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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6일 09시 58분 등록
* 이혼과 함께 밀어닥친 IMF 외환위기


이혼을 하고는 홀로서기 과정에서 혼자 결정하고 혼자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친정식구들도 모두 멀리 떠나 살고 있고, 내가 막내라 부모님은 연로하시니 더욱 그랬다. 전략과 전술 그리고 문제의 초점에 약한 나는 앞으로 살아가야할 현실적 생활에 대해 맨몸으로 부딪히며 늘 이러 저러한 궁리가 많았다. 내 전공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넉넉한 밥벌이가 되지는 못했다. 다만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혼한 그해 12월 IMF 사태가 터져버렸고 나라 안이 온통 어두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뒤숭숭했음에도 내가 일을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척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일시적인 외환위기 사태라고 했지만 당시에는 건국이레 국가부도사태 라는 둥, 얼마 후 수습이 되고나서는 일제 치하 다음으로 버금가는 국치일 이었다며 당시 집권당을 겨냥한 맹렬한 비난으로 정치권과 매스컴들은 요란스레 떠들어 댔을 정도였고, 불황의 한파는 중간 서민층의 붕괴라고 하는 커다란 경제적 지지기반에 타격과 상실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니 사실 나라 안이 보통의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다. 평생직장 개념의 정년제는 어디로 가고 이때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와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연봉제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실시되기도 하는 등 여러 부분에서 갖가지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시적인 외환보유고에 대한 문제로 인해 시발된 IMF 이었기에 국가의 기본적인 산업 구조와 기반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 구제 금융을 지원하는 세계금융권과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러기에 그런 와중에도 기업들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형편이 나았고 병원 중에서도 개인병원들은 오히려 크게 타격을 입을 일이 별로 없었다. 새로 빚을 내어 과하게 확장하거나 개원한지 얼마 안 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는 크게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워낙에 대부분의 개인병원의사들은 더러 쫀쫀한 경우가 있기는 한데 그래서 고용주에 따라 가끔 천차만별의 대우를 받으며 고용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건 주어진 복에 따라 할 수 없는 거고 월급이 잘 안 나오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우리 업계에서 호칭하는 중형병원 즉 보통 개인이 운영하는 준종합병원급들 외에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고 잘 운영되어 나갔다. 다만 간혹 운영진 측에서 자신들(의사들이나 기타 친인척이 합세하여 병원을 운영할 경우)의 몫은 항상 일정하게 맞추어놓고(- 이 시기에 웃기는 짜장 같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제목의 책이 연속적인 베스트셀러로 등장하기도 함) 벼룩의 간 내 먹듯 직원들의 봉급을 줄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며 상여금 등을 지급하지 않는 등의 착취 사례는 있었어도 일 꺼리 자체가 없다거나 취직을 못하는 경우, 일을 하고도 월급을 아예 못타는 일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하여 흔치 않았고, 또 내가 근무하는 장소인 대게의 병원 물리치료실이라고 하는 곳은 무엇보다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병원에서 가장 좋은 시설로 운영되기도 해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더군다나 고정고객이 항시 확보된 곳으로서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고 다른 치료와의 연계는 물론 장기 환자를 흡인할 수 있는 곳이 물리치료실이기도 해서 우리들의 위상이 내려가지는 않고 오히려 능력에 따른 차별대우로 인센티브제가 도입되는 등 수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 후 우리쪽과 특별히 관계되는 보건복지행정에도 여타의 변화의 일환 중 괄목할 만한 것으로 의약분업이라는 제도를 들 수 있는데, 오래 기득권을 누려온 병원 의사들은 자신들의 아성만 믿으며 단합이 잘 안 된 반면 경영적 마인드가 의사에 배해 월등했던 약사들은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합함으로써 선진국들의 사례를 예로 들며 의약 분업에 사활을 걸고 매진하여 목적을 쟁취해 내었다. 나중에 경영을 해보니 밥그릇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의사들의 한탄과 시름이 적지 않았지만 이미 강 건너 불이 되었고 그 분쟁은 의협 측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대신에 이후부터는 절대로 어떤 밥그릇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투적 태세를 갖추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정작 선진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은 수익과 직결되는 의사들의 이해상관에 부딪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의료기사들만 쪽을 못 쓰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만약에 단독개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양질의 의료서비스로 환자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지만 애꿎은 물리치료사들의 단독 개원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묘원해지고 만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는 잘난 사람들의 힘이 우선적으로 지배하는 사회풍토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약한 사람들은 언제가 될지도 모를 그날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공연히 수업 연한과 학제만 길게 늘려 수업료부담만 안긴 채 속수무책에 머물러 있는 것이 작금의 딱한 현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묘연하다고 하더라도 변화의 사조에 발마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치료에 대한 도입과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기도 하거니와, 더군다나 한 동안 집안 살림만 하다가 임상에 뛰어든 나와 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으로서는 주경야독은 필수 요소라 할만 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래서 나는 더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나가기로 작정하고 밀어붙였다.

우선은 이런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돈을 벌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편으로 위안을 삼을 만 했고, 더군다나 능력에 따라서는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며 차별화된 전략과 마케팅을 전개해 나갈 수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으리만큼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바람이 획기적으로 거세게 불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때이후 어느 직종에서건 재취업의 바람도 성행하여 불었고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장롱 속에 묵혀둔 자격증을 꺼내어 가족의 생계와 가정 형편을 돕기 위해 직업전선으로 다시금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퇴(명예퇴직)니 졸퇴(졸지에 하게 되는 퇴직)니 황퇴(황당하게 하는 퇴직)니 등 이름도 가지각색인 퇴직이 기업의 상황에 따라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장기 불황사태로 접어들면서 실업자가 급증하는 사태로 번져가게 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40대 이후에는 별로 근무하는 일이 없던 우리 직종의 여성 근무자들의 연령층대를 점차 높여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젊은이들처럼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이직을 자주 하는 사태를 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힘든 일을 잘 견디는 아줌마부대가 나타나면서 약간 적은 임금도 아줌마라는 이유로 마다하지 않은 채 우선 일자리를 확보하고 보니 이들이 각광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비단 우리 직종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여타의 전문직 서비스업종에서는 더욱 눈에 띠는 변화이기도 했다. 하다못해 이때에 백화점의 점원도 예쁜 아가씨에서 고된 근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잘 참고 견디는 미즈식 아줌마부대로 탈바꿈되기도 했다. 처음에 나 역시도 백화점과 같은 화려한 네온사인을 받는 서비스 직종에서 아줌마들이 등장하자 그 태도의 둔함과 상냥함에서 다소 떨어지는 나이 먹은 점원들에 대해 좀 시큰둥했었다. 한편으로 솔직히 왜 서비스 직종에서 유난히 젊고 예쁜 사람들을 내세우는 지도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보니 절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 대게의 경우 암암리에 아집과 고정관념 등이 생겨나서 사람들의 신선한 의욕과 새로운 시도를 저해 하는 요소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중년에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도 이런 점들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나의 직업과 일

나는 여태 나보다 위에 상급자를 두고 부서의 일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20대 초반 처음 일을 할 당시부터 혼자 책임을 맡아 다 관리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이 배짱에 잘 맞았던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혼이라는 멍에를 둘러쓰고 할 수 없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재차 새로이 일을 시작할 당시에는 그저 어느 한구석에 조용히 처박혀 지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이미 서른 중반을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우리 분야에서 대학병원 같은 좋은 직장으로 새로이 취직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기도 해 조용히 머무르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며 지냈다. 그래도 타 직종에 비해 발을 넓혀 알아보면 취직이 용이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신중했어야 하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자면 나의 상황을 까발려야 하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아 집에서 가까운 곳이나 퇴근 후 이어지는 공부하기 용이한 곳 등을 우선 선택하여 취업에 임했다. 취직이 손쉬운 점의 단점이기도 하리라.

또한 나는 성격이 미련스럽기도 해 일을 도맡아 하는 편인데다가 요령을 전혀 피울지 몰라서 항시 신욕이 고되긴 해도 보람과 재미를 느끼며 전력을 다했고, 전공과 치료에 도움이 되면서 앞으로 더 나은 무엇을 해보면 좋을까를 항상 궁리하며 지냈다. 처녀시절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우선 선택하며 그저 경험이나 쌓겠다는 식으로 마음 느긋하게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로 인한 수입도 생활비로 직접 쓰이기보다 내가 알아서 저축하며 용돈을 관리하는 정도였고, 결혼하면서는 아이들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에 경제적 부담을 가지긴 했지만 아이들 양육비와 생활비 외에는 전혀 내 개인적인 소비는 일체 하지 않고 지냈으니 크게 생활고를 걱정하거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아무도 나를 위해 더 이상 챙겨주고 신경 써 줄 사람도 없고 내 스스로 일체의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졸지에 사람의 신분이 확 바뀌는 것과 같았다. 어엿한 가장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하고 대처하며 살아가야 하는 전투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일단은 결혼해서 떠날 때처럼 출가외인과도 같은 입장이었고 어떻게 살든 이제는 철저히 내 운명 내 팔자 안에서 내가 알아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어려서부터 남다른 경제관념은 있어왔고 지독하게 근검절약하는 편은 아니지만 규모 있는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태도는 갖추고 있었다. 일단 어떻게든 자립의 여건을 경제적 측면에서부터 가장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여서 깜냥대로 계획을 세워 물샐 틈 하나 없이 진행시켜 나갔다. 내 직업에 관한 진로이지만 처지와 상황이 있는 만큼 부모님과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나 자신의 이미지 관리 따위도 곁들여 해야만 했다. 그래서 여러 생각 끝에 돈보다 내 건강 상태와 이미지에 더 중점을 두며 일을 해나가면서 차분히 생각해 볼 요량을 가졌다. 아니 그보다 먼저는 나의 심적 상태를 추슬러야 했고 그래서 생활을 위해서는 돈을 벌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수양과 덕을 잃지 않기 위해 공부를 병행할 계획을 세워 그렇게 두 가지를 양립해 나가며 무엇보다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의 태도와 선택을 하여나갔다.


* 빠른 전환의 모색과 당당한 대응력 필요

요즘이야 이혼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 이라할지라도 내 유년 시절 그렇게 배우며 성장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이란 것이 그러한 상황들에 대해 유난히도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막상 내 일로 닥쳤을 때 몹시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누구나 자기 입장이 되고 보면 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해도 내 경우는 유난스레 이혼으로 인한 또는 바뀐 상황에 대한 처세와 부적응의 기간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었고 시름 또한 대단히 깊고 길었다. 나도 내 성격을 잘 알아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 등을 접하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반영하여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두 세배 길게 적응 기간을 잡아 보기도 하며 생활에 임했지만 그래도 역시 심한 편에 속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성격 탓이겠지만 요즘은 무엇이건 더 빨라지는 세상이라 인식의 전환들도 급변하지만 어쩐지 내 경우는 전환이 그리 쉽지 않았다. 마치 상황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 자신도 그렇게 길게 늘어뜨리며 침잠해 들어가서 우선 탈피하려는 생각보다 이혼을 삶의 한 요소로 내 생활에 적응시켜 살아보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처음부터 재혼 따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이혼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라거나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불가피한 극단적 처방 같은 선택의 감이 없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억측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런 심적 요소가 내포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어쩌면 미련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원초적인 내 인생에 대한 희망이 무엇보다 더 많이 가미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있는 한 올바르게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장 관건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선택할 당시도 그랬고 이혼에 이르기까지는 아예 이 일 물리치료사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생각은 전혀 꿈에도 하지 않고 지냈다. 결혼 전 내가 마지막 나의 직업으로 선택하려던 것은 교직이었다. 특수학교에서 임시로 교직을 하면서 결혼 생활 이후에도 할 만한 직업으로 생각하며 내내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근 20 년 전 당시에는 특수학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서울시에는 단 한 곳만이 공립이었다. 장애우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도 지금에 훨씬 못 미치게 운영되었다. 그래서 지방이나 사립학교 외에는 일자리가 흔치 않았었다. 나중에는 보다 많은 시설이 증설 되고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교직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아이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상태에서 남의 아이들을 돌보는 모순된 감정을 나 자신이 받아드리기 어려워 그 일에 대한 미련을 체념한 채 병원의 한 구석에 처박히듯 지내면서 내 생활을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 계획으로 이끌어나갈 구상을 하지 못했다. 이점은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잘못 간과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때는 슬픔과 자책과 상황으로부터 우선 숨고 싶고 의욕이 나지 않아 제대로 옳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와 허심탄회하게 상의도 거치지 않았고 그저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찾아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만큼 욕망도 꿈도 이혼과 함께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상태에서의 체면치레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일을 구하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모자란 것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도 또 이중으로 무얼 하겠다고 하면서 찾아다닌 꼴을 생각하면 지금에 와서는 참 우습고 어리석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지만 그때는 모든 도전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세상 밖이 싫었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벌거벗긴 채 거리라도 배회하듯 창피하고 부끄러운 수치감과 자괴감만이 가득 찼다. 환한 햇살도 아무 의미가 없었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망자체가 끌어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못해 생을 연명해 나감과도 같이 체념과 자포자기에 분노와 억울함 등의 상심과 슬픔만이 가득해서 뭐가 뭔지를 제대로 침착하고 원대하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점을 돌이켜 볼 때 너무나 소극적이고 안이하게 대처한 감이 없지 않다. 탁 까놓고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갔어도 무방했겠지만 이유와 원인부터 먼저 따지고 묻는 한국형 끈끈한 정리가 이런 상황에서는 왜 그리 난처하고 싫었던지 아무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적 상태여서 더 나은 방법을 간구하지 못한 점은 지금에 와서는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직장이 편했거나 좋았다면 어쩌면 그렇게 까지 열심히 고심하고 적극적으로 발품을 팔아가며 뛰어다니지는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지난 시간 동안에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아쉬움은 조금 남을 지라도 결코 후회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았고 그만하면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 보다 장기적 대안과 안목을 가지고 구체적 직업관으로 접근해야

생활인으로서 본다면 가장 잘못됐다고 할 수 있는 점이 상황을 올바르고 깊게 판단하여 하나하나 근본적으로 탐색하고 심사숙고해서 장기적 목표와 대안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기보다 지나고 보니 우선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게 수습하며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하는 면이 없지 않다. 한마디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감정이 이성을 훨씬 압도한 상태에서 균형감이란 찾아볼 수 없이 마구잡이로 위기모면 같은 상황탈피를 먼저 했던 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마다 이유와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기 때문이고 나름 최선을 향해 쌀알의 뉘를 골라내듯 세밀하게 따져가며 초조하게 애태웠을 것이다. 또한 삶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벽한 상태에서의 출발이 아니라 하나하나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발전이라는 것도 이제는 이해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큰 허점은 언제든 재결합을 하게 될 것을 너무 미리부터 염두에 둔 나머지 제대로 상황을 전략화 시키지 못하고 또한 제대로 된 나의 삶을 찾아나서는 데에 다소 엉거주춤 한 감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기는 했는데 늘 상대를 의식하느라 나를 최대한 이끌어 내며 보다 획기적이고 혁신적으로 임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혼을 했지만 여전히 한 사람의 아내인양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어미라고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크게 짓누르고 있었고 오매불망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신해야 함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이중적인 심적 갈등을 내내 지속시켜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점이 이제까지 내게 남은 가장 큰 갈등요소로서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단락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나는 내내 이 굴레에서 이전과 같은 맥락에 고립되어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보다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되돌아 왔으니만큼 보다 나은 모색을 찾아 나가야만 하리라. 미망은 깨달음이 찾아드는 순간 보다 나은 실천으로 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엔 막상 내 힘만으로 생활을 전적으로 꾸려가려 하니 참담하기도 하고, 이전에 일할 때와는 태도와 양상이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야만 했다. 나는 무엇보다 홀로서기를 해내야 하는 가장이나 다름없었고 어떠한 난관 하에서도 내 본성을 잃지 않는 단단하고 야무진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한꺼번에 모조리 구체적으로 이끌어 내기에는 내 생각의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완전한 혼자라기보다 항상 보이지 않는 등 뒤에 묵직한 무엇을 달고 사는 기분과 같았던 것이다. 그가 당부인지 족쇄인지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남부끄럽지 않은 삶의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절대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 등등을 한꺼번에 다 모색하며 가장 최선으로 어우러지게 살아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쉬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욕심도 욕망도 얼마간은 줄여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난한 삶의 길을 택하기로 작정했다. 무난한 생활 태도와 범위 안에서 꿈과 자립을 해결하고 모색해 나가기로 결심을 굳혀나갔던 것이다.


* 일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직업은 직업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어느덧 내 어려움에 처하고 나서야 진심으로 남의 입장을 미루어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도 있었으며, 또한 상대의 처지들이 보다 가까이 눈에 들어오고 감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 아픔으로 인해 육신이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보다 측은지심으로 다가왔고, 병세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단면까지도 훤하게 파고 들어오며 가장 갈급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다 깊고 넓게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을 나누니 서로가 편안 상태에서 치료를 하고 받는 도움과 나눔이 펼쳐지고 그러한 관계들의 쌓임에서 보람이 찾아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리도 갈급해 하며 목말라 하던 인정받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신뢰로서 지지 받고 싶던 관계에 대한 회복들을 내가 가볍게 버리고 방치해 왔던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시 선택하여 찾아온 최 말단의 직업적인 일로서 칭찬받으며 보상받아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다시 찾아나갈 수 있었으며, 더 좋은 관계와 치료를 위해 애쓰고 싶다는 의욕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것은 꼭 내 상품 가치를 높여 월급을 부풀리는 일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존재감의 확인을 심어주며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일깨워주었다. 물론 다시 일을 하면서는 긴장감도 들고 잘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과 새로운 다짐으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나누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우연의 사소한 많은 일상의 연골고리들로 인해 자연스레 필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치 일과 나를 떼어놓을 수 없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홀로서기 최우선의 요소로서 무엇보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것은 세상의 여러 하고 많은 일들 가운데 여러 병증으로 인해 고통 받는 환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한 순간이나마 편이 쉬게 하며 치료와 안정으로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일인가를 소중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 삶에서 내 불운한 결혼 생활을 통해 내가 갈급해 하던 문제들과의 모색이었고 화해였으며 해결의 실마리로 작용해 나갔다. 크게는 생명을, 작게는 일상을, 그리고 깊게는 인간 내면까지 차고 들어가 고통의 한 부분을 덜어 돕고 있다는 생각에 세상의 많고 많은 직업 가운데 내가 선택한 전공과 직업이 참으로 좋은 것이로구나 하고 새로운 정이 붙어나고 참 다행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며 새삼 감사했다. 현실적으로는 내게 돈이 필요하고 돈이 더 중요했지만 그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고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직업은 직업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귀한 직업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류대학에 비해 시덥잖은 성적에 맞추어 들어가 공부하지 않는 꼴통들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다닌 대학의 전공과 라이센스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날의 불합리와 모순으로부터 해방되고자 갈망했던 크기만큼 죽을 각오로 임하며 완전한 무無와 최저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금 시작해 보려고 하는 나의 의지는 차츰 정신을 가다듬어가며 딴엔 있는 힘을 다해 안간힘으로 견뎌나가기 시작했다.


* 일과 공부의 병행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바닥체험

가장 철두철미하게 세운 계획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일과 공부를 함께 병행해 나간다는 것이었고, 나 하나를 그 누구에게도 걱정시키지 않고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책임진다는 투철한 각오로 임했다. 확실한 자립 경제력을 갖출 때까지는 옆도 뒤도 돌아볼 틈 없이 앞만 보며 내닫기로 단단히 나를 조여 다짐했고 확고한 실천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주야장천晝夜長川 한결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일의 처음에는 몹시 망설여지고 두려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요령이 터진 이후에는 일한 만큼의 대우와 처우를 반영하며 제대로 몸값을 올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더 나은 치료와 더불어 더 나은 개인적 성취에 대해서도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궁금한 사항들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도 해보고 도전을 거치기도 했다. 우선은 만만한 것에서부터 차츰 강도를 높이며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는 무엇들을 향해 한발 한발 딛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각했던 것이 혼자라고 해서 이전의 계획들을 깡그리 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못할 것이 전혀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하여 예전에 세워두었던 계획들을 차츰 차츰 하나 둘씩 꺼내어 묵묵히 내 길을 향해 가리라 다짐하고 실천에 옮겨나갔다. 이미 한번은 죽기를 작정하고 처절하게 부딪혀온 것이기도 했고, 어차피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무엇을 못하거나 두려울 것이 없는 터이기도 했다. 즉 모든 것을 다 잃은 후 이었으므로 더 이상 잃을 무엇도 없다고 주변에서 하는 말과도 같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다 성취할 수 있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이러한 바닥체험은 정말로 특별했다. 어디까지 가라앉을 수 있으며 어떻게 떠오를 수 있는지를 나는 맨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떠오르며 음미해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섹스에서만 느끼는 오르가슴이나 엑스터시가 아니라 변화의 귀로에선 삶의 투철한 혁명 가운데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함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리라. 죽어 쓰러져도 나는 나의 자태를 손상시키지 않고 반듯하고 곧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것만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 있었다. 바깥을 향할 때는 지난 시간들이 안겨준 수치감과 현실적 모욕감으로 인해 실패자의 모습일 뿐인 벌거벗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더할 수 없는 고유한 고고함이 응어리져 봇물처럼 터지며 서러움을 안은 채 통곡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정심대로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내고 싶은 가장 진솔한 욕망이었다. 전혀 부끄럽거나 죄스러울 것이 없는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이혼이라고 하는 주홍글씨에 한 다발의 굴비두루미처럼 엮여서 매도되어 비춰질 내 인생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삼키며 하염없는 울먹임 속에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들여다보아도 좋았고 어느 누가 시비를 걸어온 대도 전혀 거리낌이 없을 만큼 나는 단단하고 철통같은 정신무장으로 나를 지키고 투명하게 이끌어 나가기를 수 없이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씩 달성해 나갈 수 있었다. 직업을 가짐으로써 생계와 저축을 꾸려나갔고, 공부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한편 학위도 가졌다. 한 살이라도 늦기 전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을 발판 삼아 보다 빠른 자립을 꿈꾸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최대한의 절약 정신을 도모하며 나름의 재테크에도 딴엔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은 목돈을 마련했고 그것이 쌓이면 뭉치로 만들어 종자돈이 될 수 있도록 쌓아나갔다. 하여 적은 돈으로도 충실한 재테크가 될 수 있도록 단단히 안정성을 고려하여 투자에 임했다. 워낙에 작은 벌이라 큰돈으로 불어나지는 못했을지언정 다행히 월급만 으로서는 짧은 기간 내에 결코 모여가기 쉽지 않은 제법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 나조차 알 수 없는 내면의 위대한 잠재력과의 만남

지난 10년의 생활은 내가 짐작하지 못한 내 안의 여러 나와의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버릴 것이 없는 아까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며, 누구보다 내가 나를 신임할 수 있게 되었고 제법 가치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전혀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향해 여러 번 직장을 옮기기도 했고 일의 순서를 차분히 계획하고 이루어 나갔다고 하기보다 성과 위주의 조급함을 보이기도 한 면이 없지 않다. 비체계적인 여러 단기 계획들의 연장선상이었지 처음부터 원대한 계획과 비전 아래 전혀 새로운 인간형으로 재탄생되지는 못하였다고 하는 불만도 앞선다. 여전히 한쪽 구석에 처박힌 상태의 말 못하는 사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늘 뒤를 돌아보아야 했고 그것으로서 흔들림 없이 추슬러 나가고자 안간힘으로 버티기도 했다. 한 사람에게서 버려진 아내이기보다 시련 가운데 놓인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에게 초라하고 싶지 않은 어미였기에 더욱 정심으로 몰입해 나갈 수 있기도 했다. 세상이 나를 다 버리고 나를 둘러싼 가장 소중한 이들로부터 외면당한다 하더라도 나만은 나를 버릴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시시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의 최면과 상상 속에서 살았기에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곧게 다져가길 기를 쓰며 한길을 향해 줄곧 힘차게 내달을 수 있기도 했다.

간혹 너무 지쳐 있을 때에는 내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니었고 주위에서 명명하는 대로의 사람으로서 낯선 이방인의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도 했다. 누구도 아무것도 내 자의와 내 원초적 본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해해 주는 것 또한 없다고 적막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가 되어 살아가면서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지금 누구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예속된 누가 아니라 내 고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난 시간의 인연으로 인해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더군다나 내가 그리 꿈과 야심이 크거나 이기적일 만큼의 자기 삶에 강한 의지를 지닌 야무진 사람도 못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가슴 한구석의 갈등을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고 의지한 대로의 모색을 통해 삶을 꾸려갈 수는 있었다. 이것은 작은 보람이었고 지난날에 비하면 혁명과도 같은 나름 신선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나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볼 수 있었고 계획할 수 있었고 성취를 도모해 나갈 수 있었다.


* 내 인생의 스승을 모시다

아이들과 가정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나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볼 수 없었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내게 또 하나의 족쇄가 되었고 나는 우울함에 빠져들게 되었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여자로써 가장 아름답고 귀할 삼십대를 훌쩍 넘겨 마흔 중반에 서성이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여성성의 가치가 내 인생에서 끝날 지도 모른다는 각박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고 그것은 다시금 옛날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게 하였지만, 역시나 나만이 바뀌어 돌아갈 수는 없겠노라는 단호한 결론에 이르며 또 다른 심적 갈등을 거듭해 나갈 수밖에는 없었다. 공연히 혼자만의 이런 저런 생각으로 끌탕을 하며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까지도 오만갈등 속에 헤매곤 했다. 예전에 습관에만 얽매어 이를 테면 일을 좀 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이런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조차 사치스런 놀음인양 거부감과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인생을 사랑하는 나는 어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평생의 한 분 스승을 맞아드리기로 작정했고 그분의 연구원이 되어 마침내 다시 새로운 삶을 모색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그 기간 동안에도 나는 누차 여러 번에 걸쳐 심적 불안과 갈등을 쏟아내며 갈팡질팡하는 모습들을 그대로 가식 없이 거르지 않은 채 다 토해내면서 살았다. 일종의 반발심 같은 오기이기도 했으리라. 변화, 변화가 그리 쉬운가? 나도 변화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정말 나를 변혁시켜나갈 수 있을까를 마치 실험대 위에 올라탄 개구리 모습을 자처하며 연구소라는 공간을 마음껏 누비듯 해가며 내 일상에 대해 매스를 들고 나섰다. 이 공간에 올리는 글은 때론 내 일기장이고 기도며, 편지고 소망이며 한탄이었다. 눈물이고 한숨과 절망이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자책 속에서도 한 가닥의 소망으로 피어나고 싶은 얼룩 진 자화상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지금껏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어떻게 내가 어떤 모습의 무엇으로 바뀔지 나도 나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오직 하나 제대로의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 하나만 간단하게 그리고 굳건히 건재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오랜 지병과도 같은 방황과 갈등의 보따리를 겁 없이 펼쳐 보이며 풀어재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짐하고 선언하기도 했다. 다시 제대로 원래의 나, 가장 살아보고 싶은 나로 거듭 태어나고자 소망함을 몇 번이고 밝혔다. 하지만 우유부단함과 게으름 그리고 무엇보다 전략적이지 못하고 다소 부실한 초점은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며 맴돌기만 하는 지루한 일상을 대변할 뿐이기도 하다. 이것에 대해 조바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식적일 수도 없고 여니 사람들처럼 조용히 과묵하게 침잠해 있지도 않으니 보는 사람 여하의 입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부산스럽기 짝이 없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생겨먹은 것이 이대로 이니 감추고 싶은 마음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들을 대강 상추 솎듯 모아가다 보면 행여나 괜찮게 역어지기도 할런가를 감히 꿈꾸는 것일 게다. 그보다 솔직히는 쉬지 않고 쓰고자 하는 허영심이 더 크기도 할지 모르겠다. 나와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해 쉬지 않고 쓰다가 보면 어느 날엔가 제법 건질 만한 글이 튀어나올 수 있지 않을까를 간절히 바래보는 심사이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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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ah
2008.07.16 17:21:57 *.83.195.47
이 비오는 날 참 솔직하시네요.......
삶은 경험이라지요. 세상의 가르침이요...말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이 어우러질때 하나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애뜻한 마음의 글을 읽었습니다....
요즈음은 책임이라는 단어를 마음 공부 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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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17 09:51:55 *.36.210.11
ing...


제 글이 앞 뒤가 잘 안 맞지요? 쓰면서 저도 느껴요. 자칫 상당한 오해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겠다 하고요. 그래서 집어 치울까도 몇 번 생각하고 망설이기도 하지요.

어제는 다행이 비가 와서 글을 올리는 제 마음이 다소나마 덜 송구했답니다.
저 자신 개인의 문제를 풀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연이어 한 번에 제대로 써내지 못하다 보니까 매번 같은 내용을 중첩적으로 쓰고 있기도 하고, 요즘같이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안 그래도 짜증스러운데 글까지 시시콜콜 왕 짜증나는 궁상스러운 글을 올리기나 하나 싶어 적잖이 망설임이 이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올리지 마. 올리지 말고 그냥 썼다가 나중에 다시 점검하고 정리가 좀 된 이후에 괜찮다 싶으면 그때 올려보는 것은 어때? 네 글로 인해 정말 짜증나거든? 너무 길고 맨 그 말이 그 말이고 그러니 제발 좀 그쳐주면 안 될까? 더 이상 읽기도 싫어... ) 이런 경우 한마디로 할 말이 없고 또 다 지난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 해서 무얼 하나 하는 쑥쓰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어쨌거나 뛰어들어 판을 벌여놓은 상태고 마무리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수습을 해나가긴 해야겠는데 마음 같이 잘 안 되는 것이지요.

독자를 겨냥하지 않고 성질 꼴리는 대로 쓰기도 했다가 그래도 더러 어떤 마음들은 나누고 싶기도 하는 일련의 심경들을 토해 내는 글들이기도 해서 읽는 이들의 마음이 어떨지 약간의 걱정이 되기도 한답니다.

일단은 이렇게라도 써가면서 스스로가 터득되는 어떤 것들을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에 써 주신 책임이라는 글자가 제 마음에도 역시 쿵!하고 다가오네요. 문득 쓰지 않으면 책임질 사항도 없을 텐데 하는 안이함도 슬며시 깃들고요. 인생은 세밀한 촘촘함보다 듬성듬성 돋보임이 훨씬 시원하고 후련해 보이기는 하는데 말이지요. 그게 성격인지 지금의 상황이 그러한 것인지 저는 지금 이렇게 빽빽하고 지루한 글쓰기를 하고 있네요.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참, 누구나 다 개인적이지요... 저는 일단은 독서와 글쓰기로서 마음 공부를 하는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너무 미흡한 감이 많습니다. 잘 알지만 현재로는 다른 공부는 엄두조차 낼 수 없군요. 이나마도 벅차서 말예요. 글이란 것을 쓰면서 여러모로 무지 모자란 사람이란 걸 더 극명하게 알게 되곤하지요. 차츰 조금씩 깨달아 나아질 수 있을 테지요. 그날들을 위한 비나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답니다. 또 어패가 있는 말이 될 지 모르겠으나 모쪼록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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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7.17 14:45:42 *.169.188.175
써니님이 무지 모자란다고 말씀하시니 이 몸은 쥐구멍을 찾아야겠군요.

그릇이 얼마나 크길래 그것가지고도 만족을 못할까..하하.

내 그릇이 작음을 알되 그 그릇의 작음을 탓하지 않고 싶습니다.

작으면 작은대로 쓰임에 맞게 쓰면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쯧쯧 아직 작은대로의 쓰임을 알지 못하고 있군요.

쓰임을 찾아가는 일 그것 또한 인생이라고 항변하면서...편하게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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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7.17 16:05:50 *.75.127.176
이혼은 장난이 아니다,3편과 이혼으로 다시 태어나다.긴글 잘 읽었습니다.사연이 길어서 배루다가 모아서 읽었는데 특히 이혼은 장난--(3)은
한꺼번에 읽지 못하고 몇번이나 멈추어가면서 제 자리 창가에 멀리
보이는 먼산을 바라보며 멈추었다가 계속했답니다.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지는 않은데 요즈음 처럼 말도 많고 밝은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되나 써니씨의 글을
보니 있기는 있었던 일로 보입니다만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끝까지
맴도는 것은 저의 상상력이 아무래도 부족한 탓이려니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감당하시는 일을 보면 당시에 일어난 일이 이해가 잘 아니됩니다. 도저히 같은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이 안듭니다.
하여튼 지나간 것은 그렇다 치고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 주었듯이 지금은 아주 잘 감당을 하신 것 같습니다.당하신 일은 지나온 삶에서
그런 일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찬 환경과 토양이어서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보입니다.좀 어설픈 해석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과거일로 잘 감당이 아니되면 그것은 내팔자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지금 왈가 왈부 말자 문제는 지금이다.앞으로는 그런 일의 근처되는 실수도 말것이며 그냥 앞을 위해 살면서 만회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동생중에 하나가 10여년 전에 이혼을 했었는데 그집 사연은
전혀 다릅니다.그집은 남편의 불륜과 집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집과 아들 둘을 남겨 놓고 몸만 빠져 나왔는데 다행이 여동생이 간호원이어서 생활능력이 있어서 그랬고 자식들때문에 위자료의 위자도
거론 못하고 몸만 빠져나와 우리집에서는 병신노릇했다고만
했었습니다.그래서 이런일은 정답은 있을 수 없고 집집마다 다 사연이
천태 만상이어서 일률적으로 도저히 얘기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써니씨는 이렇게 팍 팍 쏟아 놓으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진리는 진리라고 하면 벌써 그것이 아니라고 하듯이 아무리 쏟아 놓아 본들 그것이 아닌것입니다.
한편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더욱더 분통이 터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그리고 그렇게 마음에 맺친 일이 책을 몇권 더 쓴다고 해도 다 쏟아 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아마 모르긴 몰라도 끝을 맺지 못할 것입니다.적당한 선에서 인위적으로 매듭을 짓는 수밖에요.

지난 세월의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다 들어내놓고난 다음 새롭고도 완전한 자기다운 삶을 살고자 몹부림 치시는 써니 아우께 메가톤급 성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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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7.18 05:36:09 *.140.154.241
써니누이..

어제서야..차분하게 누이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너무 긴 글이기에 읽지 않고 있다가 그 내용을 차분하게 읽어보니 어릴적 시절이 떠오르는 군요.

당신께서는 이미 돌아가신지 이십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와 완전히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술과 폭력에 관한 부분이지요. 어릴적 괭이로 방구들을 깨고 가마솥을 깨며 장단지가 와장창 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천성이 못되먹어서 그런지 그런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참고 견딘 어머님 조차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요. 아내에게도 결혼 십년동안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꿈벗 모임에 갔다 오고서야 털어놓았지요..

누이의 그 심정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직접 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지켜본 것 때문에 그 상처가 수십년을 갔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지난번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당했던 폭력에 대해서는 곱씹으며 살면서도 내가 가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못했던 내가 누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가해자들은 편하게 사는데 피해자들은 마음의 병을 평생 지고 가는 것을 보면서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생각을 했었지요..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이 내가 외형상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아버지를 빼다박았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죠. 더구나 군이라는 상황에서 다른 쫄병들을 팰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폭력가장이 될까봐 많이 두려웠답니다. 폭력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아내를 폭력할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부를 만나서 이야기를 토해내면서 겉모습은 아버지를 닮았을지 몰라도 많은 모습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씀을 사부님께서 해 주셨지요. 그것이 그런 어둡고 힘들었던 모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신이 있다면 저놈을 가만히 두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세상을 원망하면서 지낸 시간이 작지 않지요.

어쨌거나 토해내듯 글을 쓴 누이의 글을 보면서 이제 누이도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마음에 쌓여 있던 것을 글로 쓰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 졌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게 되고요.

=

누이의 맑은 웃음에 넋이 나가 그 웃음의 이면에 그런 아픔이 있는 줄 그런 처절한 몸부림이 있는 줄 몰랐던 어린 동생이지만 ..오히려 그 몸부림을 알고나니 처음 저를 보고 웃어주신 그 따뜻한 웃음이 더 크게 다가 오는군요.

써니 누이 웃고 삽시다. 웃을 일이 없더라도 웃고 삽시다. 조그만 일에도 웃고 삽시다..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이 어디에 대고 충고질이냐고 나무라지 마시고 웃어넘기세요..

주말입니다. 또 한주를 잘 마무리 해야겠네요.
이제 산에 오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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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2008.07.18 14:15:15 *.110.86.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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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아줌마
2008.07.19 10:12:04 *.235.179.201

이혼...모든 글

덧붙여 곳곳에 있는 써니님의 댓글과 함께
그 글들을 읽기만 하여도

저에겐 누군과와 상담하듯이 한가지씩 방법이 떠오르고
아울러 세상을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가 다시 솟곤 합니다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잔인한 시선과 언어와 몸짓의 폭력으로부터
시달려온 저는
글을 읽고는
문득 정신차리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슬금슬금 지배당해 온 습관과 사고방식자체도
변.경.연사이트를 들락거리면서 (특히 써니님의 글들에서..)
미숙한 깨달음을 받곤 합니다

남의 불행(?)이 저에게 희망을 준다는 몹쓸 것을 용서하시고

빗물과 눈물과 함께
흘러가는 강이고 싶읍니다

써니님으로 부터 받은 느낌 모두를 감사합니다...!

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인생은 아직 더 남았다는 희망을 가지며
부드럽게 흘러가고 싶습니다

고 맙 습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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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19 19:50:09 *.36.210.11
이수 형아,

시간 많이 걸리셨을 텐데 고생하셨네요. 마음 담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이 길이 종교가 되고 명상이 되며 저를 구원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답니다. 성원하시는 만큼 설마 나빠지지야 않겠지요. 조금씩 서서히 괜찮아 질 테지요. 그렇게 또 사는 것 이겠지요.


햇빛처럼아,

내 아이들이 그대처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대가 반드시 잘 되고야 말겠다는 의미겠지?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전에도 없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 같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신이 준 자연상태와 그 마음밖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의 의미란 과연 신만이 아실까나? 똑같은 상황이 닥쳐 또 다시 헤어지게 된다면 그때도 나는 아비에게 줄 것이네. 그들에게 어미가 없는 적은 한번도 없다네. 다만 볼 수 없을 뿐일지 모르지만. 이제 나는 아비도 아이도 소유를 벗어난다네. 그들은 한없이 자유로울 것이네. 그렇고 그렇지 않고는 그들의 몫이라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내 삶의 길은 아닐까?


지혜,

ㅎㅎㅎ ^-^*


40대 님,

세월 참 빠르네요. 시간 참 잘가네요.
말씀대로 부드럽게 흘러 가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많이 행복하고 좋은 날들 바랍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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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7.19 20:53:58 *.52.84.203
써니누님..

나의 사려깊지 못함이 늘 사고를 치는군요.

각자의 인연이고 각자의 삶이거늘....

그 자유를 만끽하는 누이를 보고 싶군요.

남들이 뭐라하건..

자유를 즐기는 겁니다.

나 갈은 어리석은 애의 말에 신경쓰지 마시고...

=

정말 백담사 가는 것은 아닌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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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8.07.19 20:55:44 *.52.84.203
오늘 아침 방학을 하러가는 딸에게 이야기 해 준 말입니다.

"남이사.."

박이사 장이사 정이사도 아닌 남이사...

말도 안되는 것 가지고 남들이 왈가왈부 하면 한마디 하라고 했죠..

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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