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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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화 작가의 이야기(어른들을 위한 동화)_5
#5
어느덧 남편과 뮤즈가 함께한 시간은 30년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들은 이미 애틋한 정을 나누는 든든한 지기(知己之友)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 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함께 해왔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 남편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자, 처음부터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던 뮤즈와는 겉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그 관계가 더욱 진중해 보였습니다.
그날도 남편과 뮤즈는 어김없이 미명의 운치를 벗삼아 글쓰기에 한창이었습니다. 뮤즈가 말했습니다.
“여느 문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네에게도 어느새 깊이가 보이는 구만. 허허허.”
남편은 쓰던 것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이는 무슨……”
“혹, 그 깊이라는 것이 보이는 바라면, 나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일 셈이라네.”
남편이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뮤즈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 또 그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구먼. 허허.”
남편이 말했습니다.
“맞아. 시간이 된 모양이야. 잔잔한 흐름이 깊은 골을 만든다 하지 않나? 나같이 보잘것없는 흐름이 깊이를 주었다면, 그것은 시간이 된 것이지. 나는 썩이나 담담하다네. 허허허.”
뮤즈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에 대해서 더욱 치열해지던 적이 있었지. 그리고는, 그 시간의 풍유를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네. 그렇다고 호기(씩씩함)로이 이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저, 그 받아들임이란 것에 대해 담담히 내어줄 수 있게 된 것뿐이라네.”
뮤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한 가지, 내가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지나온 생애가 아름다운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라네. 동화를 써왔네만, 허허. 물론 그 거대한 직선 위에 점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동화라는 이름으로 그 흐름에 풍요히 머물렀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되었네. 그 점조차도 제대로 찍지 못하여 쓸쓸히 흩어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런가?”
뮤즈가 웃었습니다.
“미안한 얘기네만, 자네에게는 정말 시간이 되었나 보이. 허허허.”
남편도 웃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여보게 뮤즈. 자네에게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인생이라 이름한 악마의 도전을 그리도 쉬이 넘어오지는 못했을 듯 하이.”
뮤즈가 말했습니다.
“허허허. 이 친구 이제는 별말을 다하는구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나. 그 도전을 꿋꿋이 지켜냈던 것이 나 때문이었는지, 자네 자신 때문이었는지를 말이야. 허허허.”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뮤즈가 읊조렸습니다.
“짐을 실은 당나귀, 나는 그대들의 그 단단함이 그저 좋다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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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느덧 남편과 뮤즈가 함께한 시간은 30년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들은 이미 애틋한 정을 나누는 든든한 지기(知己之友)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 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함께 해왔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 남편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자, 처음부터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던 뮤즈와는 겉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그 관계가 더욱 진중해 보였습니다.
그날도 남편과 뮤즈는 어김없이 미명의 운치를 벗삼아 글쓰기에 한창이었습니다. 뮤즈가 말했습니다.
“여느 문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네에게도 어느새 깊이가 보이는 구만. 허허허.”
남편은 쓰던 것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이는 무슨……”
“혹, 그 깊이라는 것이 보이는 바라면, 나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일 셈이라네.”
남편이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뮤즈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 또 그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구먼. 허허.”
남편이 말했습니다.
“맞아. 시간이 된 모양이야. 잔잔한 흐름이 깊은 골을 만든다 하지 않나? 나같이 보잘것없는 흐름이 깊이를 주었다면, 그것은 시간이 된 것이지. 나는 썩이나 담담하다네. 허허허.”
뮤즈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에 대해서 더욱 치열해지던 적이 있었지. 그리고는, 그 시간의 풍유를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네. 그렇다고 호기(씩씩함)로이 이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저, 그 받아들임이란 것에 대해 담담히 내어줄 수 있게 된 것뿐이라네.”
뮤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한 가지, 내가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지나온 생애가 아름다운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라네. 동화를 써왔네만, 허허. 물론 그 거대한 직선 위에 점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동화라는 이름으로 그 흐름에 풍요히 머물렀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되었네. 그 점조차도 제대로 찍지 못하여 쓸쓸히 흩어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런가?”
뮤즈가 웃었습니다.
“미안한 얘기네만, 자네에게는 정말 시간이 되었나 보이. 허허허.”
남편도 웃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여보게 뮤즈. 자네에게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인생이라 이름한 악마의 도전을 그리도 쉬이 넘어오지는 못했을 듯 하이.”
뮤즈가 말했습니다.
“허허허. 이 친구 이제는 별말을 다하는구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나. 그 도전을 꿋꿋이 지켜냈던 것이 나 때문이었는지, 자네 자신 때문이었는지를 말이야. 허허허.”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뮤즈가 읊조렸습니다.
“짐을 실은 당나귀, 나는 그대들의 그 단단함이 그저 좋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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