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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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에 관하여_9
예의, 실패란 것이 있고 성공이란 것이 있다. 불협화음 같은 일상이 있는가 하면 보람찬 오늘 같은 행복이 있는 법이다. K씨는 한 때 생각했다. 실패와 성공은 본래 무의미한 것이라고. 일상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과연 그럴싸하기도 하다. 가령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성공을 위한 도움닫기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한 차례 성공한 교만은 다시금 실패를 불러내는 요괴의 주문이기도 하다. 그대로 실패이고, 그대로 성공인 것은 없다.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 까다로운 것이다.
일상과 행복도 그렇다. 매번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지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행복이란 것도 반드시 그곳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거듭되는 일상에 가끔은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탈이란 것도 결국에는 더욱 힘차게 일상으로 돌아오겠다는 다짐 정도가 되어야지, 그곳에서 행복을 찾겠다고 한다면 인생은 심히 꼬이고 만다. 인생이란 결국 일상과 행복간의 주사위 싸움이며, 필요한 것은 살아가면서 그 행복의 빈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K씨는 이런 것이 인생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순간의 실패와 성공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답게 꾸며갈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인생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K씨에게는 심각한 회의가 찾아 들었다.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성공? 실패? 일상? 행복?”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끝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사는가?”
한동안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 말은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 자극이 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죽음. 매번 잊고 살아가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문제. 그러나 굳이 떠올려 고민한다고 해도 뚜렷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어려운 문제. 늘 도전적이고 낙천적으로 세상의 험난함을 유연히 넘어오던 K씨 앞에, 불현듯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의 가파른 산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저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만남이 헤어짐을 전제로 하듯,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인생을 허무하게 흘려 보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차 죽음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인간은 그렇게 디자인되어 있다. 애잔하게도, 어떤 이들은 어떤 이들보다 좀 더 생동감 있게 존재했던 것뿐이다.
가만히 보면, 삶은 초라한 구석이 있다. K씨는 가끔 인생을 1열 종대에 비유하곤 하는데, 틀린 말은 하나 없다.
“산다는 것? 누가 썼듯이, 1열 종대로 해쳐 모여서 밥 짐을 짊어지고 쓰러트려질 때까지 꾸준히 가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봐야, 아무리 호기를 부려봐야 방법이 없다. 일단은 쓰러지지 않고 가야디. 그래야 삶이디.”
그런데 열에 섞여 한참을 가다 보면 더욱 기막힌 사실에 숨통이 조여 든다. 이야기인 즉 슨,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 참. 1열 종대의 가장 선열에는 이름하여 ‘죽음’이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지 않은가? 다들 가자 하는 것이라 간다지만, 그래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간다지만, 죽음이 왠 말인가?
인생의 목표가 죽음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헌데 알고 보니 모두의 종착지는 그곳이 아니고서야 또 어디겠는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실들 앞에 K씨는 인생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인생을 꾸미는 지대한 것으로 ‘의 식 주’ 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의’이고, 어떤 것이 ‘식’이고, 어떤 것이 ‘주’인지 K씨는 모른다. 한 유행가 가사처럼,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을 건졌다” 하는 수도 있겠으나, 어디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런가? 작년 것들은 유행에 거슬린다 하여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야 하는가 하면, 제 몸에 어울리는 ‘의’를 찾는다 하여 시장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기도 해야 한다. ‘식’도 그렇고 ‘주’도 그렇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매번, 더 맛난 것, 더 근사한 곳을 갈(渴)하기 마련이다. K씨는 이 모든 것에 회의적이다.
K씨는 말한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을 터인즉, 결국 그 나온 대로 돌아갈 것임은 자명하다. 일평생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참으로 폐단이다.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할까?” [전 5:15-16]
그러고 보니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짐짓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육욕의 안경을 재빨리 벗어버린다. 완전히 그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은 조금은 편안하게 삶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옛 성인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공허한 마음을 조금씩 채워가려는 것이다. 허나 그것도 그저 그것 그대로일 뿐, 그런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다 매워질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삶이란 것은 여전히 ‘공수레공수거’인 셈이고, 인생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지혜로운 자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겠냐 마는, 혹은 그런 자가 있다 하기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속내라는 것이 더욱 그러(공허)하다. 전에 있던 지혜자 중에 솔로몬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내가 일평생을 읽고 씀으로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겠다.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온갖 것에 마음을 썼으나, 이제서야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 1:16-18]
자, 그렇다면 K씨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시험적으로 스스로 최상의 행복을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웃는다. 내 인생은 희락 그 자체이다. 내 마음은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또 필요한 쾌락을 제때 취하여 무엇이든 옳게 갈무리(정돈)한다.”
“나의 사업은 크다.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누구보다 많은 재물을 가졌으며 은과 금과 여러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다.”
“나는 창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않고,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않는다. 이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니 그 기쁨의 맛이 달고 심히 기쁜 것이다.”
아무개의 인생이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몸이 희락하고, 재물이 가득하며, 지혜도 여전한데, 그 분복(타고난 복)은 스스로의 수고한 결과니, 그 기쁨이 과연 극에 달하였다 하겠다. 그러나 K씨는 더욱 침울한 결론에 이른다. 즉 슨.
“그 후에 본 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하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얻은 인생의 목표가 산산이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전 2:1-11]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죽음’ 때문이다. 어떤 성현이 그랬듯이, 내가 죽으면, 거대한 우주라도 한낱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죽음을 극복하는 문제’인데. K씨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K씨는 통탄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 1:1-11]
K씨는 전에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대도 그런가요?
편지를 보내고 나면……
또 편지가 언제 오나 확인하게 되고.
편지를 받고 나면……
정신 없이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도,
“보내야 하는데……” 하며 재촉하게 되고.
이에 대해, K씨는 자신도 품고 있던 그 기다림의 애틋함에 대해 이렇게 적어 보냈다.
“편지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 일이 즐거운 까닭은 기다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에도 그랬고, 운동회가 있는 전날에도 그랬고, 처음 홀로 여행을 떠나는 전날에도 그랬습니다. 뭐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다 못해 일상의 만남을 위해 약속장소로 향할 때도, 저는 서로를 향한 기다림에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은, 그 절반 이상이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기다려야 할 일들을 자꾸만 더해가야 하지 않을까? 꼭 편지를 주고 받는 일처럼. 일상이 기다림이라면…… 삶은 얼마나 활기차게 피어날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K씨가 신을 믿게 된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몇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생을 더욱 길게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헛된 인생 끝에 종국에는 죽음. 이것이 삶의 전부라면, K씨는 너무나 절망하여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K씨는 ‘다음 생애(천국)를 위해서’라는 새로운 기다림을 자신의 인생에 초대한 것이다. 그렇게 K씨의 일상이 기다림이 되었고, K씨의 삶은 실로 활기차게 피어났다.
인생을 마치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다. 혹은 운동회가 있는 전날 밤처럼 다음날 친구들과 뛰놀 생각으로 뒤숭숭해하며 잠을 못 이룬다든지,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 생각에 며칠을 두고 준비하며 행복한 긴장감으로 즐거워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신비한 일이다. 이렇듯 신을 맞이하고 나니, 그렇게 헛되다 한 인생도, 종국에 치닫는다 한 죽음도, 이제는 매우 의미 있는 은밀한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즐거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이 아니라면, 인생은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무료함과 통한의 고행길이 되는 것이다. 신나는 인생은 언제나 기다림으로 풍성하다. 기다리고 있는 그 일을 생각해보라. 기다림의 마음이 우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고후 8:11] 이런 것이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생은 헛되다. 결국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 없다면, 인생은 너무 슬퍼진다. 그러면 생각해보라. K씨는 연약했던 걸까, 아니면 지혜로이 처신했던 것일까?
IP *.230.127.27
예의, 실패란 것이 있고 성공이란 것이 있다. 불협화음 같은 일상이 있는가 하면 보람찬 오늘 같은 행복이 있는 법이다. K씨는 한 때 생각했다. 실패와 성공은 본래 무의미한 것이라고. 일상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과연 그럴싸하기도 하다. 가령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성공을 위한 도움닫기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한 차례 성공한 교만은 다시금 실패를 불러내는 요괴의 주문이기도 하다. 그대로 실패이고, 그대로 성공인 것은 없다.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 까다로운 것이다.
일상과 행복도 그렇다. 매번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지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행복이란 것도 반드시 그곳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거듭되는 일상에 가끔은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탈이란 것도 결국에는 더욱 힘차게 일상으로 돌아오겠다는 다짐 정도가 되어야지, 그곳에서 행복을 찾겠다고 한다면 인생은 심히 꼬이고 만다. 인생이란 결국 일상과 행복간의 주사위 싸움이며, 필요한 것은 살아가면서 그 행복의 빈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K씨는 이런 것이 인생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순간의 실패와 성공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답게 꾸며갈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인생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K씨에게는 심각한 회의가 찾아 들었다.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성공? 실패? 일상? 행복?”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끝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사는가?”
한동안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 말은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 자극이 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죽음. 매번 잊고 살아가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문제. 그러나 굳이 떠올려 고민한다고 해도 뚜렷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어려운 문제. 늘 도전적이고 낙천적으로 세상의 험난함을 유연히 넘어오던 K씨 앞에, 불현듯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의 가파른 산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저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만남이 헤어짐을 전제로 하듯,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인생을 허무하게 흘려 보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차 죽음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인간은 그렇게 디자인되어 있다. 애잔하게도, 어떤 이들은 어떤 이들보다 좀 더 생동감 있게 존재했던 것뿐이다.
가만히 보면, 삶은 초라한 구석이 있다. K씨는 가끔 인생을 1열 종대에 비유하곤 하는데, 틀린 말은 하나 없다.
“산다는 것? 누가 썼듯이, 1열 종대로 해쳐 모여서 밥 짐을 짊어지고 쓰러트려질 때까지 꾸준히 가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봐야, 아무리 호기를 부려봐야 방법이 없다. 일단은 쓰러지지 않고 가야디. 그래야 삶이디.”
그런데 열에 섞여 한참을 가다 보면 더욱 기막힌 사실에 숨통이 조여 든다. 이야기인 즉 슨,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 참. 1열 종대의 가장 선열에는 이름하여 ‘죽음’이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지 않은가? 다들 가자 하는 것이라 간다지만, 그래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간다지만, 죽음이 왠 말인가?
인생의 목표가 죽음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헌데 알고 보니 모두의 종착지는 그곳이 아니고서야 또 어디겠는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실들 앞에 K씨는 인생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인생을 꾸미는 지대한 것으로 ‘의 식 주’ 란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의’이고, 어떤 것이 ‘식’이고, 어떤 것이 ‘주’인지 K씨는 모른다. 한 유행가 가사처럼,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을 건졌다” 하는 수도 있겠으나, 어디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런가? 작년 것들은 유행에 거슬린다 하여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야 하는가 하면, 제 몸에 어울리는 ‘의’를 찾는다 하여 시장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기도 해야 한다. ‘식’도 그렇고 ‘주’도 그렇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매번, 더 맛난 것, 더 근사한 곳을 갈(渴)하기 마련이다. K씨는 이 모든 것에 회의적이다.
K씨는 말한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을 터인즉, 결국 그 나온 대로 돌아갈 것임은 자명하다. 일평생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참으로 폐단이다.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할까?” [전 5:15-16]
그러고 보니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짐짓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육욕의 안경을 재빨리 벗어버린다. 완전히 그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은 조금은 편안하게 삶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옛 성인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공허한 마음을 조금씩 채워가려는 것이다. 허나 그것도 그저 그것 그대로일 뿐, 그런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다 매워질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삶이란 것은 여전히 ‘공수레공수거’인 셈이고, 인생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지혜로운 자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겠냐 마는, 혹은 그런 자가 있다 하기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속내라는 것이 더욱 그러(공허)하다. 전에 있던 지혜자 중에 솔로몬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내가 일평생을 읽고 씀으로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겠다.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온갖 것에 마음을 썼으나, 이제서야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 1:16-18]
자, 그렇다면 K씨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시험적으로 스스로 최상의 행복을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웃는다. 내 인생은 희락 그 자체이다. 내 마음은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또 필요한 쾌락을 제때 취하여 무엇이든 옳게 갈무리(정돈)한다.”
“나의 사업은 크다.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누구보다 많은 재물을 가졌으며 은과 금과 여러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다.”
“나는 창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않고,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않는다. 이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니 그 기쁨의 맛이 달고 심히 기쁜 것이다.”
아무개의 인생이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몸이 희락하고, 재물이 가득하며, 지혜도 여전한데, 그 분복(타고난 복)은 스스로의 수고한 결과니, 그 기쁨이 과연 극에 달하였다 하겠다. 그러나 K씨는 더욱 침울한 결론에 이른다. 즉 슨.
“그 후에 본 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하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얻은 인생의 목표가 산산이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전 2:1-11]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죽음’ 때문이다. 어떤 성현이 그랬듯이, 내가 죽으면, 거대한 우주라도 한낱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죽음을 극복하는 문제’인데. K씨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K씨는 통탄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 1:1-11]
K씨는 전에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대도 그런가요?
편지를 보내고 나면……
또 편지가 언제 오나 확인하게 되고.
편지를 받고 나면……
정신 없이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도,
“보내야 하는데……” 하며 재촉하게 되고.
이에 대해, K씨는 자신도 품고 있던 그 기다림의 애틋함에 대해 이렇게 적어 보냈다.
“편지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 일이 즐거운 까닭은 기다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에도 그랬고, 운동회가 있는 전날에도 그랬고, 처음 홀로 여행을 떠나는 전날에도 그랬습니다. 뭐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다 못해 일상의 만남을 위해 약속장소로 향할 때도, 저는 서로를 향한 기다림에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은, 그 절반 이상이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기다려야 할 일들을 자꾸만 더해가야 하지 않을까? 꼭 편지를 주고 받는 일처럼. 일상이 기다림이라면…… 삶은 얼마나 활기차게 피어날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K씨가 신을 믿게 된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몇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생을 더욱 길게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헛된 인생 끝에 종국에는 죽음. 이것이 삶의 전부라면, K씨는 너무나 절망하여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K씨는 ‘다음 생애(천국)를 위해서’라는 새로운 기다림을 자신의 인생에 초대한 것이다. 그렇게 K씨의 일상이 기다림이 되었고, K씨의 삶은 실로 활기차게 피어났다.
인생을 마치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다. 혹은 운동회가 있는 전날 밤처럼 다음날 친구들과 뛰놀 생각으로 뒤숭숭해하며 잠을 못 이룬다든지,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 생각에 며칠을 두고 준비하며 행복한 긴장감으로 즐거워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신비한 일이다. 이렇듯 신을 맞이하고 나니, 그렇게 헛되다 한 인생도, 종국에 치닫는다 한 죽음도, 이제는 매우 의미 있는 은밀한 (천국을 향한) 기다림의 즐거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이 아니라면, 인생은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무료함과 통한의 고행길이 되는 것이다. 신나는 인생은 언제나 기다림으로 풍성하다. 기다리고 있는 그 일을 생각해보라. 기다림의 마음이 우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고후 8:11] 이런 것이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생은 헛되다. 결국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 없다면, 인생은 너무 슬퍼진다. 그러면 생각해보라. K씨는 연약했던 걸까, 아니면 지혜로이 처신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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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 그리움이 봄이라면_8 [1] | 개구쟁이 | 2008.05.31 | 3035 |
1808 | 술에 취한 바다 -이생진 [3] [3] | 홍정길 | 2008.05.31 | 5141 |
1807 | 연필로 쓰기 - 정진규 [1] | 연두빛기억 | 2008.05.31 | 4036 |
1806 | 오늘 같은 날 - 이시영 [1] | 연두빛기억 | 2008.05.31 | 2927 |
1805 | 추석 [3] | 한희주 | 2008.06.01 | 3052 |
1804 | [99] 미풍 [4] | 써니 | 2008.06.01 | 3280 |
1803 | [100] 그리운 날에 [12] | 써니 | 2008.06.01 | 3354 |
1802 | 종교와 인본주의 [7] | albumin | 2008.06.01 | 3309 |
1801 | 꽃길따라..(자작시) [2] | 김영철 | 2008.06.02 | 3738 |
1800 | [100-1] 거울 [4] | 써니 | 2008.06.04 | 2912 |
1799 | 내꿈은 어디로 갔나 [4] | 이수 | 2008.06.04 | 3406 |
1798 | 시인의 물리학 [2] | 이선이 | 2008.06.04 | 3274 |
1797 | 박경리 선생님의 마지막 산문 [12] | 창 | 2008.06.05 | 3493 |
1796 | [2] 미치거나 즐겁거나 [4] | 써니 | 2008.06.07 | 3068 |
1795 | [3] 어제보다 성숙한 조바심 [6] | 써니 | 2008.06.09 | 3125 |
1794 | 며칠 전 쓴 글을 옮겨 봅니다..^^ [3] | 김지혜 | 2008.06.10 | 2733 |
1793 | 어쩌것는가? [2] | 백산 | 2008.06.10 | 3320 |
1792 |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6] | 아무도안 | 2008.06.11 | 4750 |
1791 | 나는 배웠다 [7] | 世政 | 2008.06.12 | 3478 |
» | 소망에 관하여_9 [3] | 개구쟁이 | 2008.06.13 | 2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