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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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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6일 20시 31분 등록
아침에 일찍 일어났지만 새벽 목욕을 갈까 잠시 기다렸다가 독서실(우리 동네는 일요일엔 오전 10시가 되어야 개방을 함)엘 갈까를 망설이다 그만 하루 반나절을 공쳐버리고 말았다. 흐릿한 날씨가 벌써부터 조금 있으면 어둑해 질 거라는 암시를 내게 전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잠에서 깨고부터 아랫배가 살살 자꾸만 나를 이불 속으로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뻑적지근한 허리도 좀 더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배시시 나를 꼬시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께서 무료치료를 다니신다고 하시고는 결국에는 비싼 치료기구를 사다가 내 이부자리에 깔아주시며, 당신께서는 내가 집에 없을 때만 사용하시기에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그걸 둘둘 말고 지낸다. 덕분에 따끈한 그 놈을 허리며 아랫배를 지지는 데 곧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당신께서 “너 맨 날 허리 아프다고 해서 내가 마음먹고 샀다”고 하실 때만 해도 내가 이놈을 이렇게 끼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무료치료가 미안해서 한방에 덜컥 바가지를 쓰고 사시고는 미안해서 내 핑계를 대시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연구원과정을 하면서 리뷰나 칼럼을 쓸 때도 선배들은 매일 꾸준히 하지 않아 날밤을 새게 되는 거라고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천상에 ‘임박형’이어서 그런지 한 주일에 한두 번은 날 밤을 새곤 하였다. 어떤 때는 좀 일찍 한가하게 시작한 것 같은 데도 거의 마감에 이르러서야 마무리 정리를 하게 되고는 하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나면 뭘 하느라 컴퓨터 앞에 꼬박 앉아 있곤 하다보면 날이 새어오기도 한다.

이제 이 나이가 되면 살갗을 부비는 연애는 좀 싱겁지 아니한가? ㅋ
나는 많은 책을 읽지는 못하였지만 연구원이라는 과정을 하면서 연애를 한 느낌이 들곤 한다. 외간 남자와 대작을 하며 공연히 상대방의 안주인까지 의식을 하거나 멋진 사람들과 시간을 들여다보며 초조한 기색으로 무화가 나무 아래서 몰래하는 데이트보다 책 속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편안했다. 그리고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이 때로는 새콤달콤히기도 하고 슬프고 성나는 갖가지의 풍경들에 반응을 일으키며, 시시각각으로 질펀하게 뛰노는 재미도 자못 삼삼해서 나는 이곳을 즐겨 애인 만나듯 들락거린다. 힝~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날에는 인용문 길~게 쓰느라고 날 새고, 어느 날에는 여기 저기 올라온 글 읽느라고 날 새고, 어느 날에는 책장은 안 넘기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생각의 실타래만 줄기차게 풀고 있다 보니 어느 덧 날이 새곤 하였다. 신기한 것은 누가 날더러 밤을 새라고 한 적은 없지만 그 일이 싫지 않았다. 또한 이 나이쯤 되어 밤을 어찌 새느냐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 기분이 우쭐해지기도 한다. 나는 한 주일에 한두 번쯤은 밤을 새는 것이 힘들지 않으니 말이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재미에 빠져서 살았기 때문에 연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아서 허리며 지병(?)으로 때만 되면 배가 아플 때도 예의 그 무료치료 기구점에서 비싸게 사온 치료기구가 어찌나 요긴하게 쓰이며 좋았던지 모르겠다. 게다가 모친의 뻗치신 정성으로 덕분에 내가 긴요하게 사용하게 되면서 그 깊으신 뜻이 절로 전해지더라 하는 그런 말씀이 되기도 하겠다.

그런데 사실 내가 울컥 이 글을 쓰고 싶어진 계기는 그것이 아니고 못 말리는 팔순의 우리 오마니의 돌출 발언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요즘 자서전을 읽고 있는데,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인지 책 두께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씩 마셔대는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직 덜 깬 탓인지 미처 흥미를 갖지 못하고 뒹굴 거리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 사이 나의 오마니께서 “네가 읽는 책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시며 자꾸만 들춰보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냥 책 껍데기나 구경하시다 마시겠지 했더니만 내가 자리만 비우면 내 책을 읽고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거 나도 읽겠다.” 하시는 것이 아니신가?

어마야, 깜짝이야. 세상에나. 우리 오마니께서 드디어 이런 말씀까지?
칠순에 겨우 한글을 배우고 익히기 시작하셔서 더듬더듬 읽고 쓰고 해오시던 양반께서 이번 대선에서는 연일 방바닥에 신문을 펼쳐놓으시고는 내가 외출했다가 들어 가면은 정치이야기를 배꼽을 잡으시면서 해 주시질 않나, 자다가 깨서 보면 새벽녘에 곁에서 오마님의 조간 신문 읽는 소리에 잠이 깨지질 않나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만 급기야 오늘은 마르께스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책의 앞부분을 읽으시며 “재미있겠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좀 더 얇은 시집을 한 권 전해드리고는 내 방으로 건너와 이렇게 컴퓨터 앞에 갑작스레 앉아 우리 집의 풍경을 털어놓는 바다. 연구원 생활이 우리 집 팔순 노모에게까지 독서열풍을 몰고 왔다는 이 사실이 어찌나 예사롭지 않던지 말이다.

한 4~5년 열심히 한글을 익히시고는 눈도 침침하고 잘 안보이신다시며 한동안은 별로 쓸모가 없는 듯 한구석에 팽개쳐 두셨다가 겨울 들어 얼마 전 눈 검사도 괜찮다고 하니 다시 용기를 얻으시는 것 같다. 겨울이면 날도 춥고 길도 미끄러워 사실 바깥나들이는 여러모로 무리가 간다. 노인들에게 찬바람은 자칫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집에만 있자니 또 답답하실 것이다. 일부러 두부 한모를 사시며 시장을 둘러보시고 운동을 하시기도 하지만 별반 재미나는 일이 없으신 모양이다. 그러다 요즘 나와 더불어 점점 독서열풍에 빠지신다.

게다가 중얼 거리시면서 하시는 말씀, “네 아버지는 그 나이에 늙은이들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여자 둘이랑 남자 둘 동창끼리 짝 맞춰 놀러 가신다고 나가셨는데 말이지, 나는 추워서 밖에 나가기도 싫고 책을 읽으니 재미있네.” 하시는 것이 아니겠나. 아침에 오마니께서는 아버지의 겉옷을 챙겨 입혀 보내셨다. 여든 넷, 아버지의 노익장도 멋지지만 오마니의 노익장은 게으른 일상의 젊은 여식에게 정초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의 오마니께서 시집을 읽고 계실지 마르께스의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무려 700여 페이지의 이국인의 자서전에 도전을 하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노인께서 그 침침한 눈을 가지고 가느다랗게 눈을 떠가시며 창문의 햇볕가까이로 책을 끌고 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지 아니한가. 더군다나 책의 두께조차 만만히 보심에야 절로 고개가 가로 저어진다.
한 해 동안 나만 변.경.연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만이 변.경.연의 연구원은 더욱 아니었나보다.

못 말리는 팔순 노모의 열정이 새삼 흐뭇한 가운데 겨울 땅거미가 나지막이 내려앉는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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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1.06 21:21:56 *.72.153.12
오메-

써니 언니는 어쩔 수 없다. 그냥 1년 더 독서하는 게... ㅋㅋ
세상에 변.경.연.의 전도자로서 활동하는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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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1.07 06:11:41 *.70.72.121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p135

전도사? ㅋ
어느 부분에선가 글쓰기는 가히 종교적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가족을 전도했다면 나쁜 일 아니지? 어느 면에서 가족은 가장 냉철한 비평가 이거든, 더군다나 우리 오마니는.

오마니의 "재미있다"가 순간 뭉클하더라고. 나중에 오마니의 소감을 당신의 목소리로 옮겨볼까도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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