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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9일 18시 15분 등록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좋아하는 시가 있어 한 편 올렸는데 또 올려봅니다.
곽재구 시인의 1983년 작품이며,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예전에 이 詩를 보는 순간 참 좋다~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춥고 배고픈 서민의 정서, 귀향을 앞두고 오지않은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감정이 따뜻하게 전체적인 시 분위기로
형상화되어 있지요...이미지가 너무나 뚜렷하여 존재하지 않은
사평역이 실제 존재하는 공간으로 생각되게끔 느껴집니다.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이라는 시집이 있다고 하던데 여유있을때
봐야 되겠습니다.

IP *.173.4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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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8.04.29 21:51:44 *.128.229.163

거 참, 그의 책이 내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 포구를 찾아 떠 돈 시 같은 산문집이었는데.
누가 먹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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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옥균
2008.04.30 08:52:02 *.223.191.38
저도 그 책 가지고 있는데 다음번 만날때 가지고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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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2008.04.30 08:55:51 *.248.16.2
구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먹은 듯 합니다^^ 제 책꽂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거든요 ㅎㅎ 오래전 초등학교(국민학교라 불렸던 시절의) 친구가 선물해 줬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네요. 다시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산다는 것 = 침묵하는 것...'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속에 던져 주었다..' 가장 가슴에 남는 구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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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5.08 15:05:29 *.126.48.50

좋은시죠. 씹을수록 맛이나는 칡뿌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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