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숙(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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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끼에 덮여 썩어가는 나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음 세대를 이룰 생명들을 위해 남김없이 자신의 몸을 분해하는 나무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이 세상에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어느 한 시점을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날 존재들이다. 나무처럼 잘 살다가 죽어서 더 아름다운 우리들이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캠벨이 건져 올린 영적 통찰 하나와 마주쳤다.
유진 케네디가 캠벨의 유고와 강연 테이프를 뒤져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과 은유에 대한 캠밸의 견해를 밝힌 책 <네가 바로 그것이다> 서문에서 무척 흥미로운 구절을 만났다. ‘Tat tvam asi’. 산스크리트어이고 번역하면 ‘네가 그것이다’ 란 뜻이다. 캠벨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표현한 이 말이 곧 책의 제목이 되었다.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 the Foundations of Morality>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런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이다.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그것이 자비(com+passion: 함께 고통 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캠벨은 쇼펜하우어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생에 걸친 다양한 신화 연구를 통해 상이한 신화 속에 흐르는 동일한 영적 통찰로서 Tat tvam asi 를 발견한다. 캠벨은 거듭, 인간 행동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 ‘네가 그것’, 바로 ‘자비’ 정신을 들고 있다.
캠벨이 보기에 유대-기독교 전통은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풍성하게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다. 특히 신약의 은유들 속에 꽃핀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위대한 영웅의 족적이다. 인류의 온갖 부조리를 알면서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몸소 고난의 역경을 감내한 예수 속에 깊이 들어있던 정신은 다름 아닌 ‘네가 바로 그것’ 이었던 것이다.
'Tat tvam asi'.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순간적인 동정 때문이 아니며, 그것은 대상과의 동일시 때문이다.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덮어놓고 물에 뛰어들거나,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철도 위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은 ‘네가 그것’ 이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것, 혹은 ‘네가 그것’의 정신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심성이라는 대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개인적인 성공이 행복과 동의어가 아닌 경우를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았다. 개인의 발전이 타인을 향해 열려 있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국 행복하지 못했다. 내 경우 역시, 궁극적인 만족과 고양은 언제나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다가왔다. 타인에게 기여하는 삶이 아닌 삶은 보람이 없다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건 내 개인 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캠벨의 'Tat tvam asi' 에 의하면 ‘나를 넘어 언제나 타인에 이르려고 하는’ 우리들 마음의 지향은 매우 자연스런 인간 심성의 발로인 것이다. 바로 그 심성이야말로 우리 인간됨의 증표인 것이다(그런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고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 개념을 나에게 대비해보니 내가 왜 잘 살고 싶은지, 그리고 왜 잘 죽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IP *.248.75.5
유진 케네디가 캠벨의 유고와 강연 테이프를 뒤져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과 은유에 대한 캠밸의 견해를 밝힌 책 <네가 바로 그것이다> 서문에서 무척 흥미로운 구절을 만났다. ‘Tat tvam asi’. 산스크리트어이고 번역하면 ‘네가 그것이다’ 란 뜻이다. 캠벨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표현한 이 말이 곧 책의 제목이 되었다.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 the Foundations of Morality>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런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이다.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그것이 자비(com+passion: 함께 고통 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캠벨은 쇼펜하우어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생에 걸친 다양한 신화 연구를 통해 상이한 신화 속에 흐르는 동일한 영적 통찰로서 Tat tvam asi 를 발견한다. 캠벨은 거듭, 인간 행동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 ‘네가 그것’, 바로 ‘자비’ 정신을 들고 있다.
캠벨이 보기에 유대-기독교 전통은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풍성하게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다. 특히 신약의 은유들 속에 꽃핀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위대한 영웅의 족적이다. 인류의 온갖 부조리를 알면서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몸소 고난의 역경을 감내한 예수 속에 깊이 들어있던 정신은 다름 아닌 ‘네가 바로 그것’ 이었던 것이다.
'Tat tvam asi'.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순간적인 동정 때문이 아니며, 그것은 대상과의 동일시 때문이다.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덮어놓고 물에 뛰어들거나,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철도 위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은 ‘네가 그것’ 이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것, 혹은 ‘네가 그것’의 정신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심성이라는 대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개인적인 성공이 행복과 동의어가 아닌 경우를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았다. 개인의 발전이 타인을 향해 열려 있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국 행복하지 못했다. 내 경우 역시, 궁극적인 만족과 고양은 언제나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다가왔다. 타인에게 기여하는 삶이 아닌 삶은 보람이 없다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건 내 개인 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캠벨의 'Tat tvam asi' 에 의하면 ‘나를 넘어 언제나 타인에 이르려고 하는’ 우리들 마음의 지향은 매우 자연스런 인간 심성의 발로인 것이다. 바로 그 심성이야말로 우리 인간됨의 증표인 것이다(그런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고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 개념을 나에게 대비해보니 내가 왜 잘 살고 싶은지, 그리고 왜 잘 죽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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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놈
숲을 오랫동안 걸어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숲에 사는 나무와 들풀은 나이면서 우리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우리 인간도 (지역)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던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인 척 나만 존재하는 삶을 경향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이 경향성은 200년 남짓 지속되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명백한 실패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 판명된 실패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미래를 착취하지 않고 단 하루를 살 수 없는 구조로 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장 위대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변화를 위해 이 곳을 찾는 우리 모두는 '나이면서 우리인 삶을 사는 모습'을 향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궁극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숲에 사는 나무와 들풀은 나이면서 우리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우리 인간도 (지역)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던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인 척 나만 존재하는 삶을 경향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이 경향성은 200년 남짓 지속되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명백한 실패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 판명된 실패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미래를 착취하지 않고 단 하루를 살 수 없는 구조로 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장 위대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변화를 위해 이 곳을 찾는 우리 모두는 '나이면서 우리인 삶을 사는 모습'을 향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궁극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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