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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9일 16시 01분 등록
일상의 황홀



“이야~ 너 너무 예쁘다. 이리 와봐. 한 번 안아보자.”
녀석이 몸을 비튼다.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도로 가져간다. 눈이 까만 예쁜 아가다. 나는 녀석을 힘껏 안아 올린다.
“어이쿠.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구나.”
좋은 냄새가 난다. 녀석의 볼에 내 볼을 대본다. 좋은 냄새는 더욱 진해지고, 나의 왼 볼에 닿은 아가의 볼은 보드랍다. 녀석은 내 피부의 거친 느낌이 싫은 듯 잠시 찡그린다. 흥!

어제 밤에는 여러 편의 꿈을 꿨습니다. 장편의 대 서사시였는데, 지금 기억하는 내용은 이것뿐입니다. 무의식, 그 억척스런 입이 다 먹어 치운 모양입니다. 그나마 이것도 겨우 복원해 낸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꿈은 왜, 기억이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걸까요?

꿈을 종종 꿉니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일생 동안 꿔온 꿈이 다 어디로 간 거지요? 매일 밤 저는 도대체 뭘 한 걸까요? 어떤 날은 실제인 양, 몸을 움찔움찔 비틀며 치열하게 꾸었던 꿈들인데, 때마다 일부러 의식으로 불러내 놓고 차근차근 떠올리지 않으면, 안개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아…… 허망한 꿈이여.



이 시구(詩句)가 참 좋습니다.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하여 우리의 작은 생은
한숨 잠과 함께 한 바퀴 도는 것이지.
셰익스피어, <헛소동>

인생과 꿈을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는 것. 좀 식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식상한 것과 사실인 것(?)은 별반 입니다.

“나의 작은 생이 한 숨 잠과 함께 한 바퀴 돈다. 어디쯤 와 있을까?”

지금쯤 저는, 무엇이든 기억해보려 애씁니다. 그런데, 생(生)은 정말 꿈 같은 것이어서 흐릿하게 사라져갑니다. 지난 일들, 모두 어디로 간 거지요? 매일 밤 저는 도대체 뭘 한 걸까요?

꿈의 역설일까요? 저는 또, 꿈처럼 선명합니다. 움찔움찔 몸을 비틀기도 하고, 서럽기도, 슬프기도, 즐겁기도…… 사랑하기도 합니다. 꼭, 꿈을 꾸는 것처럼.

하지만 그때뿐이지요. 그때에는 그렇게 무섭고 밉고 기쁘고 행복했었는데. 다시 그때를 떠올리려 하면, “그랬나?” 으쓱 합니다. 헛소동입니다.

그런데…… 아시나요? 소동을 틈타, 우린 자기도 몰래 희망을 감춥니다. 꿈과 인생과 희미함과 선명함의 역설은 바로 ‘마음’. 이걸 건져내는 일입니다.

꿈, 인생은 매 한가지. 쏟아져, 흩어져, 흐려져버릴 작은 부분들을 건져 올려 오늘과 잇고, 또 그 부분이 흐려지면 다시금 건져 올려 오늘과 잇고. 그게 바로,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생각해보면 *데자뷰처럼 희미하고 신비롭기만 하네.”

* 데자뷰 déjà vu: 실제로는 처음 보거나 경험하는 것을, 이미 경험한 것으로 여기는 착각.



데자뷰를 좋아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데자뷰를 경험할 때면 “앗! 뮤즈가 왔다!” 하며 노트를 들추어 무언가를 적곤 했습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사무실 내벽으로 길게 떨어지는 빛은 멀찌감치 놓인 소파에까지 가 앉았고, 저는 한쪽 구석에서 턱을 괴고 창 밖 어디쯤으로 시선을 줍니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동네 꼬마들 웃음소리, 4월 냄새, 구름 떠다니는 모양새. “췟, (내 시선) 잘도 받아먹네” 하며 한숨을 쉽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이곳에서. 녀석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꿍얼대는 모습.

글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고, 생각을 하려면 보아야 합니다. 쓰는 일이 아니라면, 저는 이런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사는 대로 생각하고 되는 대로 보게 될지 모르지요. 그리하여 감아버린 눈처럼, 닫아버린 귀처럼, 깜깜하고 조용하게 흐려져가겠지요.

하지만 어떤 날은 쓰는 게 너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길어 올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리 두레박을 던져도 내어줄 것 없는 마른 우물처럼. 한 단락, 두 단락, 던져 보다가, 이내 자판을 놔 버려야지요. 하긴, 쏟아져도 문제긴 문젭니다. 손가락은 열 개인데, 스무 개 서른 개씩 떠오릅니다. 끊어지기 싫은 기억들은 마구 튀어 오르는데, 구닥다리 컴퓨터처럼 처리 속도가 늦습니다. "으......" 하며 억지억지 문장을 잇다 보면, 쏟아지던 꿍꿍이들은 어느새 흩어 사라져버립니다. 멍~.

어떤 때는 쓴 것을 보고, 혹은 쓴 것을 생각해 내고. 오히려 거꾸로 합니다. 그러면 머리 속에 희미하게 흩어졌던 편린들이 아장아장 살아납니다. 그런 날은 무섭게 노트를 펼칩니다. 그리고 그저 본대로, 생각한대로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지요. 한번쯤 써봤던 내용처럼 선명하니까요. 또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나를 쓸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넘어진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습니다” 라는 캠벨의 말처럼, 무언가 쓰다 보면, 요상한 돌 뿌리들이 있어 제 발을 걸고 듭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피하려 들었지만, 이제는 속는 셈 치며 그곳에 넘어집니다. 한참을 끙끙대며 손가락 가는 대로 쓰다 보면, 불현듯 플래쉬가 터집니다. 게다가 그렇게 터진 플래쉬는 일상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뜩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보물)를 줍지요.

쓴다는 것. 때론 흐리게, 때론 맑게 되인 기억들을 불러내어 영차! 영차! 오늘의 마음으로 잇는 일. 꿈처럼. 인생처럼. 쓴다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건져내는 일인가 봅니다. 쏟아져, 흩어져, 흐려져버릴 작은 부분들을 건져 올려 오늘과 잇고, 또 그 부분이 흐려지면 다시금 건져 올려 오늘과 잇고. 그게 바로, 우리들 마음이니까요.



오늘은 데자뷰가 찾아와 보물을 주고 갑니다. 좋은 녀석.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실은, 꿈도 인생도 글쓰기도 마음도, 전부 데자뷰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이렇듯 희미하고, 이렇듯 신비로운 것이 없습니다. 또, 이렇듯 홍수처럼 쏟아지고, 이렇듯 물결 터지듯 흩어지고, 이렇듯 서리 차듯 흐려지는 것이 없습니다. 허망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 치열해하기도 하고, 흐릿해하기도 하고, 사실인양 선명해하기 하고, 웃고, 떠들고, 흘기고, 떠나고, 잊고, 미소 짓는 일. 전부 헛소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꿈, 인생, 마음, 글쓰기, 그리고 어쩌면 데자뷰까지도 아름답고 정겨운 내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일상의 황홀’이란 역설이라는 것을. 그리고 운 좋게도 우리들은 매번 그걸 꾸고, 그걸 살고, 그걸 잇고, 그걸 쓰고, 어쩌면 그걸 한번쯤 더 보는 것입니다. 이렇듯 슬쩍.

* 구본형, <일상의 황홀> 제목을 빌려옴.
IP *.235.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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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22 12:44:52 *.127.99.39
님의 글에 공감해요.
천의 얼굴 읽고 저도 꿈적기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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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22 17:28:43 *.235.31.78
이 글...
부끄럽네요. ㅎ
너무 감상적이라 얼굴이 화끈화끈.
공감해주시는 내용이 있어 다행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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