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구본형
  • 조회 수 3730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2008년 4월 22일 05시 26분 등록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어,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밥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진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시 전문,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번역, 시집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 (1964) 중에서)

******************************

나는 이 시를 만년필로 옮겨 적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내가 소년이었던 그때로. 문명 이전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 그러나 꿈으로 가득했던 내 인생의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아무 것도 나를 막지 못했다. 그저 한 순간에 단 한걸음으로 그렇게 왔으니까.

시는 놀라운 기쁨으로 내 의식을 나르는 타임머신이다. 알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 가득한 곳에, 마치 되 돌아오듯, 그때 그곳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휘휘 둘러 본 다음 다시 지구로 돌아오듯, 가기 전의 지구와 다시 돌아 왔을 때의 지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땅 그 하늘이 전과 달랐다. 나는 이 봄 도화꽃잎 떠가는 강물이 되어 흐르는구나.


네루다는 나를 남미처럼 뜨겁게 달구어 줍니다. 가장 처음 만난 그의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IP *.128.229.228

프로필 이미지
햇빛처럼
2008.04.22 05:35:21 *.254.51.245
사부님..

사부님의 글에서 말씀에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의 바로 그 """느낌"""이 있는 시군요.

경민이가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줘서 너무 고마운 것 같아요.

프로필 이미지
거암
2008.04.22 07:26:59 *.244.220.254
'시'(詩)라는 은하수 속에서 춤추는 사부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생각보다 춤 잘 추시는데요~ 왈츠, 고고, 힙합 아니면 지루박? ^^
프로필 이미지
앨리스
2008.04.22 08:55:59 *.248.16.2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컴을 켜고 메일열고 변경연 사이트에 들어왔습니다. 그랬더니, 시의 홍수가..^^ 그 중에서도 구선생님께서 직접 올리신 이 시가 또한 저의 애송시이고 보니 감동 또 감동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시처럼 살고싶다'라고 말씀하셨던거 같아요..저는 그때 그 말씀이 정말 감동이었거든요. 좋은 시 - 제게는 일상의 황홀이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4.22 09:18:58 *.36.210.11
복사꽃잎은 목련과 달라요.
목련이 한껏 피었다가 그 커다란 꽃잎파리를 떨구며 저 혼자서 시커멓게 타들어가듯 지고말 때,

복사꽃잎은 한장한장 나부끼며 보채듯 귀여운 여인네의 애틋한 심사로 달려나와 앙증맞고 고운 눈 오래오래 맞추고 입 내밀어 포근히 안기며 도저히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휘휘 감길듯 매달려 애처로이 한잎한잎 떨구는 것 같아요.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사부님 일상 한가운데 복사꽃처럼 설렘으로 다가왔을까요? 우와~ 어쩐지 청춘의 봄! 봄! 버라~ 봄~ 봄!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 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춘희류경민
2008.04.22 15:46:42 *.111.241.162
와우! 선생님.
이렇게 쉽게 적어도
이렇게 생각을 나열하듯 하여도 시라면
저도 쓸수 있을 것같아요!^^

시라면
몇연에, 몇행에, 음율은 어떠해야 하고
비유가 있어야 하고....뭐 이래야만 하는줄 알았어요.

우리시골의 들꽃의 이름, 햇살의 빛깔만 적어도 시가 될것 같아요~~
저도 멋진 만년필로 적어 볼래욤...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8.04.23 00:34:02 *.128.229.99

춘희야. 네가 아무리 경민이라 주장해도 나는 춘희가 좋구나.
오늘 봄꽃을 가득 사와 화분에 담아 두었다.
몇 놈, 월동이 되는 놈은 땅에 심었다.
'골새앙바드레'
그 유년 시절, 그것이 네 아름다움이 되었구나.
펄펄 뛰듯 네 기쁨이 되었구나.
프로필 이미지
푸른바다
2008.04.23 10:17:52 *.223.104.12
구본형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저서에서 아래의 이런 글귀를 적어내려 가셨었죠.

자기를 경영하고, 사람을 경영하는 '변화경영의 시인'.. 선생님의 버킷리스트! ^^
==============================================================
변화 경영을 시작하면서 나 역시 물처럼 흘러 바다를 향하는 작은 강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번도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는 것, 그러나 하류로 흐르면서 더 많은 물을 품고 더 낮아지고 유장해져 바다에서 다른 강물들과 만나는 삶, 나는 그것이 변화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내 명함에는 ‘변화 경영 전문가 ’ 구본형‘ 이라고 적혀있다. 마흔 여섯 살에 직장을 나와 내 스스로의 정체성이 필요할 때 나를 지탱하게 해준 스스로 명명한 내 직업의 이름이다.

그러나 쉰 살의 중반을 맞아 나는 ’변화경영사상가‘ 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싶다. 말 그대로 어떤 기술적 전문인에서부터 변화에 대한 철학과 생각을 일상과 녹여내는 사상가로 진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가능할 지 모르지만 나는 ’변화경영의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

나이가 들어 시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는 젊음의 그 반짝임과 도약이 필요한 것이므로 평화를 지향하는 노년은 아마도 그 빛나는 활공과 창조성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러나 시처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시처럼 아름답게 살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연과 더 많이 어울리고, 젊은이들과 더 많이 웃고 떠들고, 소유하되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할 것이다. 내가 왜 시인이 되고 싶은 지는 잘 모른다.

그저 시적인 삶, 묶인 곳 없이 봄날의 미풍처럼 이리저리 흩날려도 사람들을 조금 들뜨게 하고 새로운 인생의 기쁨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그런 삶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리라.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4.23 11:53:28 *.36.210.11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진한 지혜;
.
.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바람에 풀린 사부님은 곧 우주와 삼라만상과 신비의 절대자와 도화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날에 낮술을 한 잔?

“진정한 상징은 단순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생의 내적 의미와 실재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상징은 주변의 다른 곳이 아니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깊은 자아, 타인, 신과 사랑을 나누며 의식적으로 교섭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뜻이다.” 304p <조셉 켐벨/ 신화와 함께하는 삶>
프로필 이미지
미카엘라
2008.04.23 21:45:36 *.231.19.133
영화처럼 사부님의 시가 쫘악 펼쳐져요....
한사람의 서성거림으로 시작해서 우주속의 한 자유로운 존재임을 느끼는....영화속의 장면들....

저도 금새 좋아졌어요.....이 시....

시 축제 넘 즐거워요...
좋은 시들과 그 사연들이 가슴에 많이 와 닿으면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어...꽃들이 만연한 이봄과 너무 잘 어울려요.... ^^
프로필 이미지
김신웅
2008.04.24 23:27:23 *.47.107.83
선생님 이 시를 읽고 나니 마음이 날아갈 듯 춤을 추는 것 같아요. 왜 사람들이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지 이제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기뻐요. 아.. 시와 신화는 정말 다르지 않군요. 시를 읽고 우주의 신비와 맞닿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