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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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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6일 16시 21분 등록
구정(365-35):나를 설레게 하는 명절

구정(舊正)은 설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신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설이 두 번 있다. 신정과 구정이 그들이다. 신정은 양력으로 한 해의 초하루이다. 달력의 첫 날이 신정이다. 하지만 신정은 설로서 가치를 잃었으며 명절이 아니게 되었다. 한 해의 계획을 잡는 날 정도로 쇠락하였으니 말이 신정이지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날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명절은 구정이다. 3일간 연휴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가위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다. 한 해의 시작이니만큼 차례를 지내고 부모나 웃어른을 찾아 절을 드리고 덕담을 나누는 날이기도 하다.

구정은 우리나라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온 명절 중에 명절이었다. 이 날은 차례를 지내는 것은 물론 아이들은 새 옷으로 단장하고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드렸다. 이 날은 떡국으로 이웃을 맞았고, 시루떡을 올려놓고 신에게 빌기도 했다. 윷놀이로 감흥을 즐겼고 아낙네는 널뛰기로 마음을 부풀렸으며 사내들은 연날리기로 몸과 희망을 날렸다. 민족적 정기를 지피우는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민족적 동질감을 단절시키기 위해 구정을 말살하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한다. 서양의 태양력을 사용하자 양력설로 바꾸고 음력설에 대해 각종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수 천 년을 이어오며 민족의 가슴에 서려온 관행이 쉽게 바뀔리 만무했다. 구정은 나라 없는 설움조차 초연하는 위대한 명절이었다. 그럼에도 광복이후 신정을 명절로 유도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내 돌아왔고 1985년 민속의 날로서 공휴일로 지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3일 연휴의 명절로 안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들의 품으로 들어온 구정에서의 설은 무슨 뜻인가. 설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이라는 글자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좋은 뜻도 담겨있지만 어설픈 뜻도 그에 못지않다. 우선 이 말이 '서럽다'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럽기도 하고 차례를 지내면서 떠나신 조상에 대한 서러움이 가득해서 그랬다한다. 분명한 것은 추위와 가난이 일상사였던 그 옛날이기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물질적 풍요로 대변되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설픈 해석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가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다. 설은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 정초부터 조심하고 신중하는 일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예(禮)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던 시절에 항상 품행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덕목보다 우선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윷놀이와 널뛰기 그리고 연날리기 등 다른 날보다도 역동적이었음을 든다면 이 설(說) 또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설은 소극적 움추림이 아니라 적극적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나이를 댈 때 몇 살(歲)하는 '살'에서 비롯됐다는 말이다. 우랄 알타이어계통인 우리 말은 산스크리트어, 퉁구스어, 몽고어와 같은 계통인데 산스크리트 말에서 '살'은 해가 돋아나듯 '새로 돋고 새로 솟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정초와 직접 관련이 있고 '몇 살 몇 살'하는 살이 나이를 뜻하는 연세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왜 살이 설로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살날'하면 되지 굳이 '설날'로 변경할 이유가 없다. 멋과 맛이 엄청난 차이가 있고 너와 나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설다. 낯설다' 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라는 정신·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서 '설다'의 의미로, 낯 '설은 날'로 생각되었고, '설은 날'이 '설날'로 정착되었다. 곧 묵은해에서부터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 가는 전이과정에 있는 다소 익숙하지 못하고 낯설은 단계라는 의미이다. 그럴듯하다. 아직 접하지 못했으니 익숙할 리 없고 익숙하지 못하니 설익은 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설은 설레임의 '설'이 아닐까 한다. 새 해의 첫 아침이기에 설레인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웅대한 계획을 세우는 날이기에 설렌다. 변화의 단초가 이때 시작된다.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만남도 이 날에 이루어지기에 가슴이 설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새로운 바람이자 희망도 이날 작성되기에 그 어떤 날보다도 벅차고 격동적이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며 미래의 나래를 펼치는 날이기도 하다. 설은 몸과 마음의 용틀림을 올곧게 세우는 날이다. 그래서 설레고 또 설레는 날이다.

글자가 주는 영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인성(人性)의 차이로 인해 커다른 간극을 맛볼 수 있다. 설의 하루가 설레임으로 가득할 때 변화는 시작되고 작은 혁명은 일어날 것이다. 그 설날이 오늘이라면 삶의 활력소로 작용되리라 확신한다.
IP *.18.1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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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2.06 19:34:38 *.70.72.121
내용 좋아요. 선배님.
재미있고, 나름의 견해가 들어가니 의미도 있고.

우리 식구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대청소하고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저녁 일찍 해 먹고 낼 아침에 큰댁에 제사 다녀오려고 차비하고 있네요.

글을 읽고나니 왠지 새로운 설레임으로 새날의 봄을 맞는 기분이 들어요. 선배님도 올 한해 설레임 가득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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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08.02.07 00:48:45 *.207.136.252
잘 읽었습니다. '설'이라는 한 글자에 많은 뜻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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