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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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 써요.
당신과 함께였다면 더 예쁘고 기쁜 우리들의 이야기를 썼을 테죠.
우리 헤어지던 날
두려움에 떨며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가만히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진 노오란 종이를 꺼내들며 파란 빛깔의 잉크가 묻어나는 만년필로
즉각적으로 뇌리에 스치는 11가지를 길게 세로로 적어주었더랬죠.
당장에 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해봄직한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
기억나세요?
그 중에 작가라는 말도 끼어있었어요.
당신과 함께 짧게 사는 동안 참 많이 싸웠죠.
그러나 단 한 번도 편지 따윌 띄워본 적 없죠.
잡지 한권 펼칠 평화도 별반 갖질 못했어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내가 글을 쓰게 될 것이란 것 말예요.
당신 적어준 그 몹쓸 종이, 제법 오래 간직하고 있었어요.
가끔씩 펴보다가 한숨이 숨통을 짓이기던 어느 날,
당신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던 우리들의 처절한 싸움의 한 장면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집어 들어 힘껏 패대기를 쳐버렸죠.
이룰 수 없는 일이고 부질없다고, 당신 생각을 접으려는 것이었죠.
우리 헤어진 후 8년차쯤의 어느 벼랑에서 일거에요.
내게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예감하고 무서워서,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고 말았죠.
그런데...
지금 나, 글 써요.
그저 단순한 사실에 지나지 않죠.
아직 시집 하나, 책 한권 꾸며본 적 없죠.
방금 전,
연구원 아우의 전화를 받았어요.
서문 썼으면 이미 책 쓰기 시작한 것 아니겠느냐며,
자기는 북까페에 들러 밀린 책읽기를 하고 집에 들어가려 한다고.
문득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당신생각이 났어요.
아마도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죽었던 당신이 나에 의해 수없이 처형당한 당신이,
내 앞에 이글거리며 살아나
어떤 날은 칼을 휘두르고, 또 어떤 날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다가오겠죠?
나, 이 일을 어떻해요.
어떻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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