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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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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8일 18시 49분 등록
‘첫눈에 반한 사랑’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던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3년 전.
또는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이 시는 내가 연애할 때 남편에게서 처음으로 받았던 연애편지에 쓰여있던 시다. 우연적인 만남을 연이어 겪은 뒤 사귀게 된 상황이라 이 시는 더욱더 나의 맘에 와 닿았다. 그가 흔히 만나고 헤어지는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닌 “ 당신과의 만남을 저는 이렇게나 소중하고도 특별하게 생각한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때 내 기분엔 이 시 한편으로도 남편에게 더욱 믿음을 갖게도 되었던 것 같다. 남들에게는 연애편지 한 구석에 의래 포함되는 시처럼 흔해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살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어떤 노인, 아낙네가 말을 걸었는데 소홀히, 무심코 대하고 봤더니 보살님이더라 라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를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에서 필자 고운기는 “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커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496P.)” 라고 덧붙이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위의 시가 나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려던 자랑스럽고 로맨틱했던 그때의 편지와 함께 떠오른 것이다.

흔히 접하는 이야기 중 불교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던가, ‘억겁의 인연’이라는 표현들이 있다. 여기서 ‘겁’이라는 뜻은 1,000년에 한번씩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상의 선녀가 옷깃으로 바위를 닳게 하는, 상상만 해도 기가 차는 시간을 말하는데 억겁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이미 추측이 가능한 선을 넘어선 저 세상의 개념 같다. 한편으로는 우주의 나이, 크기로만 보자면 결코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또 인연이 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을 해 보아도 로또 당첨은 확률 축에도 못 끼는 0을 세기도 힘든 확률이 나온다고도 한다. 물론 인연의 깊이를 어찌 머리로만 계산할 수 있겠냐만 말이다.

새삼 내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하루에 나는 그들을 머리 속에 몇 번이나 떠올리고 마음을 쓰는지. 생각해 보니 부끄럽다. 되려 매일매일 떠올리며 시간을 할애하는 이들은 분노에 쌓인 채 복수를 꿈꾸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만나기 어려운 인연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나를 분노케 하는 그들에게 조차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평범한 나에게는 당장 ‘인연이라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므로 항시 주변의 모든 이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라는 식의 다짐은 무리다. 오욕칠정을 초월한 도인과 같은 단계가 오지 않는 한 분명 앞으로도 나의 이러한 불평 위주의 마음 쏟기는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인간관계가 특히 괴롭거나 일상의 관계가 지겨워질 때 한번씩 이 시와 ‘인연’ 이라는 것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면 좁디 좁아지던 마음에는 관용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솟아나고, 일상에 파묻혀 지겨워져 버린 마음에 무심히 대할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주체 못할 사랑이 피어나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런 생각들을 계속 샘솟고 있다. 나의 가족들, 친구들을 떠올려 보니 무척 단순하게도 즉시 효험을 보이면서 그들이 바로 보고 싶어진다. 아니, 나의 단순함이 아니라 이런 적극적인 생각과 의미부여가 더욱 마음을 다잡아 준다고 말하고 싶다.

또 이러한 ‘인연’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이렇게 온라인 공간에(온라인 공간 또한 오프라인 기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의미의 개념일게다.) www.bhgoo.com 이라는 장소에 방점을 찍고 들락 날락 하며 서로의 글을 읽고 위로, 격려, 공감등의 감정을 나누는 우리도 보통의 인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옷깃이 아니고 ‘눈팅만 스쳐도 인연’ 이라 해야 하나?

잊지 말자! 인간관계가 무심하고 팍팍해질 땐 내 주변의 ‘그들’을 한 명 한 명씩 ‘억겁’, ‘옷깃’이라는 단어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는 의식적인 작업을 해보자고 말이다! 바로 효험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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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8.03.08 23:19:23 *.252.102.83
오늘 혹시나 한 소개팅이 역시나로 끝나고 우연히 지혜님의 이 글을 읽게되었네요. 부럽네요. 몇번의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 사실, 전 그런 우연을 무척 바랬는데, 그게 잘 안되서..소개팅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할때마다 정말 이렇게까지 사람을 억지로 만나야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겼기 때문에 그래야할까...(물론 소개팅이 항상 '역시나'로 끝났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겠지만요 ㅋㅋ) 그래서 이젠 그렇게 안하려구요 ㅎㅎ
인연이란 있겠지요? 없으면...그냥 있을때까지 기다려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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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혜
2008.03.08 23:29:17 *.34.17.132
^^
제 남편도 우연이 겹친 만남이긴 했지만 결국 소개팅으로 만났답니다.
앨리스님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져보세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만남 속에 나의 인연이 그렇게 그 자리에 있을지 어찌 압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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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9 01:59:14 *.70.72.121
<인간관계가 무심하고 팍팍해질 땐 내 주변의 ‘그들’을 한 명 한 명씩 ‘억겁’, ‘옷깃’이라는 단어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는 의식적인 작업을 해보자.>

변치 않는 마음 중요하지요. 오래 지켜가기 쉽지 않으니까요. 사람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가까운 동물이라서요. 그러나 현명한 만큼의 덕을 보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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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3.10 12:17:56 *.38.102.209
아 로맨틱한 분이 옆지기시군요. 부럽네요. 식사 맛나게 드시고
세번째 글 기대하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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