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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4일 11시 27분 등록
길-인생의 영원한 등불(365-42)

길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다. 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길은 육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 높은 하늘에도 길이 있어야 한다. 항로가 없으면 비행할 수 없다. 한 치를 벗어날 때 오는 참혹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길은 육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 항해는 뱃길을 담보한다. 길에서 벗어나면 성난 파도를 만나고 해일과 조우한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은 길이 없으면 운신할 수 없게 되었다. 길은 모든 사람의 햇불이 되었다.

인생에도 엄연한 길이 있다. 삶의 길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헤매게 된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길을 찾는 일이 간단치 않다. 기나긴 시간동안 길을 찾지만 만만치가 않다. 물론 자신의 재능을 미리알고 일찍 길에 접어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수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직장에 다녀보기도 하면서 인생길을 찾는 일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한다.

설령 인생길을 찾았다 하더라도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 고난과 역경이 기다린다. 이를 파헤치고 뚫고 나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가다가 지치면 이 길이 아닌가 의심해보기도 한다. 잘못 들은 길이 아닌가 원망도 한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마음을 뒤덥는다. 그만큼 인생길이 험하고 고단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갈등과 번민을 적절하게 표현한 시가 하나 있다. 바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rd not Taken)'이다. 제목이 그렇듯이 자신이 걸어온 길보다는 걷지 못했던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생길은 늘 두 갈래 이상이다. 우리는 길 모두를 갈 수는 없다.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하는 순간이 닥친다. 바로 여기에서 인생의 고뇌가 싹트고 한계를 느낀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자연의 길과 인생의 길을 통해 외연적 풍광으로 내면적 음영을 비춘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함으로써 가능성을 갖게 된다.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에 있는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라는 시구에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비추고 선택한 길로 인해 나의 인생이 달라졌음을 암시한다.

'길'은 인생의 주제이다. 우리의 삶을 제약하기도 하고 꿈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길을 가다가 겪는 시련과 좌절, 그리고 꿈과 희망이 엇갈리면서 인생이 빛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선택한 길에 대한 깨달음이다. 자신이 걸어야만 하는 길에 대한 성찰만이 본질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길밖에 갈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밝히는 일이다. 결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를 두지 않는다는 전제만 있으면 말이다.

수많은 선현들이 길에 대해 논했다. 길은 철학의 화두요, 사상의 첨병이다. 철학자의 재료요, 사상가의 원료였다. 한 나라의 미래였고 조직의 사명이었다. 오늘을 사는 모든 논객들의 입방아 오르내렸다. 이데올로기에서도 길은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예견한 다니엘 벨은 탁월했지만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변형되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제3의 길'을 쓴 영국 최고의 석학인 앤서니 기든스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라는 구호아래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축소를 원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가의 확장을 원했다. 제3의 길은 '정부를 적이라 말하는' 우파와 '정부를 해답이라고 말하는' 좌파를 넘어서 국가를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에 의한 부의 축적을 옹호하되 공공부분과 시장부분의 윈윈을 강조했다.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적절한 조화를 표방한다. 이 길만이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길임을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지나친 부의 축적은 빈부의 격차를 초래했고 이질감을 키웠다. 지나친 평등을 강조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창조성과 생산성을 간과했고, 시장경제를 무시했다. 자본주의의 편향성과 사회주의의 획일성은 합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프랑스의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인간적인 길을 모색한다.

그의 명저 '인간적인 길'에서 앤서니 기든스가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건설이 바로 인간적인 길이라 말한다. 좌파니 우파의 정치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토머스 모어가 예언했던 유토피아가 300년이 흐른 지금 영국에서 실현되었듯이 자신의 신유토피아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빛으로 환하게 발할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 신유토피아가 바로 새로운 사회주의의 건설이며 이것을 인간적인 길이라 명명한다. 인간적인 길이란 체제건설에 앞서 개인에 대한 모색이며 개인 모두가 '양질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상에서 허용된 시간을 최대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개인 스스로가 인간적인 길로 접어들 때 새로운 유토피아가 건설된다는 것이다.

길은 미래를 결정하는 척도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며 개인의 삶을 결정한다. 가지 않은 길을 갈 수는 없다. 이미 다른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개인의 운명은 개인의 몫이기에 길 또한 자기의 몫이다. 제3의 길로 들어섰건 인간적인 길로 들어섰건 궁극적인 길은 개인이 결정할 일이다. 어떤 길로 들어섰건 선택한 길에 의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길을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어느 길에 들어서야 하는가. 선택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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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2.14 16:18:30 *.46.61.19
그러나 그게 어느 길이든 찾고자 하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바르게 가다보면은 흔들림 가운데에서도 결국에는 만나게 되어있지 않을까요? 다소 '양질의 시간'에 덜 효율적이었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전체를 보면은 시간차의 요철을 위한 상생의 어울림을 향해 가는 어쩔 수 없는 생태적 이치는 아닐런지요?

있잖아요, 우리 몇 명이서 S대 산책하고 있어요. 추워서 휴게실에 들어와 자판기 차 마시며 쇼파에서 담소 나눠용. 선배가 계셨음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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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
2008.02.15 09:44:41 *.114.22.72

'길' 그 물음에 대하여(나 에게 묻는다)
길...
철민아...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너는 어느 길에 서 있는가?
그 길을 어떤 각도에서 보고 있는가, 고집스럽게도 스스로가 어떠한 가치를 부여 하고 가고 있는가?
너에게 옳은가? 그른가?
사회에 옳은가? 그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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