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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일 08시 40분 등록
어느 동화 작가의 이야기(어른들을 위한 동화)_5



#4
새롭게 내 놓은 <못난이 아저씨>는 그의 지난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예상과는 달리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보다는 많은 돈을 벌어주긴 했지만, 그 차이라는 것이 그리 큰 것은 아니어서, 나무를 해서 내다 팔아야 하는 생활은 계속 되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은 실망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작품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뮤즈와 함께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뒷짐을 지고 방안을 서성이던 뮤즈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작품이 잘 안돼서 실망이 크지요?”
뮤즈는 남편의 얼굴을 곁눈질로 훔쳐보았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처음엔 좀 그랬죠. 당신과 함께 쓴 책이라 완전히 빅 히트를 칠 줄 알았거든요.”
남편의 담담한 반응에 뮤즈는 좀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남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대목들이 참 많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 말이에요.”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구절들을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팔찌 없는 그 손목
가랑비에 젖은 채 소매에서 나와 있네

“팔찌 없는 그 손목이라…… 어때요? 손목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지요?”
그는 벌써부터 감상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표현도 정말 좋았어요.”
그는 두 손을 입 쪽으로 모으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 술통처럼 뚱뚱한 사나이가 말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훗. 나는 아주 짧게, 하지만 매우 강력하게 사내의 이미지를 그려주었죠.”
그는 계속해서 구절을 낭송했습니다.

* 그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죽음은 거기에 없었다. 다른 거리로 돌아서 가 버린 게지. 죽음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포도 위를 소리 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 대목은 너무나 몽환적이라, 독자들은 모두 죽음의 언저리까지 다녀 올 수 있었지요. 그래요. 마치, 죽음 속에 드러누워서 그 죽음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잠시 쉬었다가,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화문은 바로 이 부분이지요.”

*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사랑의 가벼운 날개를 타고, 이 담을 넘어 왔소.”
“무슨 일이 있어도 들키지 않도록 하세요.”
“밤의 외투를 입고 있으니 들키지는 않을 것이오.”
“누구의 안내로 여길 오셨나요?”
“사랑의 안내를 받았소. 처음 찾아보라고 재촉한 것도 사랑이었소.”
“제 얼굴에도 밤의 가면이 씌워져 있어요. 그렇잖으면 소녀의 수줍음 때문에 뺨이 붉어질 거에요.”

그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구(詩句)도.”

*운명을 조종하는 세 자매들.
손에 손을 맞잡고 마음껏 돌자. 바다든 물이든 질풍처럼 돌자.
돌아라 돌아라, 마음대로 빙글빙글
너도 세 번 나도 세 번
또다시 세 번이면 모두 합해 아홉 번이 되누나.
쉿! 이것으로 주문은 걸렸다.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정말로 주문에 걸려 버리고 말지요. 하하하.”
남편은 매우 흡족해 하며,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구절들을 가만히 음미했습니다. 물론, 뮤즈도 함께 말입니다. 그날 새벽, 남편과 뮤즈는 자신들의 낭송시에, 다시 이런 시구를 달아 날려주었습니다.

낭송시에 달다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몇 년이 더 지나갔습니다. 남편은 그 동안 <붉은 왜가리>, <태양아>, <빨간 불쏘시개>, <명석한 꼬마>, <풀의 새싹처럼>, <향인(香人)>, <개구쟁이> 따위의 명작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그의 동화는 처음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인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결국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추며 명문(名文)으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사람들은 잊혀졌던 그의 초기작들을 찾아보며, 자신들의 책에 보란 듯이 인용하곤 했습니다. 유명세를 타고 잇달아 발표되는 작품들을 그저 인용하는 것 보다는, 남달리 그의 초기작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지경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나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꼼꼼히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며 그의 문장에 탐닉하곤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하여…… 진실된 영혼의 처마는 언제나 마주 닿아 있는 법이니까요.




* <아라비안 나이트>, 알 왈라한의 시를 인용
* <분노의 포도>, 스타인벡
* <킬리만자로의 눈>, 헤밍웨이
*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 <맥베스>, 셰익스피어
* <풍경 달다>, 정호승
IP *.235.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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