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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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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4일 03시 18분 등록
<부분과 전체>

‘젊거나 혹은 한창 나이 일 때 우리는 붓다처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노년기를 갈라놓고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영원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머나먼 미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 중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주인공 엄중호는 인정사정 없는 지독한 놈이다. 전직 형사였던 그는 죄를 가려주고 돈을 뜯어내다 발각돼 형사 옷을 벗게 된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출장 마사지 포주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돈, 돈, 돈 뿐이다. 정신 나간 남자에게 걸려 흠씬 맞은 여자를 대신해 복수를 해주는가 싶더니, 그 여자를 미끼로 돈을 뜯어낸다. 아파서 열이 들끓는 여자에게 갖은 협박을 동원해 결국 일을 나가게 만든다. 그러던 중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여자둘이 사라졌다. 그들은 일전에 그에게서 천 오백만원을 땡겨갔었다. 그 돈이 아까워 이 인간 돌아버리기 직전이다.
“이 쌍년들 잡히기만 해 봐!!”

또 한 명의 주인공 조영민은 미치광이 살인마이다. 예술에 천재적 재능을 있지만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성불구자인 그는 여자의 머리에 망치로 ‘정’을 내리 꽂으며 성적 욕망을 해결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의 살해 동기를 설명하기는 무엇 하다. 조카, 자신을 도와 준 주변 사람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범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여자를 죽이기 전 그가 묻는다
“니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봐. 왜 집에 가고 싶은지…
왜 니가 살아야 되냐고? 말해봐!!”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남자가 말한다.
“없지? 없는 거다!!”
여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대답한다.
“딸이 있어요. 7살짜리 딸이 있어요”
남자가 말한다.
“니가 없어도 잘 살 꺼야”

결국 그가 용납할 수 있는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단지 자신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가 살해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창녀, 어린 아이, 노인 등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는 비겁한 살인마이다.

여기까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사람 다 인간 쓰레기임에 틀림이 없다. 힘이 없는 약자를 상대로 한다는 것, 사람에 대한 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 인간의 고통이나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한다는 것.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두 사람 중 엄중호의 변화이다. 없어진 세 여자가 마지막으로 상대한 남자가 조영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처음에 돈을 받아내기 위해 그를 쫓는다. 그러면서 서서히 밝혀지는 조영민의 정체… 자신보다 더한 쓰레기인 그에게서 엄중호는 혐오감을 느낀다. 잔인하게 사람들을 살해하고서 아무런 죄책감 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서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없어진 여자의 딸을 만나 그 아이와 토닥토닥 싸우다 정이 들면서, 여자는 ‘그것’에서 인격을 가진 ‘그 사람’으로 승격한다.

엄중호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살려야 한다. 그 여자를 살려야 해…’

경찰도 그 누구도 그 여자의 생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 때, 엄중호 혼자만이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 다닌다. 자신의 목숨을 건 절박한 추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부터 그는 악을 벌하기 위해,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나타난 정의의 수호자이다. 이제 우리 모두 그의 편이다.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 모두 그를 응원하고 그의 분노에 공감하고 그의 실수를 안타까워한다.
“제발 저 나쁜 놈을 무찔러 주세요. 우리의 영웅 엄중호여!!”
비록 여자를 살리지 못하지만, 조영민이 유유히 사라지기 전 그를 붙잡아 결국 그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만든다.


여자는 죽기 직전, 엄중호에게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물론 정의의 수호자로 변하기 전 그에게 말이다. 흐느끼며 여자가 말한다.

“화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저 일 그만 둘래요.
정말 못하겠어요. 너무 무섭고…
정말 못하겠어요….”

나중에야 그 메시지를 들으며 그는 고개를 떨군다.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장면이다.
그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토록 살리려 했던 그 여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게 바로 자신이었음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을까….
비록 영화 속에 나오지 않지만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 후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결코 예전의 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안에 ‘악’뿐만이 아니라 ‘선’ 또한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현재의 모습만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는 한다. 젊을 때 우리 안에 쭈글쭈글하고 허리 굽은 노인이 있다는 걸 인정 못하듯, 악덕 포주 ‘엄중호’의 안에 정의의 수호자 ‘엄중호’가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이 세상 최고의 성인군자라 칭송 받는 자 안에도 악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귀에 들리는 것만을 믿는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

한 때 나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이 세상 최고의 목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맨발로 추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수없이 많은 죽음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나 같은 거 하나 죽어도 이 세상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란 사실에 분노하며 질긴 목숨을 이어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런 곳에 들어와 글을 쓰고, 감히 변경연 연구원이 되길 꿈꾼다. 그 어느 날 내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그 책이 큰 일은 못 하더라도 나 하나쯤은 구원할 수 있으리라…
앞으로 내가 꽤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 또한 한 남자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내가 꿈꾸던 삶, 그 이상의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죽음을 꿈꾸던 내가 내 안에 또 다른 생명을 품을 그 날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거리를 헤매던 과거의 그 어느 날, 지금의 이런 내 모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만약 지금 죽음을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이 쓰레기 같고,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도 믿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편의 영화를 보아라.
그 속에 엄중호의 변화를 보고, 미약하나마 나의 변화를 보아라.
부분으로 자신의 전체를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
울고 싶으면 울고, 쉬고 싶으면 쉬어도 좋다.
그러나 미련하게라도 살아주길 바란다.
자신의 전체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미련하게라도 살아주길 바란다.
그저 살아주길 바란다.
제발… 살아 있어라.
살아 있어라…

쓰다 보니 내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안나야, 너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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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4 09:37:58 *.36.210.80
쉽지 않은 레이스를 몸살하며 마칩니다. 짧은 동안 긴 사랑을 한 것이지요. 고단할 것입니다. 그래도 영화도 보았다니 한편으로 여유를 지니셨습니다. 삶이 다 그런 것 이겠지요.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을.
푹 쉬고 실컷 자고 일어나 또 읽고 쓰는 거죠. 애썼어요. 좋은 소식 기다릴께요. 더 이뻐진 것 같군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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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8.03.25 18:26:48 *.46.177.78

내면의 빛이 점점 강렬해지는군...

우리는 그걸 '희망' 이라고 부름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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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웅
2008.03.25 23:27:41 *.47.118.203
안나야 수고 많았다. 근데 너 대단하다~ 그 영화에서 그런 점을 다 느끼고 말야. 나도 저번에 그 영화 봤었는데 난 보고 나니까 머리속이 멍하던데? 넌 '노년'이란 책을 끼고 봐서 그런가?

암튼 안나야 연구원 합격하면 한 턱 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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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
2008.03.26 14:55:37 *.47.118.203
아이쿵! 안나야. ㅋㅋ
어제 오전에 발표가 났었구나? ㅡ.ㅡ
미안하다, 괜한 소리를 해서. 내가 밥 사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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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6 15:58:55 *.36.210.80
그래... 신웅아, 네가 안나 밥 사주어라. 그리고 삐지지 말라고 전해줘.

너희 둘이 함께 다시 도전하면 좋겠다. 신웅이도 지원하기를 바랐는데... .

안나야, 시간되면 우리 함께 순대를 먹던지 떡볶이를 먹던지 영화를 보던지 하자. 마음이 상했는지 전화가 꺼져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 글럴 수도 있지... . 그렇지만 안나야, 언니하고 같이 하자. 여기는 아무도 못 말리는 곳이잖니. 너나 나나 무엇이 부족한지 노력해서 찾아 보자.

너도 알잖아. 한 해를 더 기다렸다가 다시 도전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잖아. 연구원들이 다 잘해서 합격한 것만은 절대 아니야. 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생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 합격해 놓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을 네가 혼내주어라. 너의 그 폭발하는 신명난 열정으로. 언니가 굿해주랴?ㅋ

다른 사람들도 계속 이 공간에 기여하면서 착실히 기다렸다는 거,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거야. 재능도 중요하고 성실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깨우쳐가는 담담한 참여가 더 멋진 것인지도 몰라. 안 그래? 네 초롱한 눈망울이 생각난다. 너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고 이겨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라는 것 잊지마. 언니는 너무 오래 걸려서 알았거든. 알았지?

기분 풀리면 연락 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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