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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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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4일 10시 00분 등록
[1대 착각]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 돌아 가시기 전 몇 달을 제외하고는 97세까지 건강하게 사셨다. 평생 도시 생활을 하시다가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셨는데 항상 그 작은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곤 하셨다.

아흔 살쯤 되셨을 때일까, 어느 날인가, 화단을 꾸미시다가 허리를 다치셔서 끙끙 앓고 계실 때, 우리 엄마 말씀이.
“엄마,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언제나 젊으신 줄 알고 그러시면 안 되요. 화단 만드는 일처럼 힘든 일을 그렇게 오래 하시면 안 된다고 그랬쟎아요.”
“글쎄, 너희들이 맨날 나더러 늙었다고 하는데, 나도 마음은 이팔청춘 열여섯 때랑 똑같다.내가 몸이 늙었다고 마음도 늙는 줄 아냐?”
그 대답에 우리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우리가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우리 할머니 마음은 항상 열여섯 살 이셨던 거다. 길게 머리를 땋고 동무들과 손잡고 신식 학교 다니셨다던 그 때. 그 때 할머니의 나이는 멈추셨던 거다.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맨날 노인 취급을 했으니.

[2대 착각]
어디 가면 엄마 안 닮았다는 사람들 소리에 내 외모 콤플렉스의 원인을 제공해 주었던 우리 엄마. 본인의 또래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것이 하나의 자신감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가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셨으니까.
“이렇게 큰 따님이 있으세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이 딸도 아주 늦게 결혼해서 낳았어요.”
“아, 그러세요. 진짜 젊어 보이시네. 딸이 이모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엄마는 절대 아니게 보이시는데.”

어느 날, 우리 엄마, 내 동생, 나 세 명에서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이것저것 골라서 입어보시던 엄마. 맘에 안 드시는 표정으로.
“이거 그냥 보면 예쁜데, 입어보니까 아줌마처럼 보인다”
눈치 없는 내가 되물은 거다. “엄마, 아줌마쟎아?”
“그래도 난 아줌마처럼은 안 보이쟎아.”
“……..”

그랬다. 이렇게 다 큰 딸을 둔 우리 엄마도 마음은 아줌마가 아니셨던 거다.

[3대 착각]
외양으로 보이는 나이는 보는 사람 맘대로 생각하라고 하고 싶고, 마음은 아직도 27살이라
고 생각하고 사는 나. 나는 아직도 내가 27살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너무 어려서 혼란 스럽
지도 않고, 알아야 할 건 적당히 알고, 신체에는 물이 오를 때로 올라 탱탱하던 때. 그 때가
너무 좋아서 아직도 내 정신은 그 나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해마다 나이를 먹을 때에도 애써 내 머리에 세뇌를 시킨다.
‘나는 27살이다. 창창한 앞날이 남아있는 27살.’

그래선지, 언제부턴가 새로 사귄 친구들의 나이가 어려지기 시작했다. 그 경우는 대부분 이
런 경우다. 애초에 나이를 밝히지 않는 모임에서 만나서 공통의 관심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를 하다 보니 서로의 나이를 물어볼 세도 없었던 거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좋으련만, 언
젠가는 나이를 묻게 되는 게 한국인이 삶. 그런 경우에 내 짐작대로 상대방들은 27,28
살인 거다. 이윽고, 내가 나이를 밝히게 되면 대번 모두 놀란다. 그 때마다 내 변명은 이거
다.
“내가 얼굴은 늙었는데 철이 안 들었쟎아. 그래서 그런가 봐, 자, 이제 다시 내 얼굴을 봐봐.
알고 보면 그 나이 얼굴 맞지?”

그런데 어느 날 내 나이를 진짜 잊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몇 년 전 배낭 여행 중 이었
다. 낯선 이국 땅에서 어린 학생들을 만나서 깔깔 거리며 함께 돌아 다니고 있었다.
“오늘이 몇 일이지? 여행 나오니 날짜 계산이 잘 안 돼서 말야.”
“오늘 18일 이에요.”
“어머,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이네. 내 생일도 잊어 버렸네.”
“우와! 언니 생일 축하 드려요. 우리 이따가 간단하게 언니의 생일을 위해서, 근데, 언니 이
제 몇 살 되시는 거죠?”
“내가 그러니까 아마 30살인가? 가만, 30살인가, 31살인가 아니 32살인가?”
“…….”
“잠깐, 내가 OO년 생이고 올해는 @@@@년 이니까.”
어쩜 좋을까? 난 정말 내 나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아흔 살이 넘은 연세에도 마음은 항상 열여섯 살이라고 생각하고 사셨던 우리 외할머니, 다 큰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아줌마가 아니길 바라시는 우리 엄마, 27살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키다 못해서 자신의 나이도 잊어 버린 나. 나이에 대한 착각은 대를 잇고 있었다. 대관절 ‘나이듦’이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아 가는 걸까? 그러길레 우리가 기를 쓰고 '젊다'는 착각 안에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걸까?

아마도 내 신체가 쇠약하여 예전만큼 민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며, 세월의 흔적으로 생긴 주름살과 뱃살을 아름답게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저항일 것이며, 더 이상 섹스 어필하지 않는 나이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이듦에 대해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50세에 어느 미국 여학생에게 “그렇다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늙은 동지 중 하나군요!” (<노년> p399인용) 라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니 말이다.
IP *.8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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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2008.03.24 10:04:19 *.255.159.154
하하 , 재밌는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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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4 12:03:49 *.36.210.80
노년은 대게의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이지요. 우리는 왜 죽음에 대해 끔찍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노년은 이러이러 해야 해 하고. 각자가 왔는데 갈 때에는 한무더기 안에서 살다보니 외떨어지기 싫은 걸까요? 어쩌면 4기 지원자 가운데 현정님이 가장 젊겠군요. 경쾌한 노년을 맞으실 것 같군요. 수고 많았어요. 좋은 결과 바랍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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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3.24 12:17:32 *.122.143.151
누구나 다 '동안'이라고 얘기해주면 좋아하죠~!!

전.. 제 나이로만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ㅋ ~

재밌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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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2008.03.24 13:25:22 *.84.240.105
한 달 동안 써니님 댓글 감사했습니다. 글쎄 어떤 분일까 매우 궁금합니다. 제 상상으론 조그만 요정의 모습으로 이 홈피안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정신 연령으로 27살이니까..제가 지원자 중 제일 어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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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3.24 20:59:36 *.51.218.186
현정, 수고했어. 먼 길 달리느라 우리 모두 수고했지. 용량을 초과하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그런 초과된 목표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못했을거야.
모녀 삼대 착각, 재밌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야. 그런데 그것은 그 집안 만의 일은 아니라네.

나 역시 우리 고모님(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과 대학원 7년을 다니는 동안 신세졌던 막내고모) 딸 노릇 하며 고모님에게 효도 톡톡히 했었지. 나이가 18살 밖에 차이 안나는 우리 고모는 '따님이세요?'라고 사람들이 물어주기를 얼마나 기대하던지. 행여 물어주지 않으면 먼저 '우리 딸 이쁘죠?' 들이대곤 하셨지. 절대 내가 이쁘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질 질문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어머 딸이세요?, 어떻게 이렇게 큰 딸이, 그럼 15살에 애를 낳으셨다는 말인가요?'
그 다음은 어떤 말이 이어질지 상상이 가지?

그래도 그 때가 좋았어,
우리 고모님 벌써 환갑이 넘으셨거든...
영화배우 태현실을 닮은 우리 고모님은 절대 안 늙으실 줄 알았었는데..

세월은 참 무상하고, 우리도 금방 노년에 이르겠지.
지드처럼 실감이 안나는 자신의 나이를 자신에게 인지시켜주려고 '나는 65세가 넘었어, 나는 65세가 넘었어!'그렇게 되뇌여야 할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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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8.03.26 00:11:47 *.252.102.191
정말 공감이 가는 얘기네요^^ 우리집도 딱 그렇거든요 ㅎㅎ 제 생각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것 같아요. 얼굴과 겉모습은 세월의 깊이를 표현하지만 순수한 마음과 젊은 정신은 늘 안에 남아있지요. 우리 엄마도 연세는 환갑이시지만 옷을 고를때는 '얘, 그건 너무 아줌마 옷이다. 난 싫어'하시네요^^ 거기다 저두 종종 나이를 까먹고 살아서 가끔 스스로 놀라기도 하지만 ...뭐 그래두 그냥 그렇게 혼자 '나이 안먹으며' 살려구요.ㅋㅋ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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