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숲
- 조회 수 349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나무, 폭포, 그리고 숲/박남준
1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 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저 물길의 어디쯤 징검다리가 있을까 한때 나의 삶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로 이어지던 길, 산 너머 노을이 피워놓은 강 저쪽 꿈 꾸듯 흐르던
금빛 물결의 길을 물어 흘러갔다
그 강가에 지고 피던 철마다의 꽃들이여 민들레여 쑥부쟁이여 강 저
편 푸른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그때마다 산 그림자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새들의 무덤이 보고 싶었지 나무들이, 바람이, 저 허공중의 모든
길들이 풀어놓은 새떼들이 돌아가 눕는 곳 저 산, 저 물길이 다하여 이르
는 곳일까 미루나무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한 불빛들이 목이 메어
왔다
2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그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꺾어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었다 울컥울컥 울컥울컥 너
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
리 가로지른다
3
구비구비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구비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
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일생을 수직의 삶으로 살아왔던 것들, 나무들이 가만히 그 안을 기웃거
린다.
물가에 앉아 잠긴다 지나온 시간, 흘러온 내 삶의 길, 그 길의 직립보행
에 대해 생각한다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그 물가에 다가가 얼굴울
비춰본다
4
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 말없는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
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5
비로서 숲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그대와 그대의 그대
와 그대의 모든 것들과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과
그 숲속에 눕는다. 언제인가 숲이 눕고 숲이 다시 일어났듯이 내 안의
삶들도 다하고 일어나기를, 오래 누웠던 자리에 숲의 고요가 머물렀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 또한 그 숲에 멀어지거나 가까이 있었다
-------------------------------------------------------------------
매월 회사 홈페이지에 이달의 시를 추천하여 올립니다.
작년 가을 11월의 추천시입니다.
어느날,문득 지리산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내와 함께 지리산 만복대를 올랐습니다.
만복대 지리산의 등뼈에서 가을날을 기억했습니다.
언젠가 구본형선생님의 책에서 박남준시인의 위 시를 읽었습니다.
박남준시인은 전주 모악산에서 살다가 지금은 섬진강 악양에서
시를 쓰면서 시와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사는 분입니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
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시인의 언어는 구본형선생님의 언어와 닮았습니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꽃힐 수 있는냐"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289 | 나두 시 하나~ [8] | 박안나 | 2008.05.27 | 3007 |
2288 |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1] | 걷기 | 2008.05.26 | 3898 |
2287 | 결혼(結婚) [3] | 거암 | 2008.05.26 | 3266 |
» | 나무,폭포,그리고 숲/박남준 | 지혜의숲 | 2008.05.26 | 3493 |
2285 | 이브의 천형 중에서 | 이선이 | 2008.05.26 | 2815 |
2284 | 식사법- 강유미 [2] | 눈큼이 | 2008.05.24 | 3430 |
2283 | 소년 [3] | 권기록 | 2008.05.23 | 2963 |
2282 | 여행길에서 [1] | 현운 이희석 | 2008.05.23 | 3227 |
2281 | 모든 판단은 자신의 책임이다. | 햇빛처럼 | 2008.05.23 | 2945 |
2280 | 풀꽃 [2] | 안나푸르나 성은 | 2008.05.23 | 3150 |
2279 |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2] | 김신웅 | 2008.05.22 | 6803 |
2278 | 램프와 빵 [2] [3] | 김유수 | 2008.05.22 | 3761 |
2277 | 신화얘기와 나의 종교 [1] | 이수 | 2008.05.21 | 3109 |
2276 | 혼자 논다 -- 구 상 [4] | 이문화 | 2008.05.21 | 3961 |
2275 | 마더 데레사의 시와 기도 [1] | 찾다 | 2008.05.21 | 4874 |
2274 | 봄길 /정호승 [3] [4] | 바다보배 | 2008.05.20 | 5820 |
2273 | 시대 / 서찬휘 [2] [2] | 형산 | 2008.05.19 | 4436 |
2272 | 서산대사의 시 [1] [3] | 이성주 | 2008.05.18 | 6183 |
2271 | 화염경배 (이면우시인) [1] [3] | 이성주 | 2008.05.18 | 3973 |
2270 | [98] 낙화 / 이형기 [3] | 써니 | 2008.05.18 | 42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