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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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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7일 04시 44분 등록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 안 진 -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않고 김치냄새가 좀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불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돕는
진실한 친구가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을 그 많은 구경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두가지만 제대로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신이 돼 있을껄...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속 침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에
더 매력을 느끼려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베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시킬때는 여왕처럼 품위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싫은 일을 하지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었다고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여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 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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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더 됐군요...

선배가 이 시를 빼곡히 적어 내게 부쳐 주었는데
참 좋아 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시가 내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어쩌면
아직도 이 시를 읽으며 꿈꾸던 상상속의 친구를
가슴 속에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IP *.131.12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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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4.27 04:48:47 *.254.51.245
저도 중학교 시절에 짝이 보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번이나 옮겨 적어 봤던 기억이 나네요.

내가 시를 좋아한 적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축제에 빠져 있다보니 내 마음을 거쳐갔던 많은 시들이 새록 새록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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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4.27 08:12:05 *.72.153.12
아름답고 살랑거리지만, 길고 힘든 하루를 보내고서
이 시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아 그래, 그랬어. 잊고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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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27 08:26:54 *.36.210.11
중학교 동창 하나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갈리어 간 어느 날 만년필로 촘촘히 적어 부쳐준 그녀의 첫 편지였지요. 그리고 얼마 후 시인의 이 제목으로 된 책이 출간되어 나왔었지요. 나도 따라서 촘촘히 적어 보던...

저녁을 먹고서 파자마 같은 허술한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가 허물없이 친구의 집에 들러 함께 차를 나누고 올 수 있는 장면이 늘 스치듯 지나가지요.

현실적으로 그게 그리 쉽지 않다고 할 때, 지금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따로 또 같이 이런 저런 마음들을 나누어 보는 것은 의미 있고 따스하고 또 좋은 일이지요.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일상과 함께 살아가는 詩,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비수처럼 각인처럼 꽂혀 삶 가운데 여울져 함께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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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주
2008.04.27 09:44:22 *.102.165.198
와우, 이 시 지금 저희 집 벽에 걸여있어요.
제 어여쁜 친구가 묵을 갈아 곱게 써 주었지요.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일수 있게 하는 것들,
내 속의 나로 돌아오게 하는 것들이 시이고,
이런 벗이 아닐까 합니다.
자랑해도 될까요? 저 이런 벗이 있답니다.
우리집 가까이는 아니지만 생각하면 마음따뜻해지는
이런 벗이 있답니다.
저도 이런 벗이면 좋을텐데...
진정 더 많이 배우고 깊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운 향기 내뿜는 벗이고,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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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4.27 12:36:51 *.254.51.245
현주님..

이런 벗은 혼자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님이 이런 벗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을 보면

님은 이미 그 친구에게 이런 벗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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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4.27 14:03:13 *.67.52.208
제목만 어렴풋이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 시를 읽게 되네요.
친구가 소중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며
나와 인연있는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멀리서 찾으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인생의 무대임을 겨우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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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8.04.27 19:06:40 *.174.185.24
백산님 덕에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게 됩니다. 감사.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요.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 시인, 작가, 사건, 사고... 그저 개인적인 시공간의 공동점유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네요.

사부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깨우침을 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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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8.04.27 19:37:24 *.252.102.187
잘 읽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글을 정말 좋아했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지금은 미국에 있지만, 그래도 항상 위안이 되는 친구지요.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그 친구 생각이 간절하네요. 메일보내야겠습니다. 지금은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이란 구절이 가슴에 와닿는 걸 보면, 제가 나이들어감을 실감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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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8.04.27 20:28:48 *.111.241.162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모르면 간첩같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로 예쁘게 적어주며
지란지교가 되고자 약속했었지요.

얼마 전
말로 표현은 잘 하지 않지만 은근히 나를 챙겨주는
고마운 직장 동료가 있어 이 시를 적어 보냈어요.
받는이도 좋아했지만 저도 마음이 넘 푸근해져서 행복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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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희
2008.04.28 10:53:10 *.86.169.137
국민동창에게서 처음 소개받고..
그 다음부터 새로만난, 또는 관계가 익어가는 곳에서는 꼭 나타나는 시네요..
어쩌면 이미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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