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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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폭포, 그리고 숲/박남준
1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 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저 물길의 어디쯤 징검다리가 있을까 한때 나의 삶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로 이어지던 길, 산 너머 노을이 피워놓은 강 저쪽 꿈 꾸듯 흐르던
금빛 물결의 길을 물어 흘러갔다
그 강가에 지고 피던 철마다의 꽃들이여 민들레여 쑥부쟁이여 강 저
편 푸른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그때마다 산 그림자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새들의 무덤이 보고 싶었지 나무들이, 바람이, 저 허공중의 모든
길들이 풀어놓은 새떼들이 돌아가 눕는 곳 저 산, 저 물길이 다하여 이르
는 곳일까 미루나무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한 불빛들이 목이 메어
왔다
2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그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꺾어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었다 울컥울컥 울컥울컥 너
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
리 가로지른다
3
구비구비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구비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
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일생을 수직의 삶으로 살아왔던 것들, 나무들이 가만히 그 안을 기웃거
린다.
물가에 앉아 잠긴다 지나온 시간, 흘러온 내 삶의 길, 그 길의 직립보행
에 대해 생각한다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그 물가에 다가가 얼굴울
비춰본다
4
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 말없는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
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5
비로서 숲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그대와 그대의 그대
와 그대의 모든 것들과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과
그 숲속에 눕는다. 언제인가 숲이 눕고 숲이 다시 일어났듯이 내 안의
삶들도 다하고 일어나기를, 오래 누웠던 자리에 숲의 고요가 머물렀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 또한 그 숲에 멀어지거나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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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회사 홈페이지에 이달의 시를 추천하여 올립니다.
작년 가을 11월의 추천시입니다.
어느날,문득 지리산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내와 함께 지리산 만복대를 올랐습니다.
만복대 지리산의 등뼈에서 가을날을 기억했습니다.
언젠가 구본형선생님의 책에서 박남준시인의 위 시를 읽었습니다.
박남준시인은 전주 모악산에서 살다가 지금은 섬진강 악양에서
시를 쓰면서 시와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사는 분입니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
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시인의 언어는 구본형선생님의 언어와 닮았습니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꽃힐 수 있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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