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손지혜
  • 조회 수 176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3월 22일 19시 52분 등록
학창시절.
소풍을 가는 날에 ‘김밥 싸기’는 늘 아버지의 몫이었다. 몫이라기 보다는 아버지께만 부여되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소풍날 아침,
어머니께서는 먼저 일찍 일어나셔서 쌀을 씻어 안치고 당근, 시금치, 단무지,햄, 계란 등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열심히 손질하셨다. 소풍 가는 날의 설레임 때문에 눈이 일찍 떠져서일까? 나 또한 항상 새벽부터 일어나 어머니의 조수 노릇을 해가며 준비하시는 뒷 모습을 열심히 쫓아 보곤 했다. 당근은 채 썰어서 기름에 잘 볶고, 시금치는 데쳐서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맛깔나게 무쳐놓고, 단무지는 적당한 길이로 썰어 국물은 꼭 짜두고 햄은 굵직하게 썰어 프라이팬에 살짝 지져 놓는다. 계란은 풀어서 두툼하게 지단을 만들어 썰어놓으면 어머니의 임무는 완료! 각각의 재료는 색깔의 어울림도 다채롭고 향기도 고소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모든 준비를 마치시면 아버지는 손을 깨끗이 씻고 김밥 재료와 꼬들꼬들하게 지어진 밥, 김이 놓여져 있는 상 앞에 앉으셨다.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선명한 그 모습을 설명하자면 그건 마치 엄숙한 의례행위를 하시는 것 같았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 하는 듯한 표정의 진지하신 모습. 평소 식사 준비는 항상 어머니가 하시지만 김밥을 싸야 하는 소풍 날만은 이렇게 반드시 아버지께서 직접 김밥을 마셨다. 우리 집에서 꼭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율처럼 말이다. 이는 또한 우리 집의 화목함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해 나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 놀라며 아버지께서 만드신 김밥을 하나씩 집어 먹고 고개를 끄덕이던 친구들.

만약 소풍날과 아버지 출장이 겹치는 날은 별수 없이 어머니께서 직접 김밥을 마셨는데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여느 날과 같았지만 단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께서 만드셨다는 이유로 그날 김밥은 왠지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 표 김밥만의 특징인 김과 밥, 속 재료가 단단히 뭉쳐진 차지고 고소한 맛도 아니며 또 뭔가가 빈 허전한 느낌.

그런 아버지께서 작년 가을쯤 퇴직을 하셨다.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 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 궁핍과 자격 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노년, 366P)”
30여년 가까이 몸 담으셨던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아버지 심정이 저런 기분이셨을까?
어머니께서 몸이 갑자기 나빠지시고 그로 인해 아버지께서 퇴직을 일찍 당겨서 허둥지둥 직장을 떠나신 터라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 두 분께서 식사는 잘 챙겨 드실지… 퇴직하시면 갑자기 늙으신다던데.. 게다가 어머니께서 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인지라 두 분께서 함께 계시는 시간이 더욱 우울해 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현재 두 분의 생활은 서로 완전한 균형을 이루어 놀라울 지경이다. 먼저 두 분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완전히 바뀌셨다.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를 위해 손수 주부의 역할을 맡으시게 된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 직접 아침, 점심, 간식에 저녁 짓는 일까지 해내고 계신데 지금은 그 덕택인지 어머니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셨다. 아버지 노년의 재미난 반전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된 이유때문에 가슴 찡하기도 하다.
물론, 처음엔 어머니께서 “너희 아버지 주방일 하는 것 보면 말리고 싶은 것도 많고 잔소리도 많아진다. 하지 말라면 "내버려 두라" 며 삐치기도 잘 삐친다. 또 마트에 가면 어찌나 주방 용품에 눈독을 들이는지.. ” 라며 전화 너머로 불평 아닌 불평도 하셨다. 하지만 여섯 달 가까이 되어 가는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나물도 어쩜 그렇게 고소하게 무치는지 모르겠다. 마트에 가면 인스턴트는 몸에 좋지 않다고 못 사게 해서 가끔 먹고 싶은 햄도 못 먹는다. 과일도 어찌나 잘 갈아내는지.. 토마토는 반숙해서 껍질을 벗겨내고 갈아 내온다. 완전 살림에 도가 텄어. 텄어..” 온통 칭찬 일색이시다. 초기 아버지의 어설픔을 어머니께서도 잘 참아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실력까지 일취월장 하셨겠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칭찬에 귀를 기울이고 있게 되면 두 분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귀여우시다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와 전화 수다를 떨 때면 종종 “ 엄마 친구들은 퇴직한 남편 밥해대기 귀찮아서 어디 좀 제발 다시 나갔으면 좋겠다고 그래” 하신다.
“집안에 남편이 있다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뭐든지 내가 하는 일마다 걱정을 하고, 질문을 해대는 거예요.(375P,노년)”
이는 결코 요즘 시대 아내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시대를 막론하고 퇴직한 남편을 둔 모든 아내들의 공통적인 반응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역할이 자연스럽게 바뀐 부분을 통해 서로간에 별다른 퇴직 후유증 없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하나하나 살림 배워가는 재미에 이를 잘 넘기시고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노년에 여왕처럼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계셔서 퇴직이라는 것이 되려 좋은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문득 이와 같은 아내와 남편의 역할 바꾸기가 퇴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부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요즈음 주말에 부모님 댁에 내려갈 때는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퇴직 하신 후 처음 내려가 찾아 뵈었을 땐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요리책을 보고 한번 웃고(이젠 내려 갈 때마다 보면 집안 여기저기서 요리책이 굴러다닌다) “ 예쁜 딸(아버지 눈에만!)이 왔는데 뭘 해줄까?” 물으시며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시던 아버지를 보고 두번 웃었다. 손수 밥을 지으시고 바삭바삭 노릇노릇 생선을 굽고 얼큰하게 버섯찌개도 끓여주시던 모습. 나의 학창시절에는 ‘김밥 싸기’로 집안의 화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셨다면 현재는 집안일 전담으로 어머니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고 계신 듯 하다.

이제 주방일과 집안 살림에 손에 붙으신 아버지는 여가 시간도 점점 많아지셔서 지금은 지난번 설에 내려갔을 때 가르쳐 드린 인터넷 고스톱 하느라 시간 가는지 모른다고 하신다. 저녁마다 전화 드리면 어머니께서 주로 받으시는데 아버지께서는 뭐하시냐고 물으면
“또 노름(어머니는 인터넷 고스톱도 노름이라고 하신다.) 하신다. 노름에 빠져서 밥 차리고 다 먹기가 무섭게 설거지 하고 가서 앉아서 노름만 한다. 그래서 엄마가 심심해..너희들은 왜 쓸데 없이 그런걸 가르쳐 줘가지고..” 라며 초반의 흉보기가 재미있는 원망으로 바뀌셨다.

30여년 공직생활은 물론 항상 모든 일에 성실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또 퇴직 후 본인이 필요로 되는 중요한 할 일을 찾으시고 성실하게 임하시며 막 시작된 노년 생활의 첫 문을 가뿐하게 넘고 계신 듯 하다. 손재주가 있으신 아버지께서는 돌아오는 가을에는 목공예를 배우실 예정이라고 하신다. 노년에는 자신의 할일과 목표를 정해놓고 그걸 지키도록 하는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본인의 일을 찾아서 하시는 아버지의 노년도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IP *.34.17.132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3.23 00:45:24 *.36.210.80
감동적이네요. 김밥과 아버지. 그리고 아내에 대한 성실한 가족 사랑과 당신의 취미 생활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살림 살기가 참 바람직하게 잘 연결된 느낌이네요. 그 가족의 풍경이 아름답네요. 주부 일기를 써보시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빅히트 할 것 같은데요.

긴 레이스 고생했어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