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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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국에 케보키언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이 의사는 거의 무의식상태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람을 100명이나
안락사시키고 이것을 발표하고 스스로 감옥에 간 것이다.
이 의사를 재판을 하고 감옥에 넣고 이를 세상에 알린 사람에 비하면
이 의사는 용감한 거인이다.
분명히 이렇게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인데 세상사람은 실정법을
따져서 범죄로 쳐서 처벌을 한다.
인간의 생명은 물론 실정법보다 더 차원이 높은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세상에
그 누구도 아니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인간의 생명을 어찌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자기 죽음을 선택해서 위대한 인생으로 매듭을 지은이가 이세상에는 한둘이
아니다.그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 소크라 테스 이순신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자기 죽음을 선택한 망국 원한 인사(민영환등) 등등 이것을 들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나가지 않더라도 나이 들어 주위에 짐만 되고
더이상 세상에서 할일도 없고 쌀만 축낼 수가 없다하고 시골에서 그냥 스스로
굶고 비실 비실 대다가 저세상에 가는 사람을 나는 듣기만 들었지만 딱이
그렇다고 말하기가 그래서 그렇지 분명히 우리 주위에는 있기는 있다.
우리는 사실 죽음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이것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즉 이것을 감당하는 행사가 문제인 것이다.나는 군대에서 빳다를 맞아봐서
안다.빳다를 맞아 보면 설령 심한 후유증이 난다고 해도 맞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맞기까지 거치는 행사에 비하면.
그런데 빳다 맞는 것에 견주면 죽음은 보통일이 아니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누구나 편안하게 죽고 싶어 하지만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각양 각색의 방식대로 죽고 싶어 하지만 이것은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자기 죽음을 가지고 싶어한다.
죽어가는 것을 보면 많은 경우 인생을 어떻게 살아 왔느냐를 알 수 있다.
모든 끝맺음을 보면 그것을 알수 있듯이 인생도 그렇다.
어쩌다가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아야 할 때가 왜 없을가.
그것을 자기 식대로 잘 감당해 나가는 것도 그모양새에 따라 얼마든지
멋있는 매듭을 지을 수도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의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것다.죽음이라는 독특한 병을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설명해서 유명한 철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거기다가 내가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갈수록 범주화할 수 없는 생물이 되어 간다고
하는데 사실은 원래 그랬었다고 본다.다만 지금 더 잘 그런 것이 눈에
뜨인다는 것이 다르다.
이세상에 억만겁을 놓고 보아도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죽음도
그렇다.그래서 적어도 인생살이나 죽음은 정답이 없다.모두가 나름대로
멋있고 의미있는 죽음을 한다.나도 그럴 것이다.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준비가 덜 되었다.어차피 그렇게 되겠지만 나는 가장 나다운 죽음을
맞을 것이다.
참새가 아무데서나 짹짹하고 짖어대지만 죽을 때가 가까워 지면
뭔가 달라진단다. 자세히 들어보면 알수가 있단다. 죽어가는 새는
울지 말아야 할 때도 쉬지 않고 슬피울며 주위 참새한테 목이 매이게
울어 삿는다고 한다. 마치 유언을 하듯이.
나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받아 드릴가 한다.
이것은 무서운 말이다. 죽음이 가까워 지면 워낙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서도그대로 잘 아니 되는 것이 문제다.
언젠가 내 주위에 췌장암으로 의사가 오락가락하는 얘기를
듣고는 주위사람을 세상을 뭐라고 그러면서 못살게 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 드릴가 하는 것은 설령 내가 이렇게
췌장암으로 곧 간다고 해도 이렇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지금껏 살려
준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결혼을 늦게사 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하여튼 이런 저런 방황끝에
했다.그러다가 결혼후에 다른 여자를 볼 때 결혼 할수도 있다는 여자를
이제는 결혼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하니까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것도 이무리 이쁜 여자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냥 이쁜 여자는 그냥 이쁜 여자일 뿐이다. 하고 생각하기가 한동안
쉽지가 않았다.죽음도 이런 것이 아닐가.원하든 원하지 않든 닥친
죽음을 그대로 순순히 받아 드려야 한다는 것이.
언젠가 내가 티 브이에서 본것인데 미국에 카운셀러로 유명한 필 박사라는
분이 고정 프로에서 관련된 사람을 모아놓고 방청객까지 동원해서
카운셀링을 하는데 젊은 부부가 있고 여자측 부모가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자기 딸인 젊은 여자를 어릴 때 성학대를 해서 그것으로 괴로워
하다가 서로 대화가 잘 아니되어 여기까지 왔다.
여자는 자기 아버지 한테 이렇게 저렇게 못된 짓을 했잖냐. 그래서
내가 평생 정신적으로 병신이 되었다고 쏘아 대는데 이 노인네는 자기
마누라 옆에서 난 그런 적이 없었다고 딱 잡아 땐다.유 디드 하고
아이 디딘트 하는 것의 연속이다.이렇게 어색한 장면을 필 박사는 옆에서
즐기는 것인지 여러가지 모양으로 험악한 분위기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한참을 그런 상태를 그냥 지켜보며 어느 정도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이것이 모든 사람이 보아야 하는 카운셀링인가 하고
되뇌게 하였다.그러다가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서로 얼토당토
않는 사실을 그대로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젊은 여자나 남편이나 늙은 부부나 마치 엉뚱한 죽음을 맞듯이.
생각해 보아라. 내가 이런 일을 당했어도 그냥 참아 낼수 있었을가.
아니라면 큰일이다.모르긴 해도 더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예수님도 죽을 때 괴로워 될대로
되라 하느님한테 내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세요 하시면서 갔다.
그것은 나는 죽기 싫은데 그렇게 죽으라면 할수 없지요 하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보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인 이상 지켜야지
하면서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그냥 그렇게 판결이
났으니 따른 것이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재판이 엄격하지도 않았고
전해지는 것 처럼 친구들이 권하는 대로 그냥 다른 도시에 피했다가
와도 되기는 되었나 보다. 약간 편법이긴 해도..그러나 그래 봤자다.
얼마나 더 영화롭게 살가 늙으막까지 살았고 구차한 삶을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게 택한 것이 스크라테스의 죽음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죄도 아니다.평생 세상사람들 한테 비비 꼬듯이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내세웠으니 이것을 못받아 드린 것이다.
산파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를 약올리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라면 그리고 그리 오래 살아 왔다면 이제는 어찌 즉든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죽는 것도 마 괞찮다 하고 죽은 것이다.
난들 어찌 죽을지 어찌 알가. 다만 내가 바라는 식으로 즉 명분이
있으면 더더욱 좋고 없으면 없는대로 원없이 열심히 살았으니
저세상에 가서 쉬어야 한다.
아무튼 등산다닐 때 저 고개하나 넘어가서 쉬자 하듯이
나는 거기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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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저도 죽음을 자주 생각해요. 그러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에 자주 우울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리곤 죽음과 생이 결국 그 어느 한쪽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했어요. 즉 산다는게 죽는다는거와 다르지 않더군요. 물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살아있는) 보통의 인간에게 생과 사를 초월한 삶은 어려운 것이겠지요.
구본형 선생님이 종종 글에 표현하시는 글귀가 생각나네요. 우리는 매일 죽음을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밥, 야채반찬, 고기반찬 등 다 죽은 것들이죠. 매일매일 죽음을 먹음으로써 살아가는거죠. 이렇게 보면 죽음은 참 친숙한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일부 종교라는 것이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그 역시 주관적이란 색채가 강하죠. 신앙이 없는 분들도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도 적지않으니까요.
죽음은 참 조심스러운 주제에요. 그래서 저는 죽음을 생으로 환원해서 생각하고 싶어요. 즉 현재에 만이라도 집중할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유명 문인들의 가상 유언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있는데, 그 중 어떤 분의 시의 한 내용이 떠오르네요. 기억에 의존한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없다.
죽음은 과거이고,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살 수 없다."
오직 현재밖에 살 수 없는게 인간이니
이제는 죽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을 것 같아요.
구본형 선생님이 종종 글에 표현하시는 글귀가 생각나네요. 우리는 매일 죽음을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밥, 야채반찬, 고기반찬 등 다 죽은 것들이죠. 매일매일 죽음을 먹음으로써 살아가는거죠. 이렇게 보면 죽음은 참 친숙한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일부 종교라는 것이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그 역시 주관적이란 색채가 강하죠. 신앙이 없는 분들도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도 적지않으니까요.
죽음은 참 조심스러운 주제에요. 그래서 저는 죽음을 생으로 환원해서 생각하고 싶어요. 즉 현재에 만이라도 집중할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유명 문인들의 가상 유언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있는데, 그 중 어떤 분의 시의 한 내용이 떠오르네요. 기억에 의존한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없다.
죽음은 과거이고,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살 수 없다."
오직 현재밖에 살 수 없는게 인간이니
이제는 죽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산
가끔 죽음을 생각하는 까닭은 지금의 삶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자신의 삶이 변화를 필요로 할 때, 자극이나 흥분 유발제로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단 거죠. 물론, 사망선고를 받고 고통스런 병치레 속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죽기를 바라는 사람, 더 낳아지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죠.
제가 아는 훌륭하게 돌아가신 분 중 한분이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소강 민관식 선생님이십니다.
88세 미수(米壽)에 생을 마감하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테니스, 수영과 걷기를 하면서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사회적인 활동도 많이 하셨구요. 돌아가시기 전전날도 지인들과 테니스를 즐기셨고, 돌아가시던 날 저녁식사 후 10시쯤 "나 먼저 들어가 잘께... 잘자..." 라는 말씀을 하고 잠자리에 든 후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건강하게 재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살다가 잠자리에 들 듯이 저 세상으로 가는 죽음. 아직까지 제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죽음모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이 변화를 필요로 할 때, 자극이나 흥분 유발제로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단 거죠. 물론, 사망선고를 받고 고통스런 병치레 속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죽기를 바라는 사람, 더 낳아지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죠.
제가 아는 훌륭하게 돌아가신 분 중 한분이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소강 민관식 선생님이십니다.
88세 미수(米壽)에 생을 마감하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테니스, 수영과 걷기를 하면서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사회적인 활동도 많이 하셨구요. 돌아가시기 전전날도 지인들과 테니스를 즐기셨고, 돌아가시던 날 저녁식사 후 10시쯤 "나 먼저 들어가 잘께... 잘자..." 라는 말씀을 하고 잠자리에 든 후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건강하게 재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살다가 잠자리에 들 듯이 저 세상으로 가는 죽음. 아직까지 제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죽음모델인 것 같습니다.

이수
생과 사는 같다.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먹으면서 산다.
그러면서 죽음에 초연해지기를 연습을 한다.
하루살이씨의 해석,한번쯤은 깊이 생각해야할 통찰입니다.
죽음이 자기것을 다쓰고 가는 축제이고 싶다.
햇빛처럼씨는 햇빛처럼 원없시 이세상에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사시다 가고 싶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멋진 얘기입니다.
민관식전장관처럼 잠자듯이 아니 잠자면서 가고 싶다.
죽음의 철학은 결국 좀더 알친 삶을 위한 것이라는
정산씨의 얘기가 죽음얘기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선고와 같은 병치레로 죽음을 감당못하는
경우일지라도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죽도록 지독한
훈련을 한다면 혹시 사는 듯이 이것을 맞이 할 수도 있지
않을 가요.생과 사는 원래 같은 것이니까요.
저의 고민을 같이 나누신 세분의댓글 고맙습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먹으면서 산다.
그러면서 죽음에 초연해지기를 연습을 한다.
하루살이씨의 해석,한번쯤은 깊이 생각해야할 통찰입니다.
죽음이 자기것을 다쓰고 가는 축제이고 싶다.
햇빛처럼씨는 햇빛처럼 원없시 이세상에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사시다 가고 싶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멋진 얘기입니다.
민관식전장관처럼 잠자듯이 아니 잠자면서 가고 싶다.
죽음의 철학은 결국 좀더 알친 삶을 위한 것이라는
정산씨의 얘기가 죽음얘기의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선고와 같은 병치레로 죽음을 감당못하는
경우일지라도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죽도록 지독한
훈련을 한다면 혹시 사는 듯이 이것을 맞이 할 수도 있지
않을 가요.생과 사는 원래 같은 것이니까요.
저의 고민을 같이 나누신 세분의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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