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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22시 32분 등록
1995년 연말쯤으로 기억된다. 직장동료들과의 술자리였다. 그 당시 한참 붐을 일으키고 있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하여 토론 아닌 토론이 이어졌다. 책을 읽은 소감에서부터 책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분분한 의견이 오갔다. 그 자리에는 대여섯 명 정도가 함께 했는데 단 한권일지라도 ‘로마인 이야기’를 읽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서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바람에 오가는 말 중에 각이 서기도 했다. 마치 나도 그 책을 읽었고 로마에 대하여 알만큼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1995년 9월 1쇄를 찍었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었고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술자리에서도 ‘로마인 이야기’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신문들은 너도 나도 상찬 일색인 서평을 쏟아냈고,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기사를 실으며 이 책을 읽어야 교양인이라고 강조하는 듯이 보도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열기는 식어갔지만 그래도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첫 번째 권이 나온 뒤 13년 동안 15권이 출판됐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다섯 권의 ‘로마인 이야기’도 그때 구입한 책이다. 아직도 표지가 깨끗하고 예쁘장한 디자인 덕분에 책장에서도 한눈에 눈길을 잡는다. 다섯 권은 출판되는 대로 한권씩 사들인 것인데 책을 한권씩 살 때마다 책 속의 내용을 만날 기대감에 기분이 좋아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2년으로 기억된다. 사무실 가운데 있는 탁자에 책 사오십 권이 올려졌다.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읽지 않는 책이나 버릴 책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출판된 책도 있었고 오래된 책도 있었다. 직원들이 탁자에 둘러서서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를 하듯이 책을 골랐다. 이런 경우에 좋은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을 골라잡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보자마자 재빠르게 뛰어가서 무조건 먼저 집어 드는 것. 또 하나는 탁자를 몇 사람이 둘러싸고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연합전선을 펴는 것. 다른 하나는 한차례 사람들이 골라간 뒤에 이삭줍기를 하는 것이다.
일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거의 이삭줍기를 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책들은 항상 비슷하다. 재테크와 관련된 책(요즘은 이런 책도 남아나지 않는다), 학술서적,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서적, 종교서적, 자서전, 무명작가의 에세이집 등이 마지막까지 주인을 찾지 못하고 탁자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책들은 눈길을 끌기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탐나는 책이었다. 관심이 많은 분야이고 한번은 읽어봤으면 했던 책이었다. 출판사도 좋은 책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라서 더 끌렸다. 그럼에도 책을 집어 들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책이 많이 두꺼웠다. 이걸 언제 읽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걸 꼭 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다지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고, 강력한 책읽기의 욕구가 솟아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책을 탁자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지금 기억하건대 그 책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였다.

‘로마인 이야기’와 ‘삼국유사’는 비슷하면서 많이 다르다. 간단하게 말해서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인의 흥망성쇠를, ‘삼국유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른 것은 ‘로마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서 읽지만 삼국유사는 공짜로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라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삼국유사는 흔히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 삼국유사를 읽었는가. 진실로 진실로 고백하노니 나 자신도 삼국유사를 이렇게 정독하기는 처음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몇가지 설화와 이책 저책에서 인용된 몇가지 이야기가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전부이다. 이번에 삼국유사를 읽을 때에도 기대감에 설레거나 재미에 빠져들지 못했다.
반면에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는 책 표지를 펼치면서부터 가벼운 설레임을 경험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헤어나기 어려운 재미에 푹 빠졌다. 젠체하며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지식과 교양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저자인 고운기는 삼국유사는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빗대어 요리를 하기에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 보다는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가 더 좋은 재료라고도 말했다. 그 과일과 채소는 상하거나 시들지는 않는다. 화학적 방부제를 뿌리지 않아도 썩지 않는 재료임에는 분명하다. 문제는 그 재료들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날 것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몇 사람의 명망있는 요리사가 솜씨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삼국유사는 아직도 책속에 역사속에 묻혀있다.
이제는 삼국유사를 책 밖으로 끌어낼 때다. 삼국유사는 우리 문화의 신화와 차별성이 담겨있는 우물과 다르지 않다.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그런 우물을 두고 우리는 물이 모자란다고 외친다.

‘로마인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라는 걸출한 작가를 만나서 세계인의 필독서로 자리를 굳혔다. 물론 그 책 이전에도 로마와 관련된 역사서적은 항상 대중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로마라는 제국의 서사구조가 이미 원천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탓이다.
삼국유사로 대변되는 ‘한국인 이야기’가 로마와 대등하게 세계인의 주목을 끌기는 힘들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국인의 문화적 차별성이 있고 고유성이 있고 역사의 근원이 있다. ‘한국인 이야기’는 그 차별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고유의 차별성을 콘텐츠로 만들어낼 때 ‘한국이 이야기’는 새로운 무대에 오를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이다. 책 속에 묻혀있는 삼국유사는 오늘도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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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9 23:14:54 *.70.72.121
삼국유사를 읽다가 삼국유사가 되어 밖으로 뛰쳐 나왔군요.

님께서 느꼈다면 님의 몫이 아닐런지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은 내면의 소리 일지 모릅니다. 다른 시각과의 변별성도 결국에 그 진가를 아는 자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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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3.10 12:26:54 *.38.102.209
글 잘 읽고 갑니다. 삼국유사와 유인창님. 끝까지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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