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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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도 아직 젊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노년'이라는 책을 읽기 전까진 내 안에도 노년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 그래서 내 기억 속에 노년을 한 번 떠올려봅니다.
지난 날의 나에게 노년의 모습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여러 손자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아끼셨던 할머니. 사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면서도 사는 곳이 멀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뵐 때면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모르셨던 할머니였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모든 반찬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놓으시며, 생선 한 점,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던 그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때로는 그런 과분한 사랑이 부담스러워 이 철없는 손자는 일부러 할머니에게 섭섭한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2년 전 쯤, 지병이 도져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찾아간 병원에 누워 계신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늙었었지만, 난 그때 할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듯 했습니다. 검은 머리 한 올 없는 백발의 할머니, 몸에 지방이라고는 없을 것 같이 삐쩍 마른 할머니의 모습이 많이 낯설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잘 알아듣지도 못 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돈 벌러 다니느라 힘들어? 너 꼴이 왜 그러니?" 하며 내 손을 꼭 잡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90세가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께서도 항상 그러셨습니다. "빨리 죽어야지. 오래 사는 것도 지겹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3대 거짓말 중 하나라는 그 말을 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지난 날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쩌면 유일한 노년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의 나에게 노년의 모습은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입니다. 나 역시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아버지도 집에서만 그러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부자가 둘 다 말이 없으니, 서로 자주 대화가 오갈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독립하여 따로 살아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 전까지 30년을 넘게 한 집에 살면서 긴 대화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손으로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과묵합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한결같습니다. 나의 아버지를 보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묵묵히 일합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고시공부를 했다면, 반드시 수석 합격을 했을 것입니다. 입도 무겁고, 엉덩이도 무겁고, 누가 뭐라 해도 한 번 시작한 일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어떤 문제가 생겨도 끝까지 해냅니다. 어릴 적에는 이런 아버지가 별로 재미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처럼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저 퇴근하면 집에 들어와서 씻고, 신문보고, 잠을 자는 아버지였습니다. 몸을 쓰는 일을 하시다보니, 예전에는 병원 신세도 많이 지셨습니다. 가끔씩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살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생각 않고 사는 분 같았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그 존재만으로 든든했습니다. 몇 해 전 우연히, 앉아계신 아버지의 머리를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흰머리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든든하기만 하던, 무슨 일이 생기면 뭐든지 해결해 줄 것 같던 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손은 훨씬 더 상해있었습니다. 정말 고단한 삶의 자취를 가지고 있는 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없는 부자는 그 동안 "나 힘들다.", "아버지 힘드시죠?"라는 말 한마디 서로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수도 없이 늘어난 흰머리와 뼈마디가 굵어진 손을 바라보고서도 난 그저 말없는 아들일 뿐 이었습니다. 이제 나에게 아버지의 노년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나의 차례입니다. 물론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언젠간 반드시 나에게도 올 것입니다. 꼭 그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린애도 다 아는 뻔한 사실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주 가끔씩 나의 노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저 나의 노년은 왠지 풍요롭고, 여유롭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 섞인 상상을 했을 뿐입니다. 보부아르가 들려준 숨 막힐 듯이 많았던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나니, 노년의 나의 모습은 내가 원한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노인은 희망이 아닌 추억으로 산다고 합니다. 고민이 됩니다. 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되는 것인지, 노년이 되어서도 변치 않고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야 되는 것인지. 그냥 두 가지 모두 갖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오늘은 조용히 노인이 된 나와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 그 도취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이 속임수, 어리석은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톨스토이 (노년 6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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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형을 마치며.
쉽지 않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입시험을 볼 때도, 입사시험을 볼 때도 맛보지 못했던 지적경쟁의 맛을 알았습니다. ^^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지만, 그냥 즐거웠다는 말만 남기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IP *.34.17.132
지난 날의 나에게 노년의 모습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여러 손자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아끼셨던 할머니. 사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면서도 사는 곳이 멀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뵐 때면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모르셨던 할머니였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모든 반찬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놓으시며, 생선 한 점,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던 그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때로는 그런 과분한 사랑이 부담스러워 이 철없는 손자는 일부러 할머니에게 섭섭한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2년 전 쯤, 지병이 도져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찾아간 병원에 누워 계신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늙었었지만, 난 그때 할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듯 했습니다. 검은 머리 한 올 없는 백발의 할머니, 몸에 지방이라고는 없을 것 같이 삐쩍 마른 할머니의 모습이 많이 낯설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잘 알아듣지도 못 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돈 벌러 다니느라 힘들어? 너 꼴이 왜 그러니?" 하며 내 손을 꼭 잡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90세가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께서도 항상 그러셨습니다. "빨리 죽어야지. 오래 사는 것도 지겹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3대 거짓말 중 하나라는 그 말을 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지난 날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쩌면 유일한 노년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의 나에게 노년의 모습은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입니다. 나 역시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아버지도 집에서만 그러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부자가 둘 다 말이 없으니, 서로 자주 대화가 오갈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독립하여 따로 살아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 전까지 30년을 넘게 한 집에 살면서 긴 대화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손으로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과묵합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한결같습니다. 나의 아버지를 보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묵묵히 일합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고시공부를 했다면, 반드시 수석 합격을 했을 것입니다. 입도 무겁고, 엉덩이도 무겁고, 누가 뭐라 해도 한 번 시작한 일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어떤 문제가 생겨도 끝까지 해냅니다. 어릴 적에는 이런 아버지가 별로 재미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처럼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저 퇴근하면 집에 들어와서 씻고, 신문보고, 잠을 자는 아버지였습니다. 몸을 쓰는 일을 하시다보니, 예전에는 병원 신세도 많이 지셨습니다. 가끔씩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살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생각 않고 사는 분 같았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그 존재만으로 든든했습니다. 몇 해 전 우연히, 앉아계신 아버지의 머리를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흰머리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든든하기만 하던, 무슨 일이 생기면 뭐든지 해결해 줄 것 같던 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손은 훨씬 더 상해있었습니다. 정말 고단한 삶의 자취를 가지고 있는 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없는 부자는 그 동안 "나 힘들다.", "아버지 힘드시죠?"라는 말 한마디 서로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수도 없이 늘어난 흰머리와 뼈마디가 굵어진 손을 바라보고서도 난 그저 말없는 아들일 뿐 이었습니다. 이제 나에게 아버지의 노년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나의 차례입니다. 물론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언젠간 반드시 나에게도 올 것입니다. 꼭 그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린애도 다 아는 뻔한 사실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주 가끔씩 나의 노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저 나의 노년은 왠지 풍요롭고, 여유롭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 섞인 상상을 했을 뿐입니다. 보부아르가 들려준 숨 막힐 듯이 많았던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나니, 노년의 나의 모습은 내가 원한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노인은 희망이 아닌 추억으로 산다고 합니다. 고민이 됩니다. 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되는 것인지, 노년이 되어서도 변치 않고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야 되는 것인지. 그냥 두 가지 모두 갖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오늘은 조용히 노인이 된 나와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 그 도취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이 속임수, 어리석은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톨스토이 (노년 6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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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형을 마치며.
쉽지 않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입시험을 볼 때도, 입사시험을 볼 때도 맛보지 못했던 지적경쟁의 맛을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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