤도를 갖추게 된다. 헝그리 정신이나 재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선수들은 목표를 달성하면 훈련의 지속성을 유지 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슬럼프나 후유증을 겪게 되고 대부분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들은 지도자로서도 긍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재능은 선천적인 요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후천적인 열정과 집중이라는 지속적이고 성실한 노력에 의해서 완성 된다. 대부분 직장을 자주 옮기거나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균형에 있어서 편중된 경우가 많다.
신동으로 불리던 억만장자가 된 축구 선수의 파행적인 삶은 선수 생활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생활태도의 불균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말해 준다. 프로선수들의 경기 결과에 의존하는 균형을 갖추지 못한 삶은 종국에는 마약이나 알콜 중독, 지나친 폭주, 파행적인 생활태도 등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갖추지 못한 생활이나 행동은 삶을 비극으로 끝마치게 하는 것이다.


6

균형을 갖추고 있는 상태는 실재(實在)로 존재하지만 실체(實體)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합’ (생각의 탄생에서는 종합지(synosia)라고 말하고 있고 브룸 학파의 분류는 메타인지(meta cognition) 라고 말한다)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고 본다.
‘현장 르뽀 8’의 넥커 큐브(Necker cube)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통합적인 상태란 실재(實在)로 존재하지만 실체(實體)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해되거나 행동할 수 있거나 자각할 수 있는 상태일 뿐이다.
한국 축구는 골 득점력이 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골 득점력이라는 통합적인 개념은 존재하지만 골 득점력 자체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급박한 문전처리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구성하고 있는 인지, 심동, 정의적인 요소들 중에 가장 취약한 부분(최빈값)을 보강해가면서 골 득점력이라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평형 상태를 수정해야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에서는 이것을 ‘개념적 정의를 조작적 정의로’ 바꾼다 라고 말한다.
총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로서 몸과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다. 실제로 행위를 통제하고 있는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을 총괄하는 보다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주체다. 의식하는 인지적인 자아란 실제로 행동하는 주체가 도구로 사용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있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아의 상태를 수정한다고 해서 실제 행위나 행동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행동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한 경우는 인지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심동과 정의적인 능력의 불균형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마음도 통합의 형이상학적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언어 개념의 도구를 사용하여 활동하는 인지적인 자아의 총체적인 면모를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르지만 그 마음 자체를 수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신수(神秀)의 게송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
莫使惹塵埃(막사야진애) 티끌 일지 않게 하리라.

혜능(慧能)의 게송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디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선종 6조 혜능이 존재하지도 않는 마음을 거울처럼 갈고 닦는다는 신수의 게송을 비판하는 것처럼 자아를 직접 수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른 말로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의식이 만들어 내는 ‘생각을 바꿔라!’ ‘마음을 바꿔라!’ 는 말은 생각 자체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이루고 있는 인지, 심동, 정의적인 요소들의 균형을 수정하여 결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상이 제시하는 것은 수정이나 개선이 아니라 ‘관조’ 즉 바라보는 것이다.

7.

실천적인 행동은 보다 더 통합적이다.

미시간 대학의 임상심리학자 댄 굴드의 연구에 의하면 성공한 선수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꼽는다.

1. 동기화
2. 자신감
3. 긍정적인 사고
4. 준비된 에너지와 계획

이 네가지 중에 인지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주 미미하다. 거의 대부분이 심동적인 요소와 정의적인 측면이며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동기화는 인지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는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며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능력과 훈련이다. 긍정적인 사고도 준비된 구체적인 계획과 함께 활력이라는 인지 외적인 요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지적 이해란 실제 행동을 일으키는 보조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도 한 개인은 비록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행동은 진행되어 질 수 있고 발달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의 완성을 위해 깨어 있는 모든 현자와 스승들은 실천을 강조했다.


8.

동양적인 심리학으로서 인간 행동에 대한 접근


동양의 심리학적 접근방법들은 직접 체험이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자기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지적인 이해란 자기인식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구분하여 보다 명확하게 해주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체험이 없는 지적 이해란 행함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적인 이해가 타인에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체험을 적절히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자기인식의 유용한 도구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원리나 법칙에 의한 지식이나 신화나 전설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자기인식을 강화하는 동일한 도구인 것이다.

펜싱을 하는 나의 태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지극히 서양적인 것에 대한 지극히 동양적인 접근’이었다.
펜싱을 통해서 삶을 완성해보려고 했던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을 경험했다. 검을 다루는 사고방식이나 훈련방식 그리고 숟가락질을 하고 힘을 쓰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를 실감했었다. 균형을 중요시하게 된 나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무상신검’이나 ‘무당검법’같은 동양적인 검법들은 공감이 가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방법이 모호하고 난해하다. 서구적인 검법들은 보다 대중적이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정신이나 가치에 관해 접근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승리’ 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치밀하고 정교한 인간 행동의 메카니즘을 이해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 뿐아니라 삶과 인생과 세계에 대한 명확하고 굳건한 철학과 가치관이 직접관여 한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서 도전하지만 꿈과 희망에 확신이 있기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9.

못해서 안 하는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이다.
-심형래-

나는 훈련을 하거나 시킬 때는 말을 거의하지 않는다.
농담도 잘 안하고 웃는 일도 별로 없으며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거나 선수를 때리지도 않고 욕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새로운 기술 렛슨을 시작 할 때, 전술이나 전략을 설명할 때 , 그리고 동기화를 시킬 때다. 이 셋이 관련되면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설정된 목표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셋이 관련되면 말이 많아 진다.

왜냐면 이 셋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고 어정쩡하면 오히려 모르는 것만 못하다. 가슴떨리는 실전에서는 당연히 쓸 수가 없다. 어설프게 껍죽데다가 아주 작살이 난다.
전술이나 전략은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효율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거기다가 확률적으로 떨어질 뿐아니라 기술적인 시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더구나 실전에서는 급박한 상황이 되면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전술 전략적인 판단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행동으로 옮겨지기는 커녕 생각자체도 나지 않는다.
동기화가 되어있지 않은 선수는 정말로 가르치기가 어렵다. 훈련에 관한 태도 즉 정신적인 인내심, 신체적인 지구력, 그리고 기술적인 시도나 상황에 대한 판단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영향을 미치는 않는 곳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렇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누가 열심히 하겠는가?’ 이다.

행동이란 특히 극한 상황에서의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란 의지나 저돌적인 용기만으로 되지 않는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자동화되어 있고 상황의 흐름을 통째로 읽고 순간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라면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이 선수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데, 확실히 이해하고 죽도록 해도 될 똥 말 똥인데 ,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고‘ 라는 말이 있을 법 한가? 나는 절대로 그런 도박은 안 한다. 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행동하라는 것은 눈감고 가파른 벼량길을 뛰어가라는 것이나 똑 같다. 당신이라면 그런 요구에 응하겠는가? 거기다가 이길 수 없는 시합에 나가라는 것은 자살하라고 등 떠미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말이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나? 말이다.

운동수행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균형상태 중요성의 비중이 높아진다. 거기다가 선수의 이해 수준과 능력은 개별차가 심하고 특성도 각각이다.
그들이 어떤 동일한 기술이나 전술 혹은 동기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각각이다. 그래서 나는 온갖 방식으로 설명을 한다. ... 알아 듣고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방법이 안되면 저 방법으로 그것도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 가설, 이론, 전설 신화, 비데오 자료, 시사적인 내용, 무엇이든 총동원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형래 씨의 문구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후일에 깨닫게 된 것은 그건 선수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 잘못 가르치거나 잘 못 알고 있어서 선수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되면 될 때까지 한다’ 가 내 생각이었고 미련스럽게 노력하던 와중에 깨달은 사실은 잘 못된 것은 천년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소질이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똑 같은 말을 수 백번 한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1년간을 훈련했는 데 시합장에서 선수가 단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왜 멀쩡하던 선수가 시합장에서는 자기 칼을 손에 들고 칼이 어디 있지? 하고 찾고 있는가? 그런 선수가 시합을 잘 뛸 리가 없다. 이러한 경우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경우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래서 조금은 더 효율적인 분석과 판단 그리고 훈련을 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방법이 최적 수행을 위한 평형(equilibrium)상태였다.
그것은 ‘못해서 안 하는게 아니라, 할 줄 몰라서 안 한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못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높은 수준의 선수들은 대부분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끌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할 줄 모르는 것은 어느 한 요인이 아니라 전체적인 균형의 문제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천재나 일류와 같은 탁월함속에서는 ‘우연’ 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천재성과 지속적인 성과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10

사실 나의 글쓰기는 내가 봐도 어리버리한 경우가 많다. 중언부언하거나 산만하고 자꾸 늘어진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나는 몇 날을 두고 쓰고 고치고 또 쓰고 또 고치다가 정리가 안 돼서 묻어둔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스스로 잘쓰는 방법도 배우지만 나름대로 특성을 살려서 쓰기 위해서 이런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 그 원인을 찾을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몇 가지 그럴싸한 사실들을 찾아 냈다.
그 중의 하나가 글쓰기 공부를 하다가 보니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랬었구나,,,
하나의 주제를 놓고 깔끔하고 일관성 있게 정리하는 것이 글인데 내 글은 문어체도 아니고 구어체에다가 졉속사 접속사에 끝없이 길어진다. 오로지 그 하나를 위해서 중언부언하게 되는 것이다.
나름의 글쓰기의 틀을 만들 때까지는 몰라서 못하게 된 것이고 이제 원인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못하면 안 해서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문학적인 것은 과학적인 방법론에 대비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 상호보완한다. 내가 주관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근거로 인식한 것들을 보편화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잘 정리되고 정의되어진 가장 근접한 개념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인용문, 법칙이나 원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재해석했다.
왜냐면 하나는 먹어보지 않은 밥맛을 먹어 본 모든 음식의 맛을 동원해서 설명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 본 밥 맛을 가장 가까운 음식의 맛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나의 해석은 이렇다.
‘사실로부터 출발해도 정확한 개념에 이르지 못하고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도 사실을 완성하지 못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체험하고 지식을 통해 이해를 보강하여 자기인식의 체계에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고 판단한 것을 사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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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떻게든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로 시작했지만 누군가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전개하기가 좋았다. 비록 구름위에서 헤매인다고 하더라도 골치아픈 이야기를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이 나에게 노력을 하게 했다.
말하듯이 구어체적인 글을 쓰고 완전히 기억속의 생각으로만 썻다. 후일에 관련된 문헌이나 근거들을 찾아서 보강할 계획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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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8.01.04 05:40:37 *.128.229.81

백산은 오래 전에 깨어 있었구나.

노자의 말이 백번 옳지만, 그러나 불완전한 말로 잡아보려는 노력이 안스럽고 사랑스럽지 않느냐. 글이 대중적이려면 '동양적인 것을 서양식으로 표현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글이 명상이 되려면 글을 버려야 하고 명상이 글이 되려면 불완전함을 허용해야한다. 그러니 글이 비루해 지는 것을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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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8.01.04 07:41:11 *.253.249.10
"白山의 글을 읽으면 백산의 삶이 보인다."
너무 아름답게 쓸려고 하니 대중이 읽지 못하고, 너무 너무 잘 살려고 하니 외로워 졌다. 한세상 사는 것이 별것 아니데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 정말 독서를 많이 하는 친구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백산선생!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4기연구생 지망은 어떨련지... 한 일년 고생하고 나면 엄청 큰 변화가 올 것 같은 데, 안 되겠는가?

그러면 글쓰기도 별 것 아니고 아는데로 편하게 쓰가는 걸 일상화 할 것인데...

6조 혜능 대사의 일화는 나역시 일생을 살면서 욕심을 버리는 삶의 좌표가 되었다네. "원래 거울에 먼지가 어디에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원래 때가 어디에 있으랴." 오랜만에 좋은 글 읽었네.

그런데 글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펜싱도 힘빼기 3년은 걸리는 것과 같이 말 일세.

꼭 연구원 지망을 해보게나. 남해바다를 보면서 겨우 생각해낸 걸 전하네. -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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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1.04 08:46:11 *.70.72.121
나에게는 백오랄지 백산이랄지 이런 친구들이 있고, 여기 이곳 변.경.연이란 곳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나 같이 모두 골치가 아프다.(? )어제는 행자와 통화를 하다가 에너지가 달려서 그만 씩씩 대고 말았다.ㅋ

나도 그렇다. 이 무수한 부적응자들... 하며 웬수 같이 생각을 하자는데, 우리는 그래도<창조적>인 사람들이야를 옆에서 또 고집한다.

그래도... 라.

백산의 아름다움은 머리카락에만 있지 않다. 그의 건장하고 육중한 소위 몸매에만 있지 않다. 조각 같은 얼굴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것, 누군가에게 필이 꽂히면 주루룩 눈물처럼 퍼붓고 쏟아내는 빨래줄 같은 열정이 스멀스멀 온 몸에 배어있다.

온 우주를 껴안으려는 허영과 순결한 아름다움을 보면 참지 못하는 허세,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연민이 있다. 나는 나의 허영과 허세 때문에 늘 부끄러웠고 또 그것 들을 알게 모르게 이어가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 인해 고달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아침 벗의 글을 대하면서 다시금 용기를 내어 보고자 한다. 더불어 그가 자기 연민을 포함한 타인에게 미치는 사랑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도 거침없이, 힘들지만 변함없이, 지금처럼 계속 나아가 주기를 당부드린다. 그것이 자신을 완성함과 동시에 또 다른 자신, 즉 나와 같은 벗에게도 용기와 희망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언젠가도 이렇게 써내려 가는 글들을 보았다. 그 열정은 사랑을 넘어선 갈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벗이여, 부디 멈추지 마시라. 그대보다 더 미흡한 내가 있고 아직 익숙치 않은 미수련의 정녕들이 또한 많지 않은가. 들어야 한다. 그들의 울부짖음과 삶속의, 생활속의, 일상 가운데의 진리를 찾고 깨닫고자 하는 평범한 욕심과 허영 그리고 허세를.
하여, 누군지 모르는 이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한걸음에 내닫는 이들의 행운에 기여하고 또 그들로부터 우리는 다시 배워나가야 한다.

새해 벽두부터 삶이, 생활이란 것이 만만치 않게 또 나를 옥죄려 하고 나는 자유로운 일상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오늘 그대의 글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또한 아직 훌훌 털어버리지 못한 아쉬움과 갈증도 느꼈다. 그래서 더 편안한지(?) 모르겠다. ㅋㄷㅋㄷ

우리의 뜻은 한걸음에 모두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사상이 차곡차곡 천천히 각인 되어 왔듯이. 그러나 어느 날엔가 섬광처럼 깨달음의 행운을 선사해 줄지 모른다. 쉼 없는 오늘 같은 노력이 거치지 않는 한에는. 그처럼 필요로 하는 그 누군가에게 어떻게든 영감으로 닿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멈추지 않는 다는 것, 절연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백산은 앞으로도 오래 깨어있어야 하고 그럴 것이며 그래야 한다. ㅋ 왜냐하면 그로인해 내가 편안하다. 배울 것이 많아지고 애써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보지 않고도 이치를 얻음이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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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8.01.04 09:19:40 *.152.82.96
너무 어려와요.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때 잠자야지.

이케 쉽게 쓰면 누가 잡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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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8.01.04 15:55:54 *.46.151.24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아마 기초지식없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잘못된 경험때문에
많은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 무미건조한 전문서적들의 기계적인 개념들 때문에 더욱 숨통이 막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의 그늘에서 글공부를 하면서 참다운 글공부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눈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참된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설픈 경험으로 불평하고
분노하고 몸부림쳤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반성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인문학적인 연어들이 주는 생명력은 참으로 환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생하게 글을 쓸수 있다는 말인가?, '
'어쩌면 이렇게 마음 속을 들여다보듯 그렇게 조목 조목 정리할 수 있는가? '

스승님 그리고 초아선생님만 뵈도 그렇고 또 베스트 셀러들의 많은 글들 속에서도 그런 배움을 얻게 되었기때문입니다.

엉뚱하고 엉성한 모방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 20년이 남았으니
서둘지 않고 노력해서 끝에 이르고 싶습니다.

초아선생님!
제가 어려서 부터 골목대장 노릇처럼 항상 선택하고 행동햐아만 하다보니 글 쓰는 데도 버릇이 튀어나오나 봅니다.

세상 온갖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밝히던 선생님의 글구들이 편안하고 소담하셨는데, 저는 항상 선수들 가르치는 것처럼 산만하고 결론짓는 듯한 글을 쓰는 저의 태도에 대해서 반성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작년에 연구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서울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2월에 졸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하다보니
균형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또 일년을 기다려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님과 초아 선생님을 간간히 뵐 수 있어서 기뻣습니다.
두 분의 그늘 아래서 목놓아 소리치고 눈물짓던 시간들,,,
그리고 변경연과 꿈두레로부터의 배움들은 앞으로의 삶을 밝혀주는 빛이라고 확신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새 해 복많이 받으시고 더욱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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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8.01.04 16:03:47 *.46.151.24
써니... 알제?

자로... 나가 그렇게 똑똑했으면 세상이 뽀개져도 몇 번 뽀개졌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게...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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